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넝쿨이 뒤덮인 낡은 건물 같은 인간 그레고리우스. 후줄근한 옷과 벗겨진 머리에 고도 근시로 시계처럼 정확한 일상의 루틴은 골이 따분하다. 고전 문헌학자가 언어에 쏟는 예민함은 다른 감각을 무디게 한 것일까. 비 오는 날 그녀를 만난 ‘우연’이 삶에 균열을 일으키는 트리로 작동하면서 ‘문두스’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고 떠난다. 독자들은 자연스레 그녀가 남긴 전화번호가 600쪽이 넘는 장편을 읽는 내내 언젠가 등장할 거라고 ‘기대’한다. 대개 욕망은 스스로 끓어오지만 타인 혹은 외부 세계의 자극으로 발현된다. 히치콕이 노린 맥거핀MacGuffin 효과를 기막히게 차용한 작가의 솜씨에 놀란 게 아니라 로맨스 소설일 거라는 선입견만 생긴 거 같아 뒷맛이 쓰다. 클리셰를 파괴하는 클리셰로 활용했다면 어땠을까. 기막힌 반전이나 놀랄만한 결말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긴 장편을 읽는 동안 독자에게 챙겨줄 기프티콘이나 무료 이모티콘 이벤트 정도는 준비했으면 어땠을까. 도입부의 주목할 만한 장면 이후에 소설은 인간과 삶에 대한 부조리를 성찰한다. 기록 vs 기억, 여행자 vs 향수병, 리스본 vs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대결과 갈등은 프라두의 과거와 그레고리우스의 현재 시점을 오가며 끊임없이 이상 vs 현실을 묻는다.
『파리 대왕』이나 『동물농장』 혹은『이솝우화』는 거대한 알레고리로 선악과 인간 본성을 구체화한다. 고도 근시의 안경 교체로 인한 프레임 전환은 새로운 관점으로 새로운 세상을 본다는 점에서 낯설지도 새롭지도 않지만 생존 인물의 기억을 통해, 그들의 시점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또 상징적이다. 오래된 소설적 장치들 이를테면 은유와 상징, 알레고리로 엮인 액자 구성은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던 김영호의 외침과 다를 바 없는 과거 회귀형 인물과 원점 회귀형 공간 구성으로 버무려져 마치 영화 제작을 염두에 둔 소설처럼 곳곳에 다양한 장치들이 혼재한다.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건 복잡하고 난해하여 해석의 다양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표면적으로 단순해 보이는 서사구조에 숨겨 놓은 재미와 의미를 독자마다 다르게 해석해도 좋다는 뜻일 게다. 이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는 ‘경멸에서 오는 외로움’, ‘신뢰에서 오는 협박’, ‘멜랑콜리’와 추상적 개념과 언어에 대한 천착이다. 그녀가 “포르투게스Português.”라고 소리 내어 발음하지 않았다면 그레고리우스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지 않았을까. “‘오’는 ‘우’처럼 들렸고, 올리면서 기묘하게 누른 ‘에’는 밝은 소리를 냈다. 끝의 무성음 ‘스’는 실제보다 더 길게 울려 멜로디처럼 들렸다. 하루 종일이라도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라는 독백은 시니피앙signifiant이 시니피에signifié 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며, 시니피앙의 효과에 의해 시니피에가 만들어진다는 라캉의 주장을 증명한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포르투케스’가 결국 그레고리우스를 프라두에게 이끈다.
잊어버렸던 호메로스의 단어 ‘리스트론’은 홀 바닥을 청소할 때 쓰는 쇠 밀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던 철학자의 말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의 자의적 해석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고 지적했던 비트겐슈타인도 다르지 않다. 프라두가 남긴 텍스트는 오롯이 되살아나 현재화되고 무덤 속의 프라두와 고레고리우스의 삶에 나타나 칼 융의 ‘동시성synchronicity’을 극화했다고 하면 지나치다 할 것이나 어차피 오독이 독자의 특권이라고 우겨봄직도 하다. 철학자 페터 비에리의 『자기 결정』이나 『삶의 격』을 읽고 철학자의 또 다른 페르소나 파스칼 메르시어가 쓴 『언어의 무게』까지 살펴본 분들의 열정이 놀랍기만 했다. 독서 모임의 목적이 무엇이든 각자의 관점과 해석이 부딪치고 충돌하는 장면만큼 재밌는 지점은 각자의 확장성이다. 영화조차 보지 않은 나와 달리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신 분들의 이야기는 모임을 이어가는 가장 큰 이유다.
영화의 남주와 여주 이미지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작위적인 소설 장치들에 대한 비판도, 프라두의 직업인 의사와 아버지의 직업인 판사의 직업적 윤리 의식에 대한 견해 그리고 ‘도덕적 허영심’이라는 표현과 의견들이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지점들이었다. 소설은 2004년 스위스 베른 시 키르헨펠트에서 시작되지만 포르투갈 리스본이 주 무대다. 살라자르 정권 당시 포르투갈 저항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부족해서 아쉬운 건 개인적 소회일 뿐. 이스타두 노부Estado Nobo(1933년부터 1974년까지 지속된 포르투갈의 비민주적 정치경제체제)를 배경으로 펼쳐진 과거와 현재의 대비가 아니라 프라두라는 개인의 서사로 풀어낸 점은 못내 아쉽다. 철학자에게 소설은 쉽게 풀어쓴 연구 보고서가 아니었을까. 목적이 무엇이든, 개별 독자가 어떻게 읽었든 모임에 참석하는 대신 리스본으로 떠난 분과 소설을 읽고 기차를 타고 온 분, 울릉도로 떠나 독도 소주를 마셨다는 분들의 뒷이야기가 더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