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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끝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86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6월
평점 :
만남
내 마음은 골짜기 깊어 그늘져 어두운 골짜기마다 새들과 짐승들이 몸을 숨겼습니다 그 동안 나는 밝은 곳만 찾아왔지요 더 이상 밝은 곳을 찾지 않았을 때 내 마음은 갑자기 밝아졌습니다. 온갖 새소리, 짐승 우짖는 소리 들려 나는 잠을 깼습니다 당신은 언제 이곳에 들어오셨습니까
시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즐거워야한다. 앞서 말했듯이 일단 시험과 공부에서 벗어나야 시가 마음에 들어온다. 현대 시인 중 이성복을 골라보았다. 아직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라서 그의 문학 세계를 평가하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시들을 통해 섬세한 감수성과 번뜩이는 비유, 역동적 상상력을 보여준 시인이다.
『그 여름의 끝』은 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은 시 문법의 파괴와 현실세계에 대한 냉소, 화려한 연상 작용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고 두 번째 시집 『남해금산』에 이어 『그 여름의 끝』을 발표했다. 이 시집은 전체가 연애시로 읽을 수 있다. ‘당신’의 의미를 찾는 것은 한용운의 ‘님’을 찾는 것과 같다. 80년대의 시대현실이나 객관적인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부족하고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시를 읽기 시작하는 청소년들에게는 시의 본질적 성격을 보여주며 다양한 비유와 상상력을 경험할 수 있는 시집으로 추천할 만하다.
산길 2
한 사람이 지나가기 빠듯한 산길에 아카시아 우거져 드문드문 햇빛이 비쳤습니다 길은 완전히 막힌 듯했습니다 이러다간 길을 잃고 말 거라는 생각에, 멈칫멈칫 막힌 숲 속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떨면서, 가슴 조이며 우리는 산길을 내려왔습니다 언제나 끝났다고 생각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었지요
어느 산인지 그것이 꼭 걸을 수 있는 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산’의 의미와 ‘길’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면 이제 본격적인 시 읽기가 시작되었다. 비유니 상징이니 하는 말들을 어렵게 받아들이지 말고 자신의 상황에 비춰보거나 구체적인 장면을 연상해 보면 된다. 시는 이론과 개념을 굳이 알 필요가 없다. ‘언제나 끝났다고 생각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 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다양하게 생각해 보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대부분 시는 교과서에서 혹은 신문이나 잡지에서 한 편씩 읽게 된다. 공감할 수 있는 시 한 편을 읽고 감동을 받거나 그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한 권의 시집을 통해 한 시인의 흐름을 파악해 보는 것은 어떤가. 시인의 특징과 시세계를 전반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전체적인 구성과 일정한 기간 동안 시인이 관심을 가졌던 대상이나 생각의 흐름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장점이 있다. 마지막의 ‘거울’이라는 시를 읽어보자.
거울
하루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죽음 속에 우리는 허리까지 잠겨 있습니다 나도 당신도 두렵기만 합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이 길이 아니라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이 나의 길을 숨기고 있습니까 내가 당신의 길을 가로막았습니까 하루 종일 당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울처럼 당신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문학은 나와 대면하는 시간이다. 시는 기쁨과 감동을 주기도 하고 나를 위로해 주기도 한다. 마치 ‘거울’처럼 나를 비춰볼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시다. 조용히 나의 내면을 돌아보고 자연 현상과 사회 현실을 감동적인 우리말로 표현한 시집을 읽어보는 건 어떤가? 시는 언제든 당신에게 안길 준비가 되어 있다.
090820-0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