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의 속살 - '모국어의 속살'에 도달한 시인 50인이 보여주는 풍경들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 이성복, ‘연애에 대하여’,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중에서

  지금까지도 가슴에 깊이 박혀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는 고종석의 고백이 가슴을 덥혀준다. ‘내 나이에 좀 주착스럽’다고 말하는 그의 멋쩍은 표정을 상상하는 일은 잔잔한 미소를 만들어 낸다. 시는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비실용적인 장르 중의 하나이다. 어디에도 써먹을 데 없는,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시詩’를 읽어주는 남자 고종석의 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는 서문에서 시는 사람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라고 말한다. 이것이 시를 읽을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의 동의를 얻어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을 펼쳐든 독자들의 기본적 관심을 전제로 한다면 그의 유혹(?)을 쉽게 떨치지 못할 것이다. 시는 실용적이진 않지만 인간이라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런 예술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모국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축복을 우리는 충분히 즐기며 살아가지 못한다. 눈에 비춰지는 감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아름다움은 1차적이지만 영혼에 투영되는 사유의 즐거움은 언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다. 시는 그 한 복판에 우뚝 서서 홀로 외롭다. 그 성스러움과 상스러움의 가장 자리에서 우리는 주변과 경계만을 기웃거려도 나의 즐거움이 사라지진 않는다. 산책과 명상 그리고 독서로 가득한 삶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한 권 읽어 보라. 우리말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의 진경을 보여주는 50권의 시집은 고종석의 주관적 판단으로 넘겨버리기엔 그 부피와 중량이 만만찮다.

  <모국어의 속살>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시집 한 권, 한 권의 서평에 가까운 가벼운 내용으로 가득하다. 길이 않은 글 속에 한 시인의 특징과 시세계를 적확하게 짚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래 벼려온 우리 말에 대한 애정과 감각들이 살아 숨쉬는 글을 만들어 내는 일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는가. 고종속의 <모국의 소살>은 현대시 100년을 돌아보는 기념비적인 대작도 아니고 대표작가의 대표작품을 섭렵하는 어설픈 교양주의와 가벼운 문학 특강도 아니다. 이 책이 성공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당연하게도 저자의 시에 대한 안목과 나름의 기준과 분석, 그리고 개성적인 문장에 있다. 고종석 스스로 우리말의 ‘속살’에 대한 활용 능력이 뛰어나다. 부드럽고 단정하면서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말투가 쉽지 않다는 것을 독자는 이내 눈치 챌 것이다.

  시인 공화국의 시민들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염두에 둘 것은 선발 과정이다. 김소월부터 얌전하고 지극히 당연하게 시작하는 것 같지만 김정환, 김영승, 노향림에서부터 오규원, 김지하, 김기택에 이르기까지 시인들의 살고 있는 연대와 마을을 짐작하기 어렵다. 그만큼 현대시의 막과 장을 나누지 않고 종횡무진 내키는 대로 또는 마음 가는대로 선별하고 그 시집들을 읽어주고 있다. 어느 한 쪽에 기울어 있거나 치우친 느낌이 없다. 다만 ‘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존재하는 것인가를 살펴야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지만 고종석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이 관문을 통과한 듯 보인다. 물론 순전히 개인적인 역량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개나 소나 시와 관련된 에피소드와 내가 좋아하는 시를 뽑아 책을 내는 것은 출판계의 오랜 장사속이다. 고르는 기준과 안목을 가늠하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다. 지극히 주관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들이 아니라 그 시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삶에 관심을 갖는 방법은 절대로 옳지 않은 시읽기 방법이다. 시는 그저 아름다운 우리말의 ‘속살’을 훔쳐보는 두근거림이 있어야 한다. 시가 말하는 방식이 항상 우아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기도 하고 공허한 말장난으로 독자들을 우롱하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시인을 욕할 필요는 없다. 시가 전하는, 언어가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의 언저리를 따라갈 뿐이다. 그러다 보면 시를 보는 눈도 달라지고 시인들이 말하기 전에 느껴지기도 한다. 그 언어는 머나먼 나라의 외국어가 아니라 일상에서 늘 사용되고 있는 우리말이다. 우리말의 표피와 껍질을 벗겨 낸 속살의 다양한 층위를 맛보고 감상하는 즐거움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허위는 허위를 유포하는 자가
살아있 한 죽는 법이 없다
진실은 진실을 유포하는 자가
죽어도 죽는 법이 없다
- 김남주, ‘공식’, <조국은 하나다>중에서



06042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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