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담쟁이넝쿨이 뒤덮인 낡은 건물 같은 인간 그레고리우스. 후줄근한 옷과 벗겨진 머리에 고도 근시로 시계처럼 정확한 일상의 루틴은 골이 따분하다. 고전 문헌학자가 언어에 쏟는 예민함은 다른 감각을 무디게 한 것일까. 비 오는 날 그녀를 만난 ‘우연’이 삶에 균열을 일으키는 트리로 작동하면서 ‘문두스’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고 떠난다. 독자들은 자연스레 그녀가 남긴 전화번호가 600쪽이 넘는 장편을 읽는 내내 언젠가 등장할 거라고 ‘기대’한다. 대개 욕망은 스스로 끓어오지만 타인 혹은 외부 세계의 자극으로 발현된다. 히치콕이 노린 맥거핀MacGuffin 효과를 기막히게 차용한 작가의 솜씨에 놀란 게 아니라 로맨스 소설일 거라는 선입견만 생긴 거 같아 뒷맛이 쓰다. 클리셰를 파괴하는 클리셰로 활용했다면 어땠을까. 기막힌 반전이나 놀랄만한 결말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긴 장편을 읽는 동안 독자에게 챙겨줄 기프티콘이나 무료 이모티콘 이벤트 정도는 준비했으면 어땠을까. 도입부의 주목할 만한 장면 이후에 소설은 인간과 삶에 대한 부조리를 성찰한다. 기록 vs 기억, 여행자 vs 향수병, 리스본 vs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대결과 갈등은 프라두의 과거와 그레고리우스의 현재 시점을 오가며 끊임없이 이상 vs 현실을 묻는다.

『파리 대왕』이나 『동물농장』 혹은『이솝우화』는 거대한 알레고리로 선악과 인간 본성을 구체화한다. 고도 근시의 안경 교체로 인한 프레임 전환은 새로운 관점으로 새로운 세상을 본다는 점에서 낯설지도 새롭지도 않지만 생존 인물의 기억을 통해, 그들의 시점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또 상징적이다. 오래된 소설적 장치들 이를테면 은유와 상징, 알레고리로 엮인 액자 구성은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던 김영호의 외침과 다를 바 없는 과거 회귀형 인물과 원점 회귀형 공간 구성으로 버무려져 마치 영화 제작을 염두에 둔 소설처럼 곳곳에 다양한 장치들이 혼재한다.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건 복잡하고 난해하여 해석의 다양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표면적으로 단순해 보이는 서사구조에 숨겨 놓은 재미와 의미를 독자마다 다르게 해석해도 좋다는 뜻일 게다. 이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는 ‘경멸에서 오는 외로움’, ‘신뢰에서 오는 협박’, ‘멜랑콜리’와 추상적 개념과 언어에 대한 천착이다. 그녀가 “포르투게스Português.”라고 소리 내어 발음하지 않았다면 그레고리우스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지 않았을까. “‘오’는 ‘우’처럼 들렸고, 올리면서 기묘하게 누른 ‘에’는 밝은 소리를 냈다. 끝의 무성음 ‘스’는 실제보다 더 길게 울려 멜로디처럼 들렸다. 하루 종일이라도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라는 독백은 시니피앙signifiant이 시니피에signifié 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며, 시니피앙의 효과에 의해 시니피에가 만들어진다는 라캉의 주장을 증명한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포르투케스’가 결국 그레고리우스를 프라두에게 이끈다.

잊어버렸던 호메로스의 단어 ‘리스트론’은 홀 바닥을 청소할 때 쓰는 쇠 밀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던 철학자의 말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의 자의적 해석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고 지적했던 비트겐슈타인도 다르지 않다. 프라두가 남긴 텍스트는 오롯이 되살아나 현재화되고 무덤 속의 프라두와 고레고리우스의 삶에 나타나 칼 융의 ‘동시성synchronicity’을 극화했다고 하면 지나치다 할 것이나 어차피 오독이 독자의 특권이라고 우겨봄직도 하다. 철학자 페터 비에리의 『자기 결정』이나 『삶의 격』을 읽고 철학자의 또 다른 페르소나 파스칼 메르시어가 쓴 『언어의 무게』까지 살펴본 분들의 열정이 놀랍기만 했다. 독서 모임의 목적이 무엇이든 각자의 관점과 해석이 부딪치고 충돌하는 장면만큼 재밌는 지점은 각자의 확장성이다. 영화조차 보지 않은 나와 달리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신 분들의 이야기는 모임을 이어가는 가장 큰 이유다.

영화의 남주와 여주 이미지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작위적인 소설 장치들에 대한 비판도, 프라두의 직업인 의사와 아버지의 직업인 판사의 직업적 윤리 의식에 대한 견해 그리고 ‘도덕적 허영심’이라는 표현과 의견들이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지점들이었다. 소설은 2004년 스위스 베른 시 키르헨펠트에서 시작되지만 포르투갈 리스본이 주 무대다. 살라자르 정권 당시 포르투갈 저항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부족해서 아쉬운 건 개인적 소회일 뿐. 이스타두 노부Estado Nobo(1933년부터 1974년까지 지속된 포르투갈의 비민주적 정치경제체제)를 배경으로 펼쳐진 과거와 현재의 대비가 아니라 프라두라는 개인의 서사로 풀어낸 점은 못내 아쉽다. 철학자에게 소설은 쉽게 풀어쓴 연구 보고서가 아니었을까. 목적이 무엇이든, 개별 독자가 어떻게 읽었든 모임에 참석하는 대신 리스본으로 떠난 분과 소설을 읽고 기차를 타고 온 분, 울릉도로 떠나 독도 소주를 마셨다는 분들의 뒷이야기가 더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의 역사 - 신의 탄생과 정신의 모험
카렌 암스트롱 지음, 배국원 외 옮김 / 교양인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쿠오 바디스Quo vadis』를 읽은 건 초등학교 시절이었으니 아마도 문고판 축약본이었을 것이다. 신과 종교에 대해 무지했던 시기였으니 이 책이 그리 감동을 준 것도 아니었다. 사치와 향략으로 점철된 로마 문명과 숱한 박해와 고난에도 결국 인류의 보편적 종교로 자리 잡은 기독교의 대비가 인상적이지도 않았고,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에 대한 아우라가 영향을 미쳤을 리도 없다. 계몽사판 세계문학 전집 100권 중 하나로만 기억한다. 소설의 영향은 아니었겠으나 크리스마스 즈음에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가서 초코파이를 받아먹은 게 종교 경험의 전부다. 풍광 좋은 절에 들러 문화재를 둘러보는 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 감동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엊그제 겨울 산, 돌계단을 디뎌 개심사에 다녀왔다고 마음이 열리거나 번뇌가 씻기지도 않는다. 종교에 대한 관심과 신에 대한 믿음은 별개의 문제다.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예수는 신화다』 등의 책을 보는 동안에도 해결되지 않았던 질문 중의 하나가 ‘유일신’에 대한 그들의 공고한 믿음이었고, 유대교와 이슬람과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의 일치 여부 혹은 배타적 태도의 근원이 궁금했을 따름이다. 신의 존재 여부와 종교적 도그마는 한 인간 혹은 인류 전체의 역사를 뒤흔든다. 여전히.

극단주의 테러와 종교 전쟁을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다. 숱한 사이비 논쟁이나 다양한 분파를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때때로 그 열정과 공고한 신뢰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그러한 삶은 그렇지 않은 삶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면 카렌 암스트롱이 작은 실마리를 제공한다. 첨부된 지도를 따라가며 신의 기원과 유일신의 탄생 과정을 시작으로 기독교, 이슬람의 신 뿐만 아니라 철학자, 신비주의자, 종교개혁가의 신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는 카렌 암스트롱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하나의 관점으로 신을 해석하거나 분석하는 대신 객관적 사실과 역사적 과정을 살피는 데 그쳐 객관적 거리두기에 성공한 듯하다.

아주 먼 옛날, 수천 년 전의 기록을 검토하고 예수와 무함마드를 대하는 태도 삼위일체의 해석 문제 등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의 뿌리와 차이를 확인하는 동안 인류가 걸어온 종교의 역사를 정리할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 인간 이성은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합리주의 탄생의 바탕을 이룬다.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하거나 합리적 근거가 불가능한 신이 지배하는 세계에 균열이 발생하는 건 자연스러운 문명발달의 과정이다. 신이 설 자리가 좁아지기도 전 성급하게 신의 죽음을 외친 사람들이 많다. 시대를 앞선 자들의 삶은 괴로웠고 용기 있는 발언은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실존적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의 발언 내용이나 철학적 사유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종교가 사라지거나 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 이슬람 모두 유일신, 즉 우상 숭배 금지로부터 모든 갈등이 배태되었다. 아랍 민족의 문화적 전통을 부정하는 쿠란의 급진적 구절로부터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살육이 시작되었다. 이슬람은 삼위일체와 성육신 교리조차 부정하는 극단적 유일성의 개념에 집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제국에서 완전한 종교적 자유가 가능했다. 종교적 배타성으로 인한 인류 역사의 고통과 눈물은 열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잔혹했다. 종교 전쟁과 마녀 사냥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벌어지는 편견과 갈등을 다룬 숱한 기록과 고민들은 여전히 난망한 문제다. 힌두교와 불교를 다루기는 하지만 저자는 주로 세 종교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간다. 종교와 과학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창조과학이라는 용어가 낯설지 않을 만큼 종교도 발전과 진화를 거듭한다. 나름의 설득력을 위한 노력은 종교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현실적 삶을 위한 인간의 정신적 보호 장비로 애용된다. 무엇을 믿는 어디를 바라보든 자유지만 신의 미래는 생각보다 밝아 보이지 않는다.

카렌 암스트롱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신의 미래를 신의 죽음과 인간의 해방으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틸리히의 ‘신 위의 신’, 화이트헤드의 ‘위대한 동반자’ 개념을 논하지만 우리가 믿어온 신에 대한 부정이나 새로운 신을 위한 희망이 아니다. 신의 존재 유무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은 헛되다. 어느 쪽이든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신과 종교에 대한 역사다.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지만 ‘태도’를 드러내지 않는다. 특정 지역과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기 위해 종교에 대한 앎은 반드시 필요하다. 타인을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지만 말과 행동의 맥락과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 지금, 여기의 삶이 중요하든 내세와 죽음 이후의 영생에 목숨을 걸든 아무도 그 선택을 가로막거나 방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의 사회, 정치적 기능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과 결과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종교가 있든 없든 ‘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미래’를 고민하기 위해 피해 갈 수 없다.

인간은 공허함과 황량함을 견딜 수 없기에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그 공백을 채울 것이다. 근본주의의 우상은 신을 대신할 수 없다. 미래를 위한 활기찬 새 신앙을 창조하려면 신의 역사에서 교훈과 경고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 68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통 구경하는 사회 -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김인정 지음 / 웨일북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종이 신문을 보며 세상에 눈뜨던 사춘기 시절, ‘아침마다 피 묻은 칼이 튀어나오는 신문을 들고’라고 표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개가 사람을 문 게 아니라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 대개 사건, 사고에 눈이 가고 관음증의 강도는 배가 된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확인할 수 있는 인터넷 뉴스를 접할 때마다 레거시 미디어와 황색 저널리즘을 구별하던 시대는 차라리 낭만적으로 보일 정도다. 정치는 혐오 장사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언론은 클릭수로 돈을 챙길 때 우매한 군중은 자신의 뇌를 절여 맹목적 증오와 진영 논리에 눈이 먼다. 반복 재생되는 유튜브와 쇼츠, 릴스, 틱톡은 필터 버블을 만들고 생각하지 않는 개인은 에코 체임버에 갇힌다.

어쩌면, 정치가 생활을 바꾸고 투표가 미래를 결정한다는 건 착각에 불과하다. 감시와 처벌을 게을리하는 투표 이후의 비판적 눈길과 적극적인 참여가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민주정체의 원리를 우리는 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개인이 가진 지식과 정보, 판단 능력, 논리적 사고가 부족할 때 침묵의 카르텔은 무서운 속도로 서로의 이익을 챙기며 견고한 구조를 만든다. 선의에 기댄 정치 체제는 망상에 불과하며 견제 장치 없는 권력과 비판 기능을 상실한 언론은 현실을, 아니 바로 매일매일의 삶을 참담하게 만든다.

절망과 고통이 삶의 디폴트 값이라면 꿈과 희망은 현실을 견디는 마약일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만큼 순진한 생각이 ‘설마’를 낳고 정치적 퇴행을 양산한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 관습적 사고에 균열을 일으켰다면, 이길보라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은 경험의 한계를 절감케 했고, 김인정의 『고통 구경하는 사회』는 언론과 현실의 역학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라는 이상의 말이 새삼스러운 건 자신이 뱉은 말과 행동과 그 태도가 본질이라는 걸 우리는 각자 최선을 다해 외면하는 듯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이익에 반하는 짓을 꺼린다. 그래서 이해관계를 떠나서는 숨조차 쉬지 못한다. 그것이 부모 자식, 형제자매, 친구와 연인이어도 다르지 많을 때가 많다. 하물며 사회적 관계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정치과 언론, 기업과 정부는 불가근 불가원이다. 여기에 몸담은 사람들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거나 제 기능을 상실하면 가장 고통받는 건 바로 나, 너 그리고 우리들이다.

고통의 저널리즘을 넘어선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 이영희 선생 이후 대한민국의 언론과 이익 카르텔을 묵인한 건 뉴스 소비자들이다. 빈곤 포르노를 넘어 개인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부여하는 언론은 많지 않다. 김인정 기자는 뉴스 너머의 세상을 본다. 그리고 앵글 밖의 1인치를 고민한다. 언론의 사회적 기능, 공적 역할에 관한 지루한 논쟁과 거리가 멀다. 개인적 소회, 경험으로 체득한 고민이 우리 언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듯하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경찰, 검찰을 포함한 사법부에 대한 신뢰, 언론과 기자에 대한 존중은 남아 있는 게 거의 없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정치혐오만큼 뿌리 깊은 불신과 증오는 권력기관과 언론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자정 능력은 없으나 사회의 공기처럼 중요한 분야를 방치하면 악취가 진동한다. 진영의 문제도 아니고 정치적 신념의 문제도 아닌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회 시스템의 문제다. 구조가 단단하지 못하면 집이 무너진다. 한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은 개인기와 리더십이 아니라 개개인의 비판적 사고에 기반한다. 논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한 개인은 나이, 직업, 성별, 종교와 무관하게 확증 편향에 사로잡혀 단단한 자기 확신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다. 불공정과 몰상식은 세습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목숨 건 사투가 벌어지는 동안 관중들은 자기편만 응원한다. 견제와 균형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냉정한 시선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내로남불 끝판왕들의 설전을 눈여겨보자. 자기 삶의 근본적 문제를 살피려면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대신, 내 안의 편견을 점검하고 이성의 칼날을 벼려야 한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지만 마비된 이성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

저자는 “목격은 눈으로 직접 보는 일이고, 구경은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일이다. 둘 다 보는 일이지만 목격이 가치중립적이라면, 구경할 때 눈은 흥밋거리와 관심거리를 찾는다.”라고 일갈한다. 구경하는 대중의 음험한 눈길, 팔짱 낀 채 외면하거나 관음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순간 그 결과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온다. ‘영원히 움직이는 텍스트’를 꿈꾸는 저자에게 응원과 박수를 보내는 대신 이렇게 고통스런 텍스트를 소비하는 각자의 태도를 점검할 시간이다.

늘 정확한 질문을 하고 싶었다. 둥글게 휜 포물선처럼 선명한 흔적을 남기며 날아가, 깔끔하게 과녁을 맞히는 질문. - 26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뜻밖의 미술관 - 생각을 바꾸는 불편하고 위험한 그림들
김선지 지음 / 브라이트(다산북스)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선지는 ‘인간은 무엇일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 이 물음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라는 말로 이 책의 프롤로그를 시작한다. 그림책이다. 예술은 인간과 사회를 빗겨 나간 자리에 놓인 특별한 대상이라는 착각. 작품마다 내뿜는 아우라에 눈이 부셔 관객의 생각과 감정을 누군가가 대신 설명해 줄 거라는 혼란. 아마 이런 몇몇 편견 때문에 그림 읽어주는 사람들이 등장한 게 아닌가 싶다. 아니, 그런 분들의 혜안을 빌려 빛과 그림자, 형태와 색채를 조금 더 오래 지켜보는 지도 모르지만.

개인의 취향이겠으나 사랑 운운하며 감정을 쏟아내는 그림 에세이에 부정적 반응이 심하다. 예술은 대개 한 인간과 사회의 현실과 이상 혹은 꿈과 무의식의 경계에 놓인다고 믿는다.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은, 혹은 어느 한 편에 완벽히 호응하는 작품이야말로 관객들의 갑론을박을 이끌어내는 문제작인 경우가 많다. 이진숙의 『인간다움의 순간들』과『위대한 고독의 순간들』이 인문학적 사유로 잘 차려진 성찬이라면 김선지의 『뜻밖의 미술관』은 맛과 영양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쁠 때 챙겨먹는 간편식 같은 느낌이었다. 한 권 분량의 책을 염두에 두고 쓴 글과 신문 칼럼 등 한 편의 글로 소비될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같을 수 없다. 독자는 취향과 자기 필요에 따라 어느 쪽을 선택하면 그뿐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림에 대한 단편적 지식과 에피소드가 아니라 필자 나름의 ‘관점’과 깊은 ‘사유’가 바탕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 면에서 김선지의 글을 짧지만 분명한 메시지로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책은 크게 ‘명화 거꾸로 보기’ 파트와 ‘화가 다시 보기’ 파트로 나눴다. 예술 분야의 책을 처음 보는 독자가 아니라면 모두 익숙한 그림들이고 기본적인 배경 지식도 갖춰져 있을 터. 중요한 건 그래서 필자는 무엇을 보았다는 건지, 아니면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에 관심이 간다. 김선지는 얼굴이 하얀 예수가 이상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고다이바는 정말 나체로 말을 타고 마을을 돌았을지, 황금비는 정말 아름답게 보이는지, 비너스의 모델은 매춘부가 아니었을지 살핀다. 고증을 거쳐 나름의 근거를 제시한 이야기가 신선하다. 물론 익숙한 이야기도 있다. 모두 처음이라서가 아니라 그림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재미를 가지라는 권유다. 당연히 예술도 아는 만큼 보인다. 작품은 묻는 만큼 답한다.

“예술은 인간의 삶과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저자의 생각은 역사 전공자로서 세계에 대한 인식 틀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인간과 세상을 떠난 예술은 불가능하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부터 인공지능이 그려낸 그림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축적된 지식과 정보, 꿈과 욕망, 무의식과 환상을 드러낸 작품일지라도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서 그 의미를 읽어낼 수 있으며 예술가의 의지와 작품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고 믿는다. 미적 기준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시대마다 빠르게 변한다. 새롭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빚어낸 신선함이나 놀라운 상상력으로 창조한 산업 디자인은 자본주의 시대의 예술과 신제품의 경계를 허물기도 한다. 우리가 즐기는 세상이 그대로 놀라운 창조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간혹 미술관을 찾는 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떠나는 추억 여행이다. 인류가 걸어온 길, 먼 옛날의 추억이 내 기억 속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다. 혐오와 증오가 시대 정신이 된 건 아닌지 혼란스런 시간을 지나고 있다. 정답을 가진 자들의 목소리가 드높다. 네가 틀렸다는 아우성에 귀가 아프다.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무언가가 조금 보일 수도 있을까. 날마다 새로울 순 없어도 가끔 고개를 들고 지는 해를 바라볼 때 어제와 다른 노을이 아니라 처음 만나는 절멸의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완벽한 어둠이 존재하는 세상에 대한 그리움. 아직 때가 아니라면 조금 더 기다리더라도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전의 아우라에서 벗어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인류 문학의 거장 마르셀 프루스트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기 전에 사전 정보를 최대한 차단하고 오로지 텍스트 자체에 몰입하는 즐거움을 맛보려고 노력한다. 현대 문학과 달리 고전은 두 가지 시점으로 바라본다. 첫 번째는 ‘당대성’이다.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얽힌 사회, 역사적 배경과 문화, 사상적 토대가 고전을 이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둘째는 ‘현대성’이다. 지금-여기here and now에서 살아가는 나의 관점이다. 이해와 공감, 재미와 감동은 문학의 가장 큰 효용이지만 내가 즐길 수 없다면 굳이 책장을 넘길 필요가 없지 않을까.

지극히 사적인 허구적 자서전 또는 자전적 소설이라는 생각이 편견에 불과하다는 걸 확인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과 유대인 배척주의, 드레퓌스 사건 등은 당대에 가장 첨예한 사회적 이슈였다. 한 사회의 가치판단, 집단적 무의식은 오랜 전통과 문화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지향점,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로 판가름 난다. 프루스트가 어떤 이념적 지향점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소설은 아니다. 다만 무엇을 쓸 것인지, 또 어떻게 쓸 것인지에 관한 거대한 자전적 작품론 혹은 작가론으로 읽히는 건 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이 갖는 형식과 내용 때문이다.

1부 ‘스완 부인의 주변’은 파리 샹젤리제의 겨울이 배경이다. 화자의 유년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스완 부인을 바라보는 관점, 질베르트에 대한 사랑 이야기다. 2편 ‘고장의 이름-고장’은 발베크의 여름이 배경이다. 1부에서 작가 베르고트가 화자의 글쓰기 혹은 작가로서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면 2부에서 화가 엘스티르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관점에 따라 세상은 달리 보이는 게 아니라 인상파 화가는 ‘빛’에 의해 보이는 대상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냐고 묻는 듯하다.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이 질베르트와 어떻게 달라지지,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이행하는 과정,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스완과 귀족을 상징하는 게르망트와의 관계 혹은 대립은 1800대 후반 프랑스로 대표되는 유럽을 벨 에포크가 아닌 조용한 변화와 갈등의 시대라고 역설하는 듯하다. 물론 철저하게 그리고 지극히 사적인 기억 혹은 추억 속에서 반추하는 방식을 선택한 프루스트의 독특한 서술과 묘사, 어마어마한 만연체 문장, 사건과 감정에 대한 표현은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볼 수 없는 독창성과 개성을 드러낸다. 문체가 곧 작가다. 그런 면에서 프루스트의 아우라는 곧 문체에서 나온다고 느꼈다.

신흥 부르주아 vs 전통 귀족 계급의 갈등과 대립의 서사의 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거대하고 지루한 문체에 함몰된 독자가 읽어내는 것은 베르뒤랭 부인과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차이가 아니라 전기와 전화가 보급될 19세기말 유럽 사회를 바라보는 프루스트의 고현학이다. 콩브레에서 샹젤리제를 거쳐 발베크에 도착한 프루스는 유아에서 소년으로 그리도 이제 청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자기 삶의 주체로 홀로 선다. 인상파 화가로 등장하는 엘스티르는 “원인부터 설명하지 않고 우리 지각이 받아들이는 순서에 따라 사물을 제시”한다는 말로 자신의 세계관을 설명한다. 그것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관점이 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 혹은 선택과 판단이 혼란스럽게 뒤엉킨 세상에서는 ‘인식’보다 ‘지각’이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교집합은 아닐까 싶었다. 인상파의 명암대비가 세계를 당시 세계를 보는 유럽인의 눈이었다면 또 다른 관점으로 대상의 본질을 포착하는 화가도 있었으나 결국 프루스는 인상파의 위대함이 ‘시간’ 속에 숨어있다고 판단한 건 아닐까. 시시각각 변하는 시간의 흐름이 곧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2편은 그렇게 ‘시간’이라는 주제와 꽃과 소녀들의 대비를 통해 프루스트의 화양연화 혹은 자기 삶의 벨 에포크 시대를 그려낸 건 아닌지 모르겠다.

10년 동안 번역에 매달린 프루스트 전공자 김희영은 해설에서 “작가의 창조적 자아는 그 도덕적 인격이나 겉모습, 즉 사회적 자아와는 다르다는 명제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소설이라고 평가한다. 스완과 오데트, 베르고트와 엘스티르, 질베르트와 알베르틴 혹은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추억은 철저한 주관적 변용을 통해 재해석된다. 그러나 당대를 함께 했던 실존 인물과 현실은 관계 형성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을 등장시켜 사건과 사고를 설명하거나 이것이 그대로 문학적 알레고리로, 때로는 웅숭깊은 은유로 발현되는 것은 프루스트 읽기의 또 다른 재미이자 진입장벽으로 독자들에게 깊이 읽기를 강요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크레이프 케이크를 떠오르게 한다. 1편 「스완네 집 쪽으로」와 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4권을 읽은 후의 감상이겠으나 정성스레 켜켜이 쌓아 올린 시간의 질감을 느끼게 한다. 똑같은 층위의 반복일지라도 또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든다. 아직 멀고 긴 시간 여행이 기다리고 있겠으나 7편의 소설이 따로 또 같이 읽혀도 무방하다. 어차피 한 인간의 일생도 찰나에 불과하며 어떤 시간의 단면도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하지 않는가. 사랑과 이별과 망각의 고통이 이 작품의 주된 리듬이라면 이제 겨우 사랑과 이별의 크페이프 한 조각을 시식했을 뿐이다. 읽기는 어려우나 여운은 길고 입맛은 몸에 남을 듯하다. 아주 오랫동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