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 영혼 문학과지성 시인선 616
김복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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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듬한 시선

어린애인가

어린 여자애 맞나

저해상도 흑백 화면이 반사하는 것은 내 얼굴과

소녀처럼 작은 여자의 움직임

뭐 하는 거야

저 여자

카메라의 움직임을 따라

보니

원숭이가 여자 얼굴 가면을 쓰고 있었다

매끄러운 머리카락 젊은 처녀의 고요한 얼굴

가면을 씌운 것만으로 원숭이는 신비로운 어린 신 같았다

원피스를 입은 원숭이의 두 팔이

벌거숭이 아기 인형을 안고 흔든다

인형은 잠든 것처럼 얌전하고

죽은 것처럼 안전해 보인다

가면이

창밖을 비스듬히 내다보다 소파 쪽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움직임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다르다

내면으로 가라앉지 않기 위해

여자와 소녀와 아기와 원숭이를

섞지 않기 위해

화면에

섞은 채

얼굴을 얹고

얼굴을 중심으로

비스듬히 앉았다 일어선다

*Pierre Huyghe, 「Untitled(Human Mask)」(2014).

가면을 쓴 원숭이들이 진화한 세상은 비극이다. 아니, 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애처롭다. 천국과 지옥과 천사와 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다가 문득, ‘여자와 소녀와 아기와 원숭이’를 확인하는 찰나. 인생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옭아맨 몇몇 프레임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더라도 시작과 끝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 자신을 속여 감옥에 갇히고 또 누군가는 풀려나 새로운 세상과 다시 만난다. 현실 속에서 마주치는 개별적 인간이 아니라 내 안에 숨어 있는 원숭이와 박쥐를 다시 만나는 순간, 그때가 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이제 시집을 펼칠 만큼은 여유가 생긴 거라는 위로 정도면 충분하다.

박쥐들은 어디에 살아요?

빈 집에 드는 빛

빛은 낙원 밖에도 있지

빛에 야위는 것들은 무엇인지?

죽은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에 없는 마음과

마음에 없는 소리가

표정이 없는 대답과

대답을 잊은 표정이

절망과 물정을 아는 희망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에

걸어놓은 이름표를 읽듯이

노을 지나 내려앉는 박쥐들을 센다

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 안 해요

박쥐들은 여기 살아요

이 몸속에는 뼈도 내장도 없고요

박쥐들이 옮겨 다녀요

손대볼래요? 뼈처럼 내장처럼 딱딱하거나 물컹할걸요

비명이 나올걸요

사람 귀에는 안 들릴 거지만서도……

죽은 것처럼 보여도 이 몸은 절대로 병원에 보내지 마세요

박쥐들을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거든요

천천히 나는 그 몸을 만져보았다

만지기 싫었지만

만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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