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 - 인간관계가 불편한 사람들의 관계 심리학, 7주년 기념 개정판
오카다 다카시 지음, 김해용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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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는 우리가 인간에 대한 거부 반응을 갖게 되면 여러 가지 곤란한 사건들을 겪게 된다. 이를 테면 ‘고슴도치 딜레마’로 알려진 갈등 상황이 그것이다. 인간은 타인에게 전혀 기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상대와 너무 가까워지면 여러 가지 거부 반응이 일어난다. 짜증이나 불만으로 시작하여 점차 비난, 공격, 험담, 고집, 괴롭힘, 말싸움, 폭력으로 번진다. 온갖 마찰과 충돌을 일으킨 결과 상대방과 자신 모두 상처를 입는다.

역세권, 초품아, 숲세권을 넘어 언제나 ‘책세권’을 강조해 왔다. 힘들지 않게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도서관이 있다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건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런데, 도서관 재건축이라니. 밀리의 서재 요금제로 변경했지만 적응할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 처음 만나면 사람이든 기계든 다 그렇다. 탐색과 관찰이 필요하고 거리 조절이 관건이다. 혼자 친해졌다는 착각이 관계를 망친다. ‘나’는 ‘너’와 다르다, 아니 너는 내가 아니다. 종이책의 손맛은 대체 불가능이다. 새책이 도착하면 표지를 쓰다듬고 휘리릭 넘기며 바람을 일으키면 옅은 잉크 냄새가 난다. 오감으로 즐기는 독서는 시작부터 두근거린다. 어떤 책은 서문이 너무 좋아 본문에 실망할까 싶어 책꽂이에 몇 주를 꽂아 둔 적도 있다. 어떤 시집은 뒤 표지부터 읽고 묵혀두기도 한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그렇게 세상 곳곳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책을 온몸으로 즐긴다. 전자책에는 그게 없다. 버스와 지하철은 기다리면 온다. 물론, 막차를 놓칠 수도 있지만. 도서관도 기다리면 재건축을 끝내고 최신식으로 거듭날 것이다. 그러다 예전 살던 동네 재건축이 끝나면 다시 그리로 이사가야 하나. 대한민국은 이래저래 재건축의 나라다. 전자책을 넘어 오디오북까지 대세가 이동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2023 국민독서실태」) 그러나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습관은 무섭다. 그것이 생각이든 행동이든 감정이든.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 바꾸려는 노력보다 뒤엎고 새로 시작하는 게 낫다. 종이책과 전자책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헤매다 비율과 방법을 적절하게 조절하겠지만 한동안 혼란은 피치 못할 사정이다. 어쩌다 오카다 다카시의 『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를 골랐는지 생각하다 기억이 나지 않아 여기 저기 뒤적거린 이야기를 하려다 그만...

‘인간 알레르기’라는 원제에 딸린 부제다. 부제가 더 자극적이고 직관적이다. 얄팍한 자기계발서는 아니다. 처세술과 관계 기술 혹은 상황별 대처법은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없다. 비법을 알려주겠다는 책을 믿지 않아야 하는 것은 ‘개별성 결여’ 때문이다. 80억 인구가 다 다르다. 인간의 일반적 속성과 공통점에 기반한다 해도 그렇다. ‘나’는 ‘너’와 다르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 각자의 해법을 고민하지 않으면 그럴듯해 보이는 제안이 소용없다. 다만 새로운 관점으로 문제를 보려는 태도를 가진 저자의 이야기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개 인간은 듣고 싶은 것만 들을 뿐 아니라,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독서라고 다를까. 읽고 싶은 것만 읽고, 읽고 싶은 대로 이해한다. 같은 책을 서로 다르게 읽는다는 의미와 다르다. 벽을 넘으려고 기어오르는 담쟁이처럼 책을 읽는 태도는 가르치거나 배우기가 매우 어렵다. 그 너머를 향한 안타까운 까치발을 나는 많이 본 적이 없다. ‘사실’에 기초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대개 ‘의견(해석과 주장)’을 확정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일상생활, 각종 매체의 뉴스, 한 다리 건너 들은 가십, 가족과 친구와 대화 혹은 업무 추진 과정에서도 빈번하다. 다른 생각, 다른 감정에 대한 수용 여부는 무엇으로 판단해야 할까. 그러나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몇몇 사람이 싫은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불편할 수도 있다. 대개 내향인과 외향인으로 구별하기도 하고 MBTI나 혈액형으로 가늠하기도 한다. ‘관계 지향형’도 스타일이 각자 다르지만 원하는 거리는 더더욱 천차만별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서로를 미워한다. - 순자(荀子)

인간의 마음속에는 타인의 행복을 질투하는 감정, 즉 ‘르상티망ressentiment’이 깔려 있다. - 니체(Nietzshe)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심리학이 ‘과학’이냐는 의심이 하루 이틀의 문제는 아니다. 실험심리학이 꽤 오랜 전통을 이어오고 있으나 표본 수의 문제보다 실험 조건과 대상에 따라 매번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한계는 극복하기 어려우니 일반적 성향으로 이해하거나 정규분포곡선의 중앙값 80% 정도라고 생각하면 내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

철학을 전공한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뇌과학에도 관심이 많다.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접근이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과 감정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방법은 다양하다. 앞서 언급했듯 그렇다고 해서 정답을 제시하거나 단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원제 그대로 ‘인간 알레르기’ 증상 있다는 전제로 개별 독자는 ‘나’를 점검할 것이다. 이 책이 그걸 요구한다. 어제까지는 좋았는데 오늘은 싫어지는 이유, 인간 알레르기의 역사 등이 그렇다. 다만 마지막에 ‘이유를 아는 순간 인간관계의 봉인이 풀린다’라는 주장은 좀 의심스럽다. 5장 “나는 나를 조종할 수 있다!”라는 저자의 권유는 인류 역사에서 가능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아 그렇다. 읽는 사람마다 속이 시원할 수도 있고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기도 하겠으나 답이 없다는 걸 전제로 한 번쯤 들여다보면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대인 관계의 어려움, 대인 기피증, 성격장애, 적응장애 같은 단어보다 ‘인간 알레르기’라는 메타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당혹스럽겠지만, 자극적인 표현보다 이면에 숨은 저자의 의도와 개별 독자의 상황과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앞부분의 잔인한 처형 묘사에 책장을 덮는 사람도 있고, 오징어를 씹으며 심드렁하게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다르다. 인간은.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은 ‘악인’이 아니다. 괴벨스, 아이히만, 노덕술도 따뜻한 아버지였다. 모든 관계는 상대적이다. 상황이 인간을 지배한다. 개인적인 대인 관계도 그렇다. 상대방의 거친 말과 성난 얼굴은 때로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 사람이 ‘악인’이라서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만 악인일 수도 있다. 그 정도까지 생각이 열린다면 이 책은 충분히 의미를 만들 것이다. 다만 부록으로 ‘싫어하는 사람 대응 매뉴얼’ 같은 걸 적어 놓은 건 ‘나’에게는 무의미한 “착하게 살자”는 선언처럼 들린다. 모르는 게 아니라 알아도 실천할 수 없는 게 있다.

우리는 종종 사소한 일을 계기로 방금 전까지 친밀함과 애정을 느꼈던 존재에게 결코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분노를 느끼곤 한다. 일단 그 사람에 대한 거부 반응이 나오면 접촉할 때마다 경멸이 가득 차고 혐오감이 솟구쳐 올라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인내하면서 살거나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 이 두 가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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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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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지 못할 때가 많다. ‘어떤 형태로든 우울하다’라는 80년대식 감정의 과잉 토로가 아니라도 자기 안에 함몰되는 건 선택이 아닐 때가 많다. 세상에는 기이한 일들이 차고 넘쳐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키기도 하고, 합리적 이유로 포장된 주관적 판단과 고집으로 한여름의 열기를 삼키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소설은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한숨을 틔워준다. 쉬어가라고 다독이고, 잊으라고 토닥거린다. 오늘과 내일 사이에서 위로와 기대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견디게 하는 힘을 주는 소설은 언제나 반갑다.

내용과 방법에 따라 어떻게 분류하든 개별 독자도 취향이라는 게 있어 모든 소설에 몰입하기는 어렵다. SF가 집중하지 못하는 독자, 연애 소설에 하품하는 독자, 역사 소설에 열광하는 독자 등이 그렇다. 김기태의 소설은 ‘현실’을 담고 있다. 개연성 혹은 핍진성이 소설의 미덕 중 하나라면 유머 코드를 장착한 소설가는 군계일학일 터. 각자의 입맛에 따라 좋은, 아니 재밌는 소설의 책장을 넘기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겠지. 그렇다고 하나의 단편 혹은 장편 소설에 모든 요소를 버무려 재미가 배가 될 리 없다. 방심하고 종이에 손을 베일 때가 있다. 그렇게 허를 찔러 독자의 폐부를 찌를 만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작가 또한 많지 않다.

김기태의 단편들을 읽으며 몇몇 소설가를 떠올렸으나 이름을 지웠다. 비교가 아니라 온전히 김기태가 창조한 소설의 세계를 그대로 음미하면 그뿐이다. 실감나게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굳이 ‘세태 소설’이라는 구분이 필요치 않다. 찰스 디킨스와 빅토르 위고, 발자크와 도스토옙스키 또한 당대의 현실을 묘사하고 재해석하며 풍자하고 패러디하는 즐거움으로 아주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기쁨과 슬픔, 감동과 위로를 건넸다. 그밖의 많은 작가들 또한 그러하다. 보편적 개인의 내면 심리를 깊이 들여다보거나 사회적 사건과 당대의 모순을 드러내는 작업 또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곧 ‘나’이며 ‘너’이고 ‘우리’에 해당하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다. ‘그들’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재미도 없지 않으나 대개 비참하고 신산스런 현실을 견디는 사람들, 구별 지어 금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 평온한 일상에서 위기를 맞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모두 내 이야기고, 네 인생이며, 우리들의 삶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대개 ‘역사’로 분류된다. 히스토리he-story.

기록은 재미와 교훈을 함께 전한다. 권진주와 김니콜라이, 표제작에서 두 사람을 인터내셔널로 그렸으나 오히려 매우 동일한 집단에서도 심리적 거리와 생각의 차이는 북극과 남극만큼 하나가 되기 어렵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통해 얻는 안도의 한숨 혹은 이 정도면 그래도 견딜만하다는 위로를 얻기도 한다. 무관심과 침묵은 ‘나타懶惰와 안정’을 선물한다. 굳이 김수영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 「세상 모든 바다」를 지나 「전조등」을 켜고, 「보편 교양」을 갖춰 「무겁고 높은」 곳에 도달하긴 어렵다.

BTS 응원하려고 군대(ARMY)에 가는 사람, 《나는 솔로》에 출연 신청을 하는 사람, 네이버에서 최저가로 구입할 물건을 검색하는 사람……. ‘내 얘긴가, 친구 닮았네’ 친근한 주인공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들게 한다는 정도로도 충분하다. 그 평범함이 무려 소설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는가. 아니 각자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화려한 학벌, 선망하는 직업, 높은 연봉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소설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건 매번 삶의 가치 혹은 진정성 같은 것들이다.

사실 “너 뭐 돼?”라는 질문 앞에서 쭈뼛거리지 않기 힘들다. 뭐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들을 떠올려 보면 정말 그것이 뭐가 되는 이유가 아닐 수 있다는 걸 아무도 몰라도 스스로는 잘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위선이든, 허위든, 가식이든, 거짓이든 세상과의 불화보다 무서운 건 자신과의 불화다. 온전히 ‘나’로 살지 못하는 마음은 신발 속에 든 돌을 빼내지 않고 걷는 것처럼 불편하다. 지금 이대로 괜찮을까. 사람들은 귀신같이 포장지와 알맹이를 구별한다. 인생이 그리 쉽고 세상이 만만하면 누가 소설을 읽고 쓰겠는가.

김기태의 응원과 위로를 보내는 방식은 독특하다. 아니 그가 독자를 쓰다듬기 위해 소설을 썼을 리 없을 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그렇게 읽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김기태의 소설은 「깊이에의 강요」로 괴로워하는 독자는 없을 터.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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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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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이 멈추면 빛과 멜로디가 사라지고 눈도 그치겠죠”

이미지image는 사진처럼 정지화면에 가까워 시詩에 어울린다면, 영화movie는 움짤이나 쇼츠처럼 어떤 순간을 포착하지 않고 앞뒤 상황까지 담아내는 소설을 닮았다. 추억이 빛바랜 흑백 사진을 닮은 레트로 감성이라면, 기억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동적 움직임에 가깝다. 어떤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는 조해진의 말대로 빛이 피사체를 감싸는 순간이 아니라 그 순간에 담긴 기억 속의 서사를 풀어놓아야 한다. 현대 소설은 일시 정지와 되감기 혹은 재생을 반복하는 비디오 테이프처럼 때때로 과거를 소환하고 잊고 있던 순간을 포착하며 기억의 파편들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고전과 달리 ‘오늘’을 사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

『로기완을 만났다』, 『빛의 호위』 이후 다시 『빛과 멜로디』를 읽으면서 소설가만큼 나도 변했음을 감지했다. 한 작가의 작품 세계와 경향을 분석하는 일을 업으로 삼지 않았으니 조해진과 그의 소설에 논할 일은 아니지만, 나름의 빛과 색을 드러내기 위한 작업들이 계속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빛의 호위에서 한발 나아간 이야기는 조금 더 깊고 섬세하다. 다른 작품에서와 같이 현재는 과거와 조응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갈 힘을 얻는다.

누구나 내일을 꿈꾼다. 오늘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소설을 읽지 않을 지도 모른다. 현재와 나른 시간과 공간을 꿈꾸거나, 나와 다른 타인의 삶이 궁금해질 무렵 해가 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그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조해진은 빛을 사용하고 먼지 묻은 사진을 꺼내든다. 독자는 기꺼이 희뿌윰한 희미한 기억 속으로 자신을 투영한다. 각자의 기억 혹은 추억을 들추는 일이 모두 즐거울리 없다. 타자를 향한 분노, 내면에 생채기로 남은 상처, 잊고 싶은 순간일수록 선명한 과거에게 등을 떠밀려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승준과 권은이 아니라 살마와 나스차, 리디아……. 우크라이나와 영국이 아니라 대한민국 어디든 유목민으로 살아야 할 운명을 안고 태어난 사람은 모든 독자 자신이다.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는 사람들 혹은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삶은 특별한 경험,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다. 낯선 감각과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면 소설보다 재밌는 콘텐츠가 넘치는 세상이다. 책장을 넘기며 기대한 게 무엇이든 함부로 추측하고, 타인을 규정해서 스스로 무너지지는 말자. 소설은 소설일 뿐! 그래도 서사는 본능이니 굳이 숨기고 살 필요는 없으나 현실과 착각하지 않으면 그 뿐!

거울 속 세상과 그녀를 위해,

영원에서 와서 영원으로 가는 그 무한한 여행의 한가운데서,

멜로디와 함께……

빛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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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이야기들
발터 벤야민 지음, 파울 클레 그림, 김정아 옮김 / 엘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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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글을 읽으면 자꾸 스페인 국경을 넘지 못해 자살을 결심한 절망과 마주하게 된다. 누구나 그러하듯, 출구 없는 바닥의 서늘한 촉감으로 모골이 송연해진 경험이 떠오른다. 역사에 가정법이 없지만, 그가 미국으로 망명했더라면 어떤 글을 남겼을까. 아니 요절한 천재들의 마지막이 바로 그 순간이어서 비극적으로 찬란해졌을까.

플라뇌르flâneur. 도시의 한가한 산책자이자 날카로운 눈빛으로 파리라는 텍스트를 읽는 사내.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텍스트 안에서 유영하는 여유를 선물한다. ‘재미’의 기준과 종류가 다르니 어떤 책의 재미를 논하는 건 온당치 않다. 아니, 용어의 차이겠으나 어떤 방식으로든 이 책은 벤야민의 텍스트에 곁들여진 파울 클레를 들여다보는 재미를 더했다. 독일의 화가 이름이 갑작스레 현실을 소환하더라도 외면하자. 혹시, 그 혹은 그녀를 떠올리는 순간 모든 걸 망칠 수 있으므로.

꿈꾸는 플라뇌르, 땅과 바다를 지나 놀이와 교육으로 엮인 글들은 파편적 인상을 전한다. 형식과 내용의 자유가 몽환적 상상력과 날 선 감각을 일깨운다. 일상적 반복과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라던 신현림처럼, 경계를 무너뜨리고 틀 밖으로 삐져나올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뭐라 부르든, 그들이 남긴 생각들과 그림, 음악, 건축…… 그것이 인류의 꿈이었고 미래렸다면, 지금-여기는?

상상하는 것과 소유하는 것의 문턱을 이미 넘어서 있는 그리움. 그런 그리움은 이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 뿐이다. 그리운 사람은 이름 속에서 생명을 얻고 몸을 바꾸고 노인이 되고 청년이 된다. 이름 속에 형상 없이 깃든 그는 모든 형상의 피난처다. - 「너무 가까운」,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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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절대적인 자유를 꿈꾸다 - 완역결정판
장자 지음, 김학주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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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초반에 읽은 『장자』는 거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게 없다. ‘앉아서 삼천리, 서서 구만리’ 같은 허황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장자. 그러나 그 상상력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호접지몽胡蝶之夢’으로만 기억하는 장자도 나쁘지 않다. 존 윅이 되어 나타나기 전 메트릭스 안에서 유연한 허리꺾기의 모티프가 됐을 거라는 추측이면 어떤가. 현실보다 꿈이, 꿈보다 더 환상적인 아니 환장할만한 현실이 매일 펼쳐질 테니. 그걸 알고 생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어느 철학자의 장난 같은 말이지만 그야말로 내던져진 인생, 그 하나하나의 탄생과 소중함이 우주에 비견되는 고귀함들이 허망하게 스러지고 짓밟히는 현실, 그래도 내일을 향해 노력하자는 비현실적인 희망 고문을 견디며 오늘도 우리는 장차 무엇이 중요한지 고민하며 장자 한 페이지를 넘긴다.

어슬렁어슬렁 노니는 소요유逍遙遊, 세상을 살아가는 더없이 편안하고 유연한 태도. 힘빼기의 기술은 아무나 다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개 게임이 끝난 후에, 인생의 마무리 단계에서나 깨닫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직립보행의 자유와 푸른 하늘이면 충분하다는 건 상징적 수사가 아니다. 장자는 무소유를 권하지는 않으나 하늘과 땅의 본성을 이야기한다. 물론 그것은 ‘인간’, 즉 나의 삶을 위한 관찰과 사유의 과정이다. 제 눈에 뵈는 게 전부이고 자기 감정과 판단이 정답이라는 전제. 그것은 직업과 나이, 학력과 재산의 유무를 따질 수 없는 태도의 문제라는 걸 매번 확인한다. 왜 언제나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연민조차 아쉬운 순간들 그리고 남은 시간.

우리의 삶에는 한이 있으나 앎에는 한이 없다. 한이 있는 삶을 가지고 한 없는 앎을 뒤쫓음은 위태로운 일이다. 그런데도 앎을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위태로울 따름인 것이다. - 제3편 養生主

읽는다고, 쓴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는 여전히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기대가 새겨져 있다. 그렇다, 그 기대가 오히려 사람을, 세상을 미혹하게 하기도 한다. 안다는 착각, 그럴 거라는 추측이 빚어내는 비극들. 나와 다른 생각과 감정, 잘못된 전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편견 앞에서 장자는 자기 삶의 주인으로 길러 주는 말들을 건넨다.

말이 말을 만든다. 생존의 비법은 침묵과 무용함이라는 아이러니. 좋은 목재는 톱으로 잘리고 못에 박힌다는 장자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생존이 미덕인 시대를 지났으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며 장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시대가 변해도 사람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의 속성은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 유전자에 변이가 일어나고 본능으로 자리 잡아야 하니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한순간에 변신로봇이 될 거라는 기대나 착각은 금물이다. 즐기며 취미로 삼는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다만 그조차 아니 한다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또다시 야만의 시대가, 오욕의 세월이 돌아온다. 학벌과 직업 같은 외피를 벗기고 나면 악취만 풍길 수도 있다는 걸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보면서도 변한 게 별로 없다. 인간도 세상도, 그리하여 장자가 여전히 혀를 찬다. 거울이나 좀 들여다 보라고.

“아서라, 그런 말 말거라. 그것은 쓸데없는 나무다.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빨리 썩어 버리고, 그릇을 만들면 바로 깨어져 버리고, 문짝을 만들면 나무진이 흘러내리고, 기둥을 만들면 곧 좀이 먹는다. 재목이 될 만한 나무가 아니다. 쓸 만한 곳이 없어서 그처럼 오래 살고 있는 것이야.” - 제4편 人間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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