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사회학
수디르 벤카테시 지음, 김영선 옮김 / 김영사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침과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 그리고 가난은 감출 수가 없다고 한다. 기침과 사랑은 감출 필요도 없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지만 사람들은 가난을 부끄럽다고 생각한다. 굳이 내세울만한 것은 아니지만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다만 삶의 방식과 태도가 어떠한가에 따라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겠지만 가난을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게으름과 무지의 소치로 치부하는 관습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부끄러워해야 한다. 가난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의 문제이고 구조적 모순이며 계급 구조의 문제이다.

  노력하면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져 있는 경제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에서 가난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돈을 벌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져 있지만 그 기회를 얻기 위한 경쟁과정이 과연 공정하기만 할까? 언제든 노력만 하면 지금 내 부모와 나와 내 자식이 가진 가난의 고리를 쉽게 끊어버릴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행복한 나라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미국처럼 다인종 국가에서 흑인은 어떤 존재일까?

  프랑스의 좌파 사회학자들은 가정에서 부모가 사용하는 언어의 수준이나 생득적으로 습득하는 문화의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한 개인의 언어 능력을 공평하는 측정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언어영역’ 시험은 이미 태어나는 문화 자본과 성장 과정에서 습득하는 환경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는 주목할 만한 문제제기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것을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문화적 상징 자본이 다른 상태에서 학습은 이미 불공정한 게임인 것이다. 이 사회학자는 개인의 노력이 시작되면서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는 ‘수학’ 과목에 가중치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나친 ‘평등’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과 사회적 환경들은 결코 공평한 시스템과 거리가 멀다. 이 문제의 핵심에는 물론 사교육 문제가 놓여있고 입시 제도의 문제가 버티고 있다.

  수디르 벤카테시의 <괴짜 사회학>은 자연스럽게 <괴짜 경제학>을 떠오르게 했다. 책장을 여니 <괴짜 경제학>을 쓴 저자의 추천사가 책머리에 놓여있다. <괴짜 경제학>은  스티븐 레빗과 스티븐 더브너의 역작이다. 상식과 통념을 깨는 경제학자들의 세상 읽기에 관한 책이다. 유사한 제목을 달고 있는 <괴짜 사회학> 또한 통계와 연구실을 뛰쳐나온 사회학자의 거리 사회학이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순진한 중산층 대학원생 수디르 벤카테시는 거리로 나선다. 오로지 공부를 위한 목적으로!

  이제는 컬럼비아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가 되어 있는 저자가 경험한 일들은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이미 사회학 책이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으나 판권이 팔렸다고 하니 재밌는 일이다. 이 책은 기존의 사회학 서적들과 분명하게 구별된다. 그래서 ‘괴짜’라는 제목이 붙었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통계나 현상을 분석하고 질문지나 면접을 통해 상황을 이해하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이 책은 빈민가의 삶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간 사회학자의 생생한 기록이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사실적이고 생생한 기록이어서 오히려 이질감이 느껴진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겠지만 이 책은 그들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지침서가 되겠다. 우리와 다른 인종 문제는 뿌리깊은 사회 문제다. 정책적으로 풀어낼 수도 없고 현실적으로 완전히 해결될 수도 없는 듯하다. 10년 전의 경험과 기록이니 많이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문화적 편견이나 사회적 차별이 쉽게 없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을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해 해법을 나가는 것이 왜 필요한 것인지 이 책은 잘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빈곤 문제는 무엇인가? 이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 88만원 세대로 명명되는 청년 실업 문제, 사교육비를 통한 부와 계급의 재생산, 양극화의 심화 등 우리 사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갈등과 심각한 사회 문제들을 돌아볼 때 과연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그들의 문제와 고민을 다루고 있는 학자가 있는지 궁금하다. 대학 안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숫자 놀이를 하거나 설문지를 통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에 대한 신선한 도전과 낯선 즐거움을 주는 책이 바로 <괴짜 사회학>이다.

  미국의 시카고는 최악의 빈민가로 손꼽힌다. 로버트 테일러 홈스는 고층 공영 주택단지이지만 방대한 공터에 의해 도시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마치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이곳에는 경찰이나 구급차 조차 오지 않는다. ‘빈곤의 섬’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비참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규칙과 질서에 의해 삶을 이어간다.

  저자는 청년 사회학자로서 우연히 설문 조사를 하러 왔다가 마약 판매 갱단 블랙 킹스의 보스와 만나게 된다. 사회학자와 갱단의 보스 제이티는 그후 10여 년 동안 어울리며 빈민가 주민들을 면담하고 동고동락을 함께한다. 객관적 사회학자로서, 때로는 그들의 심정적 동조자로서 갈등하는 저자의 인간적인 모습도 간간이 배어 나온다. 학자적 신념과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혹은 제이티와 나눈 우정과 신뢰 관계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감정과 상황들을 로버트 테일러 홈스의 다른 주민들과 나눈 관계만큼이나 현실적이고 흥미롭다.

  남겨진 문제는 이런 접근 방법이 실제 사회를 바꾸는 데 얼마나 도움을 주었으며 어떤 의미가 있는냐이다. 단순히 현상만을 분석하는 것 자체가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는 첫 번째 순서일 수 있겠지만 한 사회학자의 호기심이나 용기에 대한 박수로 그칠 수만은 없다. 사회학자의 역할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최소한 드러난 문제점과 원인의 분석과 기술은 필수적이다. 이 책에는 그것이 없다. 저널리즘을 위한 책이라는 한계가 있겠지만 단순한 현상의 분석에만 그치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가난은 개인의 책임인가? 사회의 책임인가? 어디까지 함께 책임져야 하는가?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하는 어려운 문제지만 우리에게도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문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는 생존의 문제이며 바로 우리들의 문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090728-0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나키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가만히 생각해보아도 나의 아나키즘 성향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알 수가 없다. ‘직접 행동direct action’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직업과 상황의 한계를 핑계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부족하고 아쉬운 마음은 나의 게으름 탓이다.

  나는 수평적 인간관계에 익숙하다. 개인적인 관계에서 나이 차이와 무관하게 반말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직책이나 직위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위가 아니라 아래를 보며 생활하는 버릇 탓인지 고개가 뻣뻣하거나 권위적인 사람을 보면 측은지심이 생기면서 토吐가 나온다. 우리 사회에는 워낙 그런 사람이 많고 그런 자리에 오르는 것이 삶의 목표인 사람들이 많으니 사람들을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권력과 권위의 힘은 사람들에게 막강한 영향을 미친다.

  이미 고정된 사회제도나 체제에 순응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정치적으로 중도 우파에서 중도 자파에 이르는 가장 폭넓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때때로 정부에 대한 지지와 불만을 동시에 가진다. 그 기준은 물론 개인적인 이익이다. 어제 강변북로의 한 아파트에 내걸린 초대형 현수막은 오세훈 서울시장을 독재자로 성토하고 있었다. 편견인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그 정도 아파트의 주민들이라면 대부분 그에게 투표했을 것이다. 철저하게 개인적 이익에 복무하는 투표 행위와 투표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자괴감이 복잡하게 떠올랐다.

  크로포트킨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중간 계급, 즉 부르주아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제도라고 주장한다. 선거를 통해 대표를 뽑는 체제가 민주적인 것으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현실에서 대표는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을 대표하고 대다수 국민의 생각을 무시한다. 프랑스 사상가 루소J. J. Rousseau의 말처럼 우리는 선거를 할 때에만 자유롭다. 그리고 대표를 통해서만 말해야 한다는 원칙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줄 대표가 없는 사람들은 말을 할 수 없게 한다. 그리고 사회가 발달하고 이해관계가 다양해질수록 대의제 민주주의는 근원적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크로포트킨은 날카롭게 지적한다. - P. 85

  작금의 현실을 보면 답답함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정치적 이념이나 성향을 떠나 대다수 국민들의 의사를 반영할 수 없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는 것 같다.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대표로 선출되었지만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4년 동안 그들만의 리그가 시작된다. 선거철이 되면 자신의 계급적 이익이나 사회의 발전 방향, 정책과 미래 사회에 대한 큰 틀을 고민하지 않고 혈연, 지연, 학연 그리고 습관처럼 익숙하게 한 표를 던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 현실에 대해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한다. 어느 개인의 잘못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의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조직적으로 언론법을 손보고 전교조를 죽이고 인권위원회를 무력화시키고 4대강 개발을 통해 대기업에 이익을 몰아주는 정부는 누굴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과연 대다수 국민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다 많은 행복을 가져다 주는 정부인가?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이 변할까? 노무현 정부는 대다수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을까? 국가라는 존재는 정부라는 단체는 우리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인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기본적인 태도이다. 도대체 국가와 정부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져서 국민 위에 군림하는가? 그들은 왜 우리의 권리를 마음대로 제한하며 어떻게 우리를 통제하는가? 언제부터였을까? 21세기에도 세상은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 또 다시 파시즘의 악령이 부활하는 조짐이 보이는 것처럼 힘과 권력으로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고 굳건하게 계급적 이익에 충실한 그들을 보며 우리는 왜 다시 아나키즘을 떠 올리는가?

  하승우의 <아나키즘>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작지만 큰 고민거리를 제공해 준다. 박홍규의 <아나키즘 이야기>가 아나키즘에 대한 성실하고 재미있는 해석이라면 하승우의 <아나키즘>은 책세상의 ‘Vita Activa실천하는 삶’ 개념사 시리즈다운 책이다. 적은 분량에 개념에 대한 이해와 요구가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어 입문서로서 손색이 없다. 기획시리즈들의 공통된 한계인 분량의 문제는 곧 깊이의 문제와 연결된다. 아나키즘에 대한 백화점식 나열과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머레이 북친, 신채호 등 아나키스트들의 저작을 통한 소개 등이 입맛을 돋우지만 간략한 소개나 안내 정도에 그치고 있어 오히려 아쉽다.

  4장 진화하는 아나키즘, 논쟁의 역사와 5장 아나키즘의 길 아나키스트의 길은 현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야기들로 가장 의미있는 부분이다. 실용적이지 않은 지식은 무익하는 말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현재적 유용성을 가진 사상에 대한 이야기는 귀담아 들을만하다. 이론적 토대가 없어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 생활에서 우리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과연 실천하는 삶을 통해 나와 이웃들이 연대하고 함께 같은 꿈을 꾸며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것은 불가능한가.
 
  변화와 발전을 바라보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나키즘을 실현하는 방법도 다르게 발전해 왔지만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절대 선이며 진리가 아니라는 것 만큼이라도 인정해야 새로운 논의나 사람들의 생각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요지부동이다. 내가 무슨 힘이 있으며 나 혼자 생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은 하지 말자. 그래서 아나키즘은 자유와 자치 그리고 연대를 내세운다. 우리 사회에서도 작은 공동체는 이미 실현되고 있다. 다함께 꾸는 꿈이 현실이 되는 그날까지, 아니 모두 꿈이 비슷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상에 대한 생각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혹시 당신의 꿈은 부자인가? 그러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세상도 가능하다는 걸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어렵지도 않고 불가능한 미래도 아닌, 모두가 행복한 세상은 바로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090726-0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 - 상처에서 치유까지, 트라우마에 관한 24가지 이야기
김준기 지음 / 시그마북스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격은 아주 천천히 형성되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 페이스 볼드윈(P. 27)

  처용은 아내를 범한 역신을 용서한다. 이미 빼앗긴 것을 어쩌냐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체념과 관용으로 당황스런 상황에 대처한 처용과 그 아내의 후일담이 궁금하다. 살아가면서 예기치 않은 일들을 만날 때마다 사람들은 인생 매뉴얼을 뒤적거려 보지만 대략 난감일 뿐이다. 정해진 답도 없고 뚜렷한 해결책도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는 처용을 통해 생의 불가해함을 논하는 것은 가벼운 상상력을 발휘하는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심각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길동,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던 임꺽정, 어머니의 부재와 눈먼 아버지 사이에서 목숨을 건 효성을 발휘하는 심청 등 비정상적인 판단력과 정신적 상처를 가진 몇몇 주인공들만 살펴보아도 그들의 고통이 만만치 않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의 고통과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고 심각성이나 깊이에 대해 주목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물며 현실에서는 어떠할까. 몸에 난 상처는 금방 알지만 영혼이 아픈 것은 알기 어렵다. 아니, 정상에서 벗어난 것인지 성격인지 알 수 없고, 원인이 무엇인지도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서 아직도 자신이 아픈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다. 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는 1980년에야 미국 정신과 학회에서 질병으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이제 불과 30년 전에 ‘일반적인 인간 경험의 범주를 넘어서는’ 충격적인 외상 사건을 경험한 후 그 후유증으로 발생하는 장애를 말하는 트라우마는 ‘일반적인 적응 능력을 압도하는 특별한 사건’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강렬한 두려움과 무력감을 동시에 경험하게 하는 외상 사건은 대개 폭력성과 연관되는 경우가 많지만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을 잃게 되는 상실감이 트라우마와 연관되는 경우도 많다.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은 ‘트라우마’와 영화의 만남을 주제로 하고 있다. 종합예술인 영화는 인간의 희노애락, 복잡한 사회현상, 역사의 재해석 등 무한한 상상력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장르가 되었다. 영화를 보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 어떤 주제를 이끌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학이든 과학이든 철학이든 영화의 이면에는 다양한 삶과 학문이 변주되어 나타난다. 이 책은 영화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을 찾아낸다. 너무 많아 선별적으로 다루어야 할만큼 흔한 인물유형일 수도 있겠으나 ‘트라우마’라는 정신적 질병에 초점을 맞춘다면 범위가 좁혀지겠다. 영화를 통해 바라본 트라우마라고 하면 이 책에 대한 성격을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 될 것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교육을 받고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문화를 습득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형성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변화할 수는 있지만 가족과 친구 그리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통해 형성된 정서와 인간에 대한 믿음은 제각기 달라질 수 있다. 성장과정과 사회적 환경, 개인적 체험과 특별한 경험에 따라 현재의 모습이 결정될 수 있다. 현재는 과거의 오래된 미래이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여전히 유효한지도 모른다. 육체적 상처를 넘어 정신적 상처까지 돌볼 겨를이 없었을까? 정신분석학의 토대를 마련한 프로이드 이후에도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 대해 그리 깊고 넓게 알지 못한 것 같다. 최근에 와서야 인간의 영혼에 대해, 육체가 아닌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치유 가능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우선 단순한 정신적 고통, 스트레스와 질병 수준으로 다루어야 할 수준 사이에 명확한 기준을 세우는 것부터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질병의 원인과 치료 방법이 병원에서만 다루어질 필요는 없다. 자신이 겪는 고통과 증상에 대해 스스로 진단해 보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 책은 24편의 영화를 통해 각기 다른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나를 돌아보고 주변 사람을 생각하며 우리 사회를 반성하게 되었다.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을까마는 이 책은 질병으로서 ‘트라우마’의 원인과 증상 그리고 그 치유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중간에 ‘트라우마 공화국, 대한민국’이 주목할 만했다. 작은 하나의 파트로 끝났지만 사실 사회적 문제는 영화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조망해볼 수 있는 문제다. 융이 말한 ‘집단 무의식’의 증상과 분석 그리고 치료에 대해서 또 하나의 책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 그만큼 심각하면서도 재미있는 주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는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바탕으로 인물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대사, 행동, 증상들을 통해 ‘트라우마’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어 읽는 사람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각 장 뒤에 부록처럼 붙어 있는 의학적 지식과 소견은 정보 제공을 하면서 다른 영화에 적용해 볼 수 있는 가능성까지 열어두어 재미있게 읽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다른 장소에서도 사람들은 제각기 반응하고 상처받고 표현한다. 그것의 원인이 무엇이든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만큼 심각하고 깊은 상처가 남았다면 불행한 사람이다. 환자가 되어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일이지만 스스로 그 원인과 치료까지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건강하게 사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긍정적인 경험과 긍정적인 사고, 네 잘못이 아니라는 외침, 가족 간의 소통, 친밀한 관계 속의 교감, 진정한 고백 등 영화의 장면들이 흔히 볼 수 있는 개연서 있는 허구라는 점에서 이 책은 영화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듯 느낌을 받으며 읽을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마도 없어 보인다. 지나친 해석일 수 있지만 잠재적 환자들이 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심각한 수준에 이른 개인적 불행과 사회적 현상에 따른 구조적 모순들은 점점 더 불행의 일반화에 기여하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영화들을 한 편씩 보면서 그들과 동일시한 감정을 느끼거나 공감과 동정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아주 작은 평안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090723-0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구광렬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대가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폴 발레리의 말은 단순한 금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대단한 신념과 용기가 필요하다. 신념과 용기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며 누구나 그렇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념은 때때로 흔들리고 용기는 경우에 따라 만용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인간의 이기적 속성과 사회적 관계는 한 사람이 살아가는 태도를 결정한다. 또한 뚜렷한 목표가 정해지면 과정과 수단을 선택해야 한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당당하고 존경받는 삶을 살아가는가. 그렇게 살았다고 자부하더라도 세간의 평가는 달라지게 마련이고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사르트르가 ‘20세기의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고 평가했던 에르네스토 게바라의 삶은 평범에서 한참 거리가 멀다. 그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과 열광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상업적 목적으로 그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고 혁명의 코드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아닐까 싶다. 왜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하는가?

  아마도 그것은 성공한 쿠바 혁명의 열매를 포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에 이어 확고부동한 2인자였던 그가 혁명의 축제도 끝나기 전에 또다시 콩고로 떠난 이유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순수한 혁명 정신을 잃지 않고 콩고로 떠나는 체 게바라의 모습은 진정한 휴머니스트의 모습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이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발견할 수 있는 순결한 인간이 바로 체가 아닐까 싶다.

  그는 독서광으로 유명하다. 전쟁터에서 책을 놓지 않고 항상 책 속에서 꿈을 꾸었던 몽상가는 아니었을까? 무모한 도전을 통해 민중의 해방을 꿈꾸었던 그는 이 시대 마지막 순결한 혁명가다.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은 총이 아니라 펜을 든 혁명가의 모습을 조망한다.

  1967년 10월 9일 죽음을 맞이할 때 마지막 유품이었던 그의 배낭 속엔 색연필로 덧칠된 지도 한 장과 두 권의 비망록 그리고 녹색 스프링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체 게바라의 일기>로 출판된 두 권의 비망록과 달리 녹색 노트에 필사된 69편의 시들은 주목받지 못했다. 멕시코 국립대학에서 중남미문학을 전공한 뒤 현지에서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구광렬은 바로 이 노트에 주목한다.

  체에 대한 평전들과 달리 최후 3년간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이 책은 오로지 녹색노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호, 니콜라스 기옌, 레온 펠리뻬 등 네 명의 시인이 쓴 시들이 필사된 노트는 혁명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고뇌했던 체의 마지막 모습을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는 체와 이 시인들의 관계를 살핀다. 개인적인 친분과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기도 한 시인들의 시는 단순히 애송시에 대한 체의 관심이 아니라 그의 영혼과 신념에 대한 간접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배낭 속에 지니고 있던 이 노트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아프리카 시절(1965년 3월~1966년 3월), 쿠바 시절(1966년 4월~1966년 10월), 볼리비아 시절(1966년 11월~1967년 10월 초) 등 시간과 장소의 관계를 유추해 낼 수 있는 입체적 구성이다. 필사된 순서나 시인들의 특성을 통해 체의 사상을 연구한다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게 영향을 미친 혹은 그의 신념을 다지게 한 원동력이 되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체가 죽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그는 말년에 시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책 속에서 길을 찾고 책을 통해 세상을 인식했을 지도 모르는 혁명가의 생애는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이 아니다. 현실 속에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생활 속에서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길잡이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민중들의 삶의 조건은 상황만 달라졌을 뿐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우매함은 오늘도 반복된다. 영원할 것이라 믿는 권력과 욕망의 노예들은 끝없이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에 대한 실현은 멀기만 하다. 지구의 반대편 라틴 아메리카에서 벌어졌던 혁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체제를 전복하고 세상을 갈아엎자는 폭력과 혼란이 아니라 잘못을 바로잡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소박한 희망은 혁명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차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은 책을 읽는 내내 한숨과 눈물처럼 부딪혔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체의 홀쭉한 배낭을 상상하는 일은 즐거운 일도 편안한 일도 아니었다. 안타까움을 넘어선 경외와 두려움이었다. 안개처럼 뿌연 창밖으로 펼쳐진 한 여름의 들판에도 선명한 길은 보이지 않는다. 없는 길을 걸었던 체의 발걸음과 힘겨웠을 그의 마지막 뒷모습이 환영처럼 잠시 눈앞을 스쳤다.


090720-0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351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름답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죽은 여자 자라나는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핀과 같고
눈먼 사람의 눈빛을 잡아끄는 그림 같고
앵두향기에 취해 안개 속을 떠들며 지나가는
모슬린 잠옷의 아이들 같고
우기의 사바나에 사는 소금기린 긴 목의 짠맛 같고

조금씩 녹아들며 붉은 천 넓게 적시다가
말라붙은 하얀 알갱이로
아기미의 모래 위에 뿌려진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매립지를 떠도는 녹색 안개
그 위로 솟아나는 해초냄새의 텅 빈 굴뚝같이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이후 오랜만에 진은영의 시집을 읽었다.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지 못하고 언어의 간극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 서시에 해당하는 ‘아름답다’가 피워올리는 텅빈 굴뚝의 연기같은 이미지만 무성하다. 표상적 의미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같은’ 아름다움만 난무한다. 낯설고 생경한 이미지의 충돌 속에서 나는 오늘도 길을 헤매나보다.

  행위의 주체는 없고 세계의 현상만 남아있다. 세계를 말하려는 시는 구체적인 대상과 이미지가 없다. 추상과 상징만 남은 의미의 충돌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추하거나 아득하지 않은 세계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드러내는 고단한 작업이 시인의 업은 아닐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름다움 이전의 세계를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닐터.

멜랑콜리아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 끝에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그의 존재는 그리움이다. 나는 누구인가? 멜랑콜리아는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이다. 시인에게 우울증은 천형의 형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쾌하고 즐거운 세상이라면 굳이 시를 쓰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근본적으로 그의 부재나 나의 부재로 인해 존재의 무화를 통해 고통은 시작된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주체와 객체를 바꾸면 그대로 그는 시인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엎어지고 자빠지지만 벗어날 수 없는 숙명같은 게 있다. 하나의 이미지와 상징으로 말해질 수 없는 사소함이 있다. 흰 셔츠에 버찌가 번지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그 사소함들을 어떻게 말할까?


우리는 매일매일

흰 셔츠 윗주머니에
버찌를 가득넣고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 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흘러내린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우리의 사계절
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터지는 향기의 파이프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매일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는 조소아닌 조소. 우리가 매일 반복하고 있는 일상의 우스꽝스러움, 그 어리석음을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다만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의 혼돈과 어둠만이 존재할 뿐.

  깨지고 흔들리는 이미지들은 세계 밖에 존재한다. 언어로 표현될 수 있으나 감각할 수 없는 세계는 독자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부서진다. 우울한 염소가 한 마리씩 지나가는 것처럼 그 그림자는 길고 지루하다. 시는 언어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된다. 달나라처럼 머나먼 거리감만 더해줄 뿐이다. 그것이 시의 자가당착이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경계선!

70년대産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후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구체적인 상황도 설명도 없이 결국 서로 쏘는 세대가 되어버린 자화상을 그린다. 시인은 70년産이다.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 것이 비극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만 결국 서로 쏜다. 그러나 현실은 상징이 아니다. 굳이 시에서 현실을 읽어낼 필요도 없지만.

  기다림의 끝에 서서 자신의 정체성을 묻고 있는 세대. 비극적 결말을 이끌어 낼 수밖에 없는 현실. 권혁웅의 해설처럼 그것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후일담이 사랑보다 선행할 때가 있으므로.

사랑에 대한 후일담이 사랑보다 선행할 때가 있고, 자신에 관한 회고담이 자신보다 앞설 때가 있다. 시원(始原)은 파생과 유출을 통해서만 자신의 지점을 지시할 수 있는 법이다. 무언가가 자신을 긁고 지나간 후에야 우리는 그게 사랑이었음을 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이고 실체가 아니라 속성이다. - 권혁웅, ‘멜랑콜리 펜타곤Melancholy Pentagon’중에서, P.100


090719-0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