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란
현기영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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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의 십년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모두가 21세기 새시대를 구가하면서, 시대를 닮으려고 그 뒤를 좇아 달려가버렸을 때, 허무성은 자신이 해일이 쓸고 간 황량한 바닷가에 여기저기 뒹구는 잔해들 중의 하나처럼 느껴졌다. 잊혀진 시절이 남긴 초라한 잔해, 그것이 학생들의 눈에 비친 그의 존재방식이었다. 달라진 이 세상과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감정도 관념도 다른 사람이었다. - P. 91

  내가 보낸 이십대를 90년대를 작가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었다. 현기영의 소설 <누란>을 읽으면서 이 구절을 읽다가 한참 멍한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선배들을 따라 시위현장에서 발밑에 지랄탄을, 머리위에 페퍼포그 사과탄을 피해 골목길을 뛰어다니던 일은 이제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 흑백 사진처럼 남아있다. 백골단에게 끌려가 곤봉으로 두들겨 맞고 닭장차에서 대가리를 처박고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허무성은 386세대의 막내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잊혀진 시절인 80년대를 기억하기 위해 허무성은 90년에도 황량한 바닷가의 잔해처럼 쓸쓸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그의 존재방식은 21세기 대학생은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비판과 저항 문화를 잃어버린,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대학생들이 허무성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타까운 시선으로 허무성을 바라보는 작가에게 오늘의 대학생은 어떻게 비춰질까. 그 시선은 우리들의 시선과 많이 다를까.

  문단의 거목이 되어버린 현기영의 <누란>은 작심한 듯 지나간 지난 시대를 직선적으로 들여다본다. 우회적이고 상징적인 방법이 주는 나른함이 없다. 군데군데 마치 신인 작가의 치기어린 열정을 보는 것같은 착각을 하게 하는 구절들이 보인다. 십년 만에 작품이든 준비기간이 얼마가 됐든 소설 외적인 부분에 대한 사실들이 소설을 대신할 수는 없다. 작가는 현실은 과거와 다른데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지 못하는 세대와 지난 시절을 철저하게 망각한 세대에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우리가 바꾸려했던 세상이 우리를 바꿔버렸다고.

  1999년 세기말의 불안을 넘어 2002년 월드컵 축제의 붉은 악마와 노무현의 당선으로 새로운 세기는 화려하게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모든 축제가 그러하듯 들뜬 분위기와 미칠 듯 끓어오르던 열정은 한 순간에 차갑게 식어버린다. 변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에게 남은 건 없었다. IMF의 충격은 부동산 가격폭등과 개혁의지 실종으로 이어져 다시 정권이 바뀌고 그들은 잃어버린 10년을 뒤찾기 위해 교과서를 바꾸고 강바닥을 뒤집고 있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의식 없는 국민에겐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돼있다. 파시즘의 재림을 꿈꾸는 권력이 무슨 짓을 하든 내 앞의 밥그릇과 평화로운 일상을 꿈꾸지만 그것이 쉽게 지켜지지 않는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노동하기 힘든 나라가 된다. 당신은 기업가인가 노동자인가? 기업가와 노동자의 비율은 어떤가? 대한민국의 국민 대다수가 기업가인가 노동자인가? 서민인가 부유층인가? 이것은 이데올로기도 그 무엇도 아니다. 그저 우리 이웃들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작은 고민일 뿐이다.

  고문과 인권 유린을 처절하게 고발하는 소설로 읽지 말자. 국가권력의 거대한 음모와 변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비판으로 읽지도 말자. 그저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가장 소박하고 인간적인 우리의 상식을 확인하는 소설로 읽는 것은 어떨까?

  소설이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아주 오래된 명제를 떠 올릴 필요도 없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위태로운 현실을 거울로 비춰준다. 눈이 부셔 찡그리지만 그것이 곧 우리들의 자화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된다면 현기영의 소설은 나름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소설의 제목은 계란을 쌓아올린 듯 위태로운 상황을 나타내는 ‘누란지세(累卵之勢)’와 중앙아시아에서 번성했던 모래사막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누란(樓蘭)’ 왕국의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일흔을 바라보는 작가의 입장에서 오랜 침묵을 깨고 발표한 소설이다. <누란>은 단순히 소설로만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지난 시대와 오늘의 우리들을 돌아보는 반성문이다.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합의할 수 있는 기본적인 가치는 이념과 무관하다. 반목과 질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지난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한 자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불빛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작은 소망이다.

이 소설은 실패와 절망에 관한 기록이다.

  ‘작가의 말’의 첫 문장이다. 이 시대를 냉철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실패와 절망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수많은 개인들의 실패는 그 개인 자신의 탓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것이고, 그 구조는 세계화가 만들어놓은 부분이 크다. 즉 개인의 실패, 개인의 불행은 일국의 문제를 넘어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무력감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는 말은 현실에 대한 작가의 판단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가 아닐까?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희망을 불빛을 던지고 막연한 기대를 갖게하는 완강한 현실의 벽과는 다른 불씨를 보여주려는 것이 현기영의 <누란>은 아닐까?

절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철저하게 절망하여 그 밑바닥에 닿으면 거기에는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고, 그때 우리는 바닥을 걷어차고 힘차게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 P. 300


090906-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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