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 당신들의 대한민국 세 번째 이야기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선진화’ 되어 간다는 대한민국에서 과중한 학습과 시험부담, 학교와 부대 안에서의 폭력, 과로와 생계곤란, 경찰의 단속과 과잉 진압으로 목숨을 빼앗기거나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국내외 모슨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책의 서문이 숙연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은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인다. 사진을 찍을 때 높은 곳에서 아래를 조망할 때와 엎드려 낮은 각도에서 셔터를 누를 때 전혀 다른 사진이 찍히는 것처럼. 박노자는 <당신들의 대한민국 1, 2>를 통해 보여주었던 시선이 그대로 유지된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는 21세기가 시작된 후 우리들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기준이 어디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겠지만 그는 왼쪽에서 우리 사회를 바라본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사회가 나아갈 방향과 지향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같을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많이 다른 게 현실이다.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장치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여러 사람의 생각을 모으기 위해 우리는 대의 민주주의제를 기본으로 사회를 유지한다.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더듬어 볼 수 있다. 한국사를 전공한 박노자의 시선은 항상 ‘외부자의 시선’으로 느껴진다. 뼛속까지 한국인인 경우와 귀화 한국인의 생각이 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것이 반드시 태어나고 자라온 환경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박노자는 러시아 태생으로 1991년 국내 대학에서 3개월간 유학생활을 경험한다. 1996년에 국내 대학의 러시아어과 전임강사를 거쳐 2000년부터는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한국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한민국에서 생활한 것은 4년 남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과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대한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과 직접 체험은 우리가 미처 자각하지 못하는 부분들까지 꼼꼼하게 진단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우리의 의식과 문화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이 왜 그의 눈에는 낯설게 보이는지 깨닫게 된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세 번째 이야기에 해당한다. 앞선 그의 저작들이 보여주었던 날카로운 비판 정신과 우리 사회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는 귀담아 듣고 공론화할 만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가 이 땅에서 부대끼고 아파하며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귀화한 한국인임에 틀림없지만 대한민국의 운명 공동체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개인적인 판단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복지국가’와 ‘진보정치’라는 두 개의 화두를 제시한다. 여러 지면에 발표한 칼럼과 그의 블로그에 있는 글들을 모은 이 책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 현실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으로 ‘개혁’을 외치던 대한민국은 다시 보수정권의 손을 들어주었다. 공교롭게도 두 전직 대통령이 한꺼번에 사망한 2009년에 우리는 지난 10년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을까. 무엇보다도 앞으로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과 지표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의 삶이 상식과 보편성 측면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한국에서 대중적 진보 정당을 한다는 것은 가시밭길이지만 꼭 가야 할 가시밭길이다. 성패 여부와 무관하게, ‘의미 있는 소수’로 존재해도 좋다. 그 소수로부터의 압력마저 없다면 대한민국은 오늘날보다 더 야만적인 ‘중간급 소제국’이 될 것이다. - P. 44

‘개혁’ 담론이라는 게 한국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물론 제2, 제3의 노무현이 집권을 할 수야 있지만, 그 실적은 제1대 노무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이 그 무슨 ‘개혁’ 이야기를 들먹여도 ‘한국적 체제’ - 군사 ․ 안보 국가, 부동산 과열, 토건 집중, 관료들에 대한 대자본의 지배, ‘명문대’ 학벌 우대, ‘현대판 천민(비정규직)’ 과중 착취 등등 - 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 P. 55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대한민국에 진보정당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자본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롭고 극소수의 기득권층이 아닌 대다수의 서민들이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우리는 이제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박노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일상의 문제점과 모르고 지나쳐버리는 불편한 진실들을 토해낸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다함께 잘 살아가려는 노력이 부족한 현실은 도대체 어떻게 개선될 수 있을까? 속 시원한 대안과 해답을 한 마디로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치인과 재벌 총수에게 모든 희망을 걸어볼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다.

남과 같이 소비하지 않으면 불안과 외로움을 느끼고, 혼자 조용하게 있으면서 ‘나’의 존재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삼성공화국의 배부른 노예 대다수에게 이 이야기는 아마도 내향적 성격 때문에 사회와 어울릴 줄 모르는 낙오자의 설교로 들릴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들의 진정한 존재(실존)로부터도 소외되어 인간으로서의 ‘나’를 상실하고 만다. 이런 기성세대가 있기에 수만 명의 10대들이 온라인 게임의 중독자가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이미 폐인이 돼가는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텔레비전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없는 우리의 노예적 현실에 대한 반성이 절실하다. - P. 125

  우리는 미래의 희망을 먹고 산다. 기대할 내일이 없다면 현실의 고통과 불편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하지만 그 희망이라는 괴물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는지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합의할 수 있고 기대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지 잠시 생각해보자. 그리고 과연 ‘왼쪽’이 정치적 이념을 의미하는 것인지 보다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인지 따져보자. 박노자의 목소리는 공허한 울림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방향 지시등일지도 모른다.

“청소부와 이야기하든 장관과 이야기하든 똑같이 대하기. 어조, 태도, 말이 주는 느낌으로라도 인간을 차별하면 절대 안 된다.”(티모페에프-레소프스키) - P. 184


09092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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