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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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 안에서조차 영원히 시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 아니 삶은 어떤가.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더구나 공시적 상상력은 저절로 만들 수 없다. 삼십 대 초반의 한국계 미국인 김주혜는 아홉 살에 이민 간 이방인이다.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강조하고 있으나 역사를 들여다보며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낸 시간과 노력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한국인에게 다소 식상한 호랑이라는 문학적 알레고리는 오히려 세계 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여전히 동방의 작은 나라, 그 전통과 문화가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이야기에 주목한 사람들보다 그 이야기를 잘 풀어낸 작가의 역량에 박수를 보낸다.

한국 사람이 아니라면 이 소설을 어떻게 읽을까, 라는 생각으로 끝까지 읽었다. 시대순으로 나열된 역사적 사건들, 익숙한 이름으로 번역된 인물들의 성격, 이야기의 구조와 스토리 전개는 개인적으로 흥미를 끌지 못했다. 이제 너무 많은 책들 사이를 헤매며 중첩되고 반복되는 사실, 구조, 캐릭터에 노출됐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새로움보다는 ‘낯설게 하기’에 성공한 책들이 반갑다는 점에서 작은 땅의 야수들은 한국인의 여집합에 해당하는 독자들에게 적당해 보인다. 아니다, 이 시대를 들여다보지 않은, 이제 막 역사와 소설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당대를 들여다보게 하는 촉매가 될 수도 있겠다.

1918년에서 1964년에 이르는 연대기적 서술에 부합하는 사건들은 꼼꼼한 고증과 디테일에 신경 쓴 흔적이 눈에 띈다. 87년생 미국인이 쓴 소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몰입을 방해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2024년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접하지 않았다면 읽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대체로 일제강점기 조선의 현실을 담아낸 소설이다. 1964년을 그린 4부는 후일담처럼 읽힌다.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에서 반복하는 시대라서 식상한 게 아니다. 잊을 수 없는 시간, 다시 경험하기 어려운 상황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다만 그때, 그 사람들을 해석하고 바라보는 관점은 계속 변할 것이다. 무용하고 아름다운 걸 좋아한다는 말에 매혹됐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나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 같은 책들 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퍼즐을 맞추고 시간과 공간을 재현하며 과거가 현재로 이어지는 다리를 잇는다.

인간의 삶이, 아니 인류의 역사를 거대한 ‘흐름’으로 이해한다면 모든 텍스트는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각각의 자리에서 유기적인 고리를 형성한다. 그것이 문학이든 역사든 철학이든 과학이든 예술이든.

김주혜는 한 겨울 흰 눈과 호랑이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한반도의 고난과 시대적 비극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각각의 인물이 누구를 닮았든 중요하지 않으며 외교관의 아내가 남편 친구와 불륜을 저질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나혜석의 이야기가 뒤섞여 등장해도 사실과 픽션을 구분하는 대신 하나의 커다란 변화와 흐름으로 읽어내는 정도면 충분해 보인다. 실존 인물과 작은 시기적 오류를 따지는 건 소설을 재미없게 읽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유미리의 『가족 시네마』, 이민진의 『파친코』처럼 외부자의 시선으로 그려낸 소설들은 자전거를 타고 국경을 넘는 유럽 작가들의 상상력과 차이가 많다. 건널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즐거움이 현실적 비극과 닿아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은실과 단이, 옥희와 연화, 정호와 한철, 김성수와 이명보, 야마다 겐조와 이토 같은 인물들 사이에서 오늘을 만든 근원을 확인하는 실존적 고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겨우 백여 년 동안 우리에겐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가. 아니, 지금은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루가 일생인 하루살이만큼 찰나에 불과한 각자의 생은 무엇을 향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소설가는 시간의 갈피를 접어 새로운 공간과 인물을 창조하여 독자들에게 녹슨 청동 거울을 들이민다. 흐릿한 형체를 둘러싼 배경 혹은 확신에 찬 자신을 다시, 오랫동안 들여다보라고. 어떤 형태로든 시간은 흐르고 모든 사람은 무덤을 향해 전력 질주를 멈추지 않을 것이며 세상은 어떤 일이 벌어져도 앞으로 나아가며 밤이 찾아오고 또 해가 뜰 것이다.


하늘은 하얗고 땅은 검었다. - 첫 문장

언어 자체가 옥희를 유혹했다. 옥희는 특정한 단어들을 특정한 순서로 나열하면 자기 내면의 모습도 마치 가구를 옮기듯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고 한 마리 춤추는 나비처럼 언어 속을 누볐다. 내면에 쌓이는 단어들이 계속해서 그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 가는 데도 외부에서는 누구도 그 차이를 감지할 수 없었다. - 68쪽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뉘며, 대다수는 그중 첫 번째 범주에 속한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현재의 상태에서 성공을 향해 더 나아갈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한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삶에 주어진 운명을 합리화하고 그 자리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아의 상승과 확장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말이다. - 388쪽

모두가 꿈을 꾸지만, 그중 몽상가는 일부에 불과하다. 몽상가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본다. 소수의 몽상가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달, 강, 기차역, 빗소리, 따스한 죽 한 그릇처럼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도, 몽상가들은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닌 신비로운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세상은 사진이라기보단 유화여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색깔만을 바라볼 때 이들은 영원히 그 아래 감춰진 색깔을 바라본다. 몽상가가 아닌 사림이 유리를 통해 보는 풍경을, 몽상가들은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셈이다. - 415쪽

연화는 거침없이, 결의에 차서 울었다. 다시 만들어지기 전에 먼저 흔적도 없이 녹아버려야 하는 사람처럼 울었다. - 536쪽

옥희는 생각했다.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작별을 고한다 해도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가 수평선 너머 점이 되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상대를 향해 멈추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 540쪽

노년이란, 인생의 모든 행복이 앞으로 다가올 날들이 아닌 이미 지나간 날들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 552쪽

삶을 위해 지불하기에 죽음은 아주 작은 대가였다. - 552쪽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 603쪽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그 어떤 것에 대한 소망도 동경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바다와 하나였다. -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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