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신동엽
김응교 지음, 인병선 유물 보존.공개.고증 / 현암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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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엊그제가 신동엽이 세상을 떠난 지 37년 되는 날이었다. 신동엽의 살아 있다면 일흔 여섯이다. 바보같은 상상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구상이나 고은처럼 노년을 맞이했을 동시대 인물이다. 재작년에 돌아가신 구상처럼 질곡의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내기에는 버거웠을까? 1930년에 태어나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신동엽의 시는 여전히 살아 있다. 신동엽이 죽기 바로 전인 1968년에 김수영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이미 간암 판정을 받은 신동엽은 자신의 죽음도 예감하고 있을 것이다.

  시인의 죽음은 영원한 미완성의 시로 남는다. 생전에 그가 남긴 시는 아직도 살아 있다. ‘껍데기는 가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종로 5가’, ‘산에 언덕에’ 같은 명편들과 서사시 ‘금강’으로 기억되는 시인 신동엽의 육필 원고를 책을 통해 만났다. 그의 생애를 통해 시를 들여다보는 일은 시 자체에 대한 이해를 돕는 작가론의 의미를 넘는다. 당연하게도 그는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어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죽음이 신화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이 남긴 글과 생각들이 시대를 담아내는 정제된 언어라면 단순한 삶을 넘어선다. 먼저 인물의 전형성이다. 사법서사(현 법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 식민지를 경험했고 문인으로서 평범한 길을 걸었던 신동엽의 직업은 국어교사였다. 전주사범을 거쳐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신동엽의 삶은 어렵고 가난했던 현대사의 격변기를 조용히 대변한다.

  동숭동에 가면 짚풀사 박물관이 있다. 같은 건물에 전국국어교사모임 사무실이 세들어 있어 우연한 기회에 인병선 여사를 만나 뵙고 신동엽에 관한 이야기와 짚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스물 네 살 청년 신동엽이 이화여고 3학년이었던 인병선을 만난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서울대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인병선은 3학년 때 신동엽과 결혼한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남기고 죽은 남편의 원고 시작 노트들을 고스란히 정리 보관하며 평생 그의 흔적과 그늘 속에서 살아온 인병선의 삶은 어떠했을까. 오히려 신동엽이 행복한 건 아닐까?

  신동엽의 시세계는 완성되지 않은 채 끝나버렸다.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등단해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동학 농민 혁명과 갑오개혁, 4․19 정신을 토대로 민중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던 시인의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서사시 ‘금강’ 이후 ‘임진강’을 준비하던 중이었던 시인의 나이는 시인으로서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시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과 시인에 대한 존경을 떠나 현대시의 새로운 흐름이 끊겨버린 느낌이다.
 
  현암사에서 펴낸 <시인 신동엽>은 인병선이 공개한 유물과 고증을 통해 김응교가 소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는 책을 통해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김응교의 글은 신동엽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면서도 시인의 삶의 궤적을 따라 담담하게 독자들을 안내한다. 흥분하거나 안타까운 목소리를 숨기고 그의 유물과 육필 원고들을 사진으로나마 감상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물론 인병선의 꼼꼼한 정리와 보존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제 가족의 보존에 기댈 것이 아니라 문학관의 건립이 필요한 시점이 되지 않았나 싶다.

  시인 신동엽을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나 각별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고 소장해야 할 책이다. 전체가 개나리색 표지에 신동엽이란 글씨로 가득 메운 겉장은 그가 떠난 4월을 기억하는 듯하다. 오랜만에 신동엽 전집을 뒤적이다가 떠나기 1년전인 1968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실린 ‘그 사람에게’가 눈에 들어온다.

그 사람에게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060409-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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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교육의 바탕과 속살
김수업 지음 / 나라말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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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주의, 특히 일제의 군국주의 지배 사상이 포함되어 있는 ‘국어’라는 말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우리말에 대한 명칭 없다는 뜻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대략 12년간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의무적으로 ‘국어’를 배운다. 우리말에 익숙해지는 6, 7세가 지나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본격적으로 한글을 배우고 보다 확장된 어휘와 문장들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의문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배웠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문학 작품, 특히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석과 문학에 관한 단편적인 이론들, 그리고 글을 이해하기 위해 글의 종류와 특징들 주제를 파악하기 위해 단락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들을 열심히 배웠다. 더불어 5차 교육과정 까지는 교과서가 성전이었기 때문에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서 고전문학의 경우 고전 문법을 제2외국어보다 어렵게 공부했던 나쁜 기억이 있다. 결국 ‘국어’ 과목을 통해서 배운 것은 우리 겨레의 삶과 문화가 아니라 대학 진학을 위한 주요과목을 배운 것이다. 때가 늦었지만 ‘국어’와 ‘교육’이 합해진 ‘국어교육’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김수업 선생님의 <국어교육의 바탕과 속살>은 여러 매체에 기고되었거나 강연을 위한 원고들을 모았다. 시기상 여러 해에 걸쳐 있기 때문에 스스로 밝히신대로 일목요연한 흐름을 잡아내기는 어려운 책이다. 하지만 일관된 문제의식과 타당한 주장들은 시간의 변화를 무색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풀지 못한 숙제들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모든 국어교육학 교수들이나 현장의 교사들이 책임져야할 몫이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공감하고 문제의식을 가져야할 내용들이다.

  현재 학급학교에서는 7차 교육과정이 시행되고 있다. 학습자 위주, 선택중심 교육과정이라고 하지만 현실과는 무관하게 진행되어 역시 실패한 교육과정이다. 학교와 학생들의 과목선택권을 높이고 수요자 중심 교육을 지향하는 교육과정이 성공하려면 인적, 물적 인프라가 구축되는 것이 선행 조건인 것은 초등학생쯤 되면 알겠지만 색깔과 무늬가 화려한 교육과정을 선언한다고 해서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사 수와 전공 영역을 먼저 고려한 선택과목의 조정이나 전문 교실이 없는 수준별 수업은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김수업 선생님이 일관되게 주장하시는 대로 8차에서는 국정 교과서 제도가 폐지될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출판사와 학습지 회사들의 파이가 커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탄력적이고 능동적인 교사의 역할이 기대된다는 말이다. 전국국어교사모임에서 만든 <우리말 우리글>은 현장의 교사들에게 교과서와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준 책이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교육부 관리의 책상서랍에서가 아니라 학생과 학부모 교사들의 참여와 토론을 통해서 정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에서는 우리말 교육의 거시적 목표와 방향만 설정하면 된다. 큰 틀이 정해졌다면 각 지역 교육청과 학교 현장에서는 아이들의 발달 수준과 지역 사회의 입말이 반영된 다양한 형태의 교육이 가능하다. 이것이 참된 우리말 교육이 아닐까 싶다. ‘사투리’라는 이름으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웠던 모든 언어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는 ‘표준어’ 교육에 대한 문제점은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낸다. 해방이후 일천한 ‘국어교육’의 역사와 학문으로서의 한계를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국어국문학’의 아류로서 ‘교육학’과 접목된 사생아 쯤으로 비춰지는 ‘국어교육학’에 대한 학문적 성격은 둘째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국어’를 가르치는 일과 그 일이 어떤 형식과 내용을 담아내야 할 것인가이다.

  결국 ‘국어교육의 바탕과 속살’은 우리 것으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의 색안경을 벗어내고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분명한 태도와 인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국인에게 필요한 우리 삶과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우리말 교육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탁상공론과 이상주의의 발로가 아닌 현실적 대안과 모색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일들이다. 현실적으로 대학입시에서 요구하는 객관식 시험 기계를 양산하는 국어교육에 비난을 보낼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필요한 시험과 제도를 고치고 바탕과 속살을 고민한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관성의 법칙을 벗어나서 조금씩만 한발자국씩만 앞으로 걸어나가면 된다. 혁명적 변화와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일도 아니다. 단순하게 현장의 교사들과 학생들의 요구, 교육 관료와 교육과정 편찬 과정의 고민이 하나 될 수 獵?밝은 미래는 그들이 아닌 우리가, 내가 만들어 것이다.


06041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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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아나키스트 - 윌리엄 고드윈 수상록
윌리엄 고드윈 지음, 피터 마셜 엮음, 강미경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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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셸리의 장인 이자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울프턴크래프트의 아버지는 누구일까하는 질문에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 할 것이다. 윌리엄 고드윈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지나간 인물과 사상에 대한 연구와 관심은 시류와 영합하는 측면이 있다. 달리 말하면 사회적 관심과 필요에 따라 주목받는 시대와 사건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이런 면에서 아나키즘은 인류 역사에서 특별함을 갖는다. 그 특별함은 주변성에서 확보된다. 주류 역사의 아웃사이더들이었던 아나키즘 신봉자들의 면면이 그러하다. 어쩌면 인물의 주변성이 아니라 사상의 주변성일지도 모른다. 아나키즘은 한 번도 역사의 중심 사상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지류로 파악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류 최초의 아나키스트로 명명되는 윌리엄 고드윈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외칠 수밖에 없었던 자유의 사상이 아나키즘이이다. 그 아나키즘을 최초로 주창했던 사람이 바로 윌리엄 고드윈이라고 평가받는다.

  아나키즘이란 일반적으로 국가와 법률에 의한 강제수단을 철폐하고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와 형제애를 실천하고자 하는 유토피아 운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고드윈의 사상은 철저하고 견고한 사상적 토대와는 거리가 멀다. 철학자도 사회학자도 아닌 고드윈의 생각은 이론적으로 모순적인 부분도 있고, 그 삶 자체도 아이러니 하다. 노년에 국가의 연금을 받으며 생활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그의 사상과 삶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경우 존경심보다는 두려움이 앞설 것이다. 고드윈은 그런 면에서 훨씬 인간적이다. 그가 남긴 많은 저작들 속에서 그의 사상의 단면을 짚어 볼 수 있는 글들은 단편적으로 혹은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파악해 보아도 아나키즘의 근원을 조망해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생각의 단편들을 모아 놓은 것들이 하나의 전범이 되고 수정 보완 되면서 사회는 발전한다고 믿는다. 헤겔의 변증법적 결합은 이 때 필요해진다.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고드윈의 생각도 근본과 토대를 마련하고 모순과 단점을 수정하면서 끊임없이 국가 권력의 억압과 감시를 받으면서 조금씩 성숙해 온 것이 아닌가 싶다. 다만 아나키즘은 무엇보다도 확고한 신념을 지닌 몇몇 사람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온 정치 이념이나 철학적 풍토가 아니기 때문에 매우 자유롭고 유연한 흐름으로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혹은 현실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꿈을 꾼다. 국경없는 사회,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는 나라, 통일 이후의 한반도, 자동차 없는 세상, 입시없는 학교 생활 등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단순히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에 불과한가? 16세기 중엽에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Utopia’에서 그가 꿈꾸던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한 만큼 ’ 가져갈 수 있는 이상 사회를 꿈꾸었다. 공산주의 사회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는 논쟁을 넘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그 관계 사이의 기본적인 규칙만이 살아 있는 사회를 꿈꿔본 적이 있다. 물론 ‘유토피아’에는 공무원도 존재하고 공동 농장과 공동 식당 등 고드윈의 생각과는 많은 부분들이 다른 이상 세계를 꿈꾼다. 고드윈은 공동 농장과 식당 같은 토마스 모어식 ‘유토피아’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나키즘의 가장 기본적 토대가 되는 자유와 평등, 자치의 개념은 일단 집단과 전체의 조화보다 개인의 행복과 쾌락이 앞선다. 물론 이 사상은 주체적이고 객관적인 정의의 실현에 의해 가능한 사회를 말한다. 국가나 정부의 붕괴가 일시적인 혼란을 가져올 수 있지만 영원한 고통과 족쇄보다 나을 것이라는 고드윈의 생각은 많은 면에서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The anarchist writings william godwin’이라는 제목으로 1986년에 출판된 이 책은 윌리엄 고드윈의 수상록이라 할 만하다. 편집자 서론에서 고드윈의 생애와 사상을 적절하게 해설하고 있으며 본문으로 들어가면 1장에서 아나키즘의 기본 원리로 글을 시작한다. 이어서 인간의 본성과 윤리, 정치, 경제, 교육, 자유로운 사회 등 주제별로 고드윈의 핵심 사상들을 엮어 놓은 것은 순전히 편찬자인 피터 마셜의 능력에 기대고 있다. 고드윈의 책이면서도 연구자의 성과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책으로 읽힌다.

  우리나라에서 아나키즘은 단순히 ‘무정부주의’라는 용어로 오역되고 있다. 박홍규 교수의 <아나키즘 이야기>가 가장 정확하게 아나키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크로포트킨이나 바쿠닌의 저작을 찾아 읽는 숙제가 남겨졌지만 고드윈의 영향과 상관성보다도 아나키즘은 영원한 유토피아나 이상 세계에 대한 꿈으로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의 투쟁과 사회 변화의 기초 사상으로서도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정부와 공무원, 국가 력의 강화는 인간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 군림하는 존재가 된 지는 이미 오래다. 누가 누구를 위해서 기능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 발 ‘제겨 디딜 곳 없는’ 현실의 토대는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정부와 국가가 스스로 성장하고 권력을 장악하고 독점하면서 법을 앞세워 지금도 여전히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새만금이나 미군 기지 이전 등의 사건에서 보듯이, 정부에서 자연을 주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벌주고 싶을 때 꺼내드는 ‘공무집행 방해죄’가 바로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자유와 자연 그리고 자치가 아나키즘의 핵심 사상이라고 요약할 수는 없어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의와 행복이 실현되고 쾌락이 극대화하는 가장 자연스런 삶을 원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바로 아나키즘이다.

  고드윈의 사상을 통해 아나키즘의 기원을 살펴 본다기 보다는 , <최초의 아나키스트>로 명명된 한 사람의 이야기들이 어떻게 확장되고 전해졌는지, 현재의 유용성은 어느 정도인지, 우리가 좀 더 깊이 있게 고민하고 해답을 찾고 싶은 많은 이야기들이 ‘아나키즘’ 속에 살아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고드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눈을 감고 존 레논의 ‘이매진’을 들어 보라.


060414-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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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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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지凌遲’는 죄인의 살갗이나 살점을 칼로 도려내는 형벌로서, 가능한 한 죄인을 살려둔 채 며칠에 걸쳐 시행함으로써 고통을 극대화하는 형벌이다. 능숙한 집행자는 한 사람에게서 2만 점까지 도려낸다고 한다. 이 끔찍한 형벌은 인간의 폭력과 잔혹함의 극단을 보여준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논하는 것조차 무색케하는 이 형벌은 문명이전의 야만과 광기의 산물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이보다 더 다양한 형벌이 많이 존재한다. 삶아죽이기도 하고 궁형에 처하기도 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인한 방법이 동원된 형벌의 역사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혐오감을 갖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론과 설명이 아니라 한 장의 사진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는 충격이다. 1905년 4월 10일 북경에서 찍힌, ‘백 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이라는 제목의 이 사진 속 주인공은 푸추리라는 28세 남자다. 조르쥬 바타이유가 평생 간직했으며 생전의 마지막 저서인 <에로스의 눈물> 마지막 장에 실었다고 한다. 그만큼 충격적이다. 양팔이 이미 잘려 나갔고 칼로 다리 살을 베어내는 장면이다. 가슴 부분의 살갗이 이미 베어져 온 몸에 피를 흘리고 있는 사진으로 더더욱 놀라운 것은 아직 살아 있고 하늘을 바라보는 눈에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 견주는 것을 참지 못하는 법이다. - P. 166

  인간이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은 실로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러난 결국 개인에게 있어 다른 사람의 고통은 자신의 경험을 넘어설 수가 없기 때문에 추정 내지 유추 정도가 될 것이다. 무관심과는 다르다. 도움을 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죽음은 이미 과거형이 되어버린다. 수천명이든 수만명이든 학살과 일방적인 잔혹 행위가 진행되는 과정을 외면했다는 비난과 반성을 외칠 수는 있지만 미디어를 통한 전쟁은 이제 일종의 흥미와 오락거리가 되어 버린다. 94년 걸프전 당신 아침을 먹으며 미국 전투기의 야간 폭격 장면을 마치 오락기의 프로그램처럼 바라보던 기억이 생생하다. CNN으로 중계됐던 그 장면은 이제 전쟁의 개념도 뒤바꾸어 놓았다. 현대 사회에서 전쟁의 의미와 미디어와 사진을 통한 이미지의 전달은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기나긴 야만의 시간에 대한 반성과 자책은 차치하고서라도 지난 100년전의 역사만 살펴보아도 인간에 대한 믿음은 사라진다. 집단의 광기와 살육만이 존재할 뿐이다. 문명 국가를 건설하고 살아가는 유럽과 미국에 의해 자행되거나 묵인되는 상황들을 돌아보면 대답은 분명해지는 듯하다. 수잔 손택의 말대로 나의 고통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2003년에 나온 이 책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사진’을 통해 바라본다. 미국의 비판적 지성인 수잔 손택의 관점은 분명하다. 최근의 전쟁과 그로 인한 고통의 원인과 전달 방식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한다. 두 차례에 걸친 양차 대전과 이후의 국지전들은 여전히 지속된다. 종군 기자로 참여한 사진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쟁의 참상과 죽음에 대하여 전달받는 타인들, 그리고 그 고통을 해석하는 방식은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잔혹함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사진’이라는 은유의 방식은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변화 가능성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아닐까 싶다. 전쟁에 대한 허다한 논의들을 짚어보는 대신 ‘고통’이라는 주제로 ‘나’와 ‘우리’가 아닌 ‘타인’의 고통을 이야기하는방식은 전쟁과 참상을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보인다.

  화가 고야의 ‘더 이상 안돼’라는 제목의 책 표지 그림은 이 책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반영한다. 나무에 목이 매달린 남자를 턱을 고이고 바라보는 사람의 표정이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대중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다. 나와 상관없다면 그 어떤 것도 아무것도 아닌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책 한 권을 통해 내 삶의 자세와 인류애적 도덕성을 일깨우자는 유아적 발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면 인간이 어차피 사회적 동물이라면 국가든, 민족이든 갈등과 전쟁을 통해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할 필요는 있다. 무엇보다도 죽음으로 상징되는, 사진이라는 이미지로 전달되는 과정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타인들의 반응은 지금 이후의 세계를 준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내 것이 아닌 모 것들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과 내가 겪지 않은 고통들을 통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기심 그리고 철저한 무관심이 우리 삶의 방식이다. 대부분 그렇게 산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거나 현퓽岵막?어려움을 겪지는 않는다. 그것이 사람들의 삶이 방식이 되어 버렸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손택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 이미지로 ‘재구성된’ 현실과 실제 현실 사이의 극명한 간극을 보여준다. 그것은 현실의 허구성을 주창하는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 아니다. 현실의 비극적 인식을 철저하고 진지하게 성찰하고자 하는 손택의 현실 인식 방법이다. 나는 우선 그녀가 보여주는 이미지를 통해 먼저 ‘재현된’ 현실부터 확인했다.


060417-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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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토저널리즘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시선 <타인의 고통>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08-07 03:49 
    타인의 고통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이후(시울)전반적인 리뷰2007년 8월 5일 읽은 책이다. 이 책의 리뷰를 적으면서 처음 안 사실이 지금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책의 표지와 지금의 표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뭐 이 책의 발간일이 2004년 1월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에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기존의 책 표지 자체도 타인의 고통을 드러내는 그림이었기에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바와 약간은 상충되는 부분도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
 
 
 
모국어의 속살 - '모국어의 속살'에 도달한 시인 50인이 보여주는 풍경들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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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 이성복, ‘연애에 대하여’,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중에서

  지금까지도 가슴에 깊이 박혀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는 고종석의 고백이 가슴을 덥혀준다. ‘내 나이에 좀 주착스럽’다고 말하는 그의 멋쩍은 표정을 상상하는 일은 잔잔한 미소를 만들어 낸다. 시는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비실용적인 장르 중의 하나이다. 어디에도 써먹을 데 없는,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시詩’를 읽어주는 남자 고종석의 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는 서문에서 시는 사람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라고 말한다. 이것이 시를 읽을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의 동의를 얻어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을 펼쳐든 독자들의 기본적 관심을 전제로 한다면 그의 유혹(?)을 쉽게 떨치지 못할 것이다. 시는 실용적이진 않지만 인간이라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런 예술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모국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축복을 우리는 충분히 즐기며 살아가지 못한다. 눈에 비춰지는 감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아름다움은 1차적이지만 영혼에 투영되는 사유의 즐거움은 언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다. 시는 그 한 복판에 우뚝 서서 홀로 외롭다. 그 성스러움과 상스러움의 가장 자리에서 우리는 주변과 경계만을 기웃거려도 나의 즐거움이 사라지진 않는다. 산책과 명상 그리고 독서로 가득한 삶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한 권 읽어 보라. 우리말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의 진경을 보여주는 50권의 시집은 고종석의 주관적 판단으로 넘겨버리기엔 그 부피와 중량이 만만찮다.

  <모국어의 속살>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시집 한 권, 한 권의 서평에 가까운 가벼운 내용으로 가득하다. 길이 않은 글 속에 한 시인의 특징과 시세계를 적확하게 짚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래 벼려온 우리 말에 대한 애정과 감각들이 살아 숨쉬는 글을 만들어 내는 일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는가. 고종속의 <모국의 소살>은 현대시 100년을 돌아보는 기념비적인 대작도 아니고 대표작가의 대표작품을 섭렵하는 어설픈 교양주의와 가벼운 문학 특강도 아니다. 이 책이 성공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당연하게도 저자의 시에 대한 안목과 나름의 기준과 분석, 그리고 개성적인 문장에 있다. 고종석 스스로 우리말의 ‘속살’에 대한 활용 능력이 뛰어나다. 부드럽고 단정하면서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말투가 쉽지 않다는 것을 독자는 이내 눈치 챌 것이다.

  시인 공화국의 시민들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염두에 둘 것은 선발 과정이다. 김소월부터 얌전하고 지극히 당연하게 시작하는 것 같지만 김정환, 김영승, 노향림에서부터 오규원, 김지하, 김기택에 이르기까지 시인들의 살고 있는 연대와 마을을 짐작하기 어렵다. 그만큼 현대시의 막과 장을 나누지 않고 종횡무진 내키는 대로 또는 마음 가는대로 선별하고 그 시집들을 읽어주고 있다. 어느 한 쪽에 기울어 있거나 치우친 느낌이 없다. 다만 ‘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존재하는 것인가를 살펴야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지만 고종석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이 관문을 통과한 듯 보인다. 물론 순전히 개인적인 역량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개나 소나 시와 관련된 에피소드와 내가 좋아하는 시를 뽑아 책을 내는 것은 출판계의 오랜 장사속이다. 고르는 기준과 안목을 가늠하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다. 지극히 주관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들이 아니라 그 시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삶에 관심을 갖는 방법은 절대로 옳지 않은 시읽기 방법이다. 시는 그저 아름다운 우리말의 ‘속살’을 훔쳐보는 두근거림이 있어야 한다. 시가 말하는 방식이 항상 우아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기도 하고 공허한 말장난으로 독자들을 우롱하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시인을 욕할 필요는 없다. 시가 전하는, 언어가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의 언저리를 따라갈 뿐이다. 그러다 보면 시를 보는 눈도 달라지고 시인들이 말하기 전에 느껴지기도 한다. 그 언어는 머나먼 나라의 외국어가 아니라 일상에서 늘 사용되고 있는 우리말이다. 우리말의 표피와 껍질을 벗겨 낸 속살의 다양한 층위를 맛보고 감상하는 즐거움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허위는 허위를 유포하는 자가
살아있 한 죽는 법이 없다
진실은 진실을 유포하는 자가
죽어도 죽는 법이 없다
- 김남주, ‘공식’, <조국은 하나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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