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질문들 - 현대 과학의 최전선
이명현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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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말은 지나칠까.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습관적으로 숨을 쉴 뿐일까. 들여다 볼 분야와 대상은 점차 늘어간다. 단순한 호기심과 관심을 넘어 사람들이 움직이는 목적,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이 궁금하다. 기본적으로 문학과 역사와 철학이 바탕이라고 하지만 과학과 예술은 응용 분야가 아니다. 한 분야에 천착한 사람들의 성과와 눈부신 성과도 좋지만 “동시대성을 이야기하면서 과학을 빼놓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아니, 과학을 이야기해야만 동시대를 호흡하고 향유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과학을 이해하는 것, 과학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 더 나아가서 과학을 누린다는 것이야말로 현대적이 동시대적인 태도이자 삶의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지금부터 2,600년 전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주장했다. 엠페도클레스가 ‘물, 불, 흙, 공기’라고 발전시킨 생각도 먼 옛날의 돌도끼를 던지던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인류 문명발달의 척도는 과학이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알기 어려운 분야도 있고 한동안 벽에 부딪쳐 머물러 있는 분야도 있다. 『궁극의 질문들』은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과학의 첨단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인터넷 이전과 이후의 인간은 사고방식은 물론 삶의 태도까지 전혀 다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서 길을 잃은 애매한 세대의 기준을 마이클 해리스는 1985년생으로 잡는다. 이전에 태어난 세대의 혼란과 아날로그의 추억은 적응을 더디게 하지만 이후 세대는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디지털, 인터넷 맞춤형 인간으로 세상을 산다. 이들의 축복을 나는 ‘지식의 일반화와 대중화’로 표현한다. 15세기 활판 인쇄술이 종교개혁을 이끌어 중세의 벽을 무너뜨렸다면 21세기 인터넷은 지식의 독점과 권력을 형해화해버렸다. 피터버크는 『지식은 어떻게 탄생하고 진화하는가』에서 ‘지식의 절반은 어디서 찾으면 될지 아는 것’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18세기 영국 시인이자 평론가 새무얼 존슨이 친구 보스웰에게 말했듯이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어디서 관련 정보를 찾을 수 있는지 아는 것이다. 한 주제를 조사하려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해당 주제를 다룬 도서 찾기다. 이는 도서 목록을 보거나 도서관의 책 표지를 살펴보는 과정으로 이어진다.”라고 진단했다. 19명의 저자를 통해 각 분야에서 관련 정보를 얻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과학의 최전선에서 각자의 분야에 몰입하는 연구자들의 이야기는 그대로 인류의 최대 관심사일 것이다. 우주, 생명, 행성뿐 아니라 통계 물리학, 네트워크 과학, 인공지능 등 전통 과학에서 첨단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의 독서 습관과 입맛을 고려한 책이다. 그 장점은 그대로 단점이 된다. 서너 쪽 분량의 짧은 글들은 잘 차린 뷔페가 아니라 시식 코너의 맛보기에 불과하다. 본문 200쪽이 안 되는 분량에 19가지 주제를 담았으니 깊이를 포기하고 넓이를 확보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래도 읽는 행위를 통해 ‘관련 정보’를 확인하고 그 고리를 연결하는 작업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입자물리학, 양자역학, 진화론, 기후위기, 통섭, 코로나 시대의 종교 등의 주제는 과학이 연구자의 실험실이 아니라 세상 밖으로 나와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명현의 서론처럼 과학에서 최전선, 궁극이란 결국 인간의 삶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생각보다 빠르게 변한다. 느낄 겨를도 없이 지나가는 계절처럼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순식간에 달라진다. 기술발달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일반인을 위한 교양으로서 과학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세상의 흐름과 맥락을 파악하기 위한 과학에 대한 설명으로는 충분해 보인다.

교양이라는 말이 사라진 시대다. 책이 아니면 지식과 교양을 얻기 어려운 시대를 지났으니 교양에 대한 새로운 의미 부여가 필요하겠다. 예술적 감수성, 인문학에 대한 이해, 과학적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 어느 시대인들 환영받지 못할까마는 누구나 고급지식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에는 오히려 지식과 교양을 내면화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 근사한 포장지로 사용되거나 보여주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교양이 오히려 귀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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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과학이 필요하다 - 거짓과 미신에 휘둘리지 않고 과학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힘
플로리안 아이그너 지음, 유영미 옮김 / 갈매나무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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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요즘처럼 헷갈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과학의 세계를 여행하며 마주치는 중요한 생각들은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보도록, 세상에 쉽사리 속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 14쪽

‘불신과 혐오를 넘어설 지적 모험을 시작하며’라는 제목을 단 프롤로그 첫 문장이다.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우리 편은 선이고 저쪽 편은 악이라는 이분법이 판친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정치, 사회뿐만 아니라 가정, 직장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기 생각의 논리와 패턴, 오류와 허점을 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개인적 이해득실, 정파적 세력 다툼으로 침묵의 카르텔이 작동한다. 그 공고한 현실 앞에서 과학은 과연 증오와 갈등, 불신과 혐오를 넘어설 도구를 제공할 수 있을까.

과학저널리스트이자 물리학자인 플로리안 아이그너는 “과학은 우리가 모두 함께 신뢰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가는 활동”이라고 선언한다. 서로 다른 상식, 각자의 기준, 높낮이가 다른 관점은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작동한다. 누구나 신뢰할 만한 진리, 모두가 합의한 질서,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원칙이 존재한다면 인류사회의 갈등과 전쟁은 훨씬 줄어들지 않을까. 도덕의 최소한이 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정교한 논리와 내적 정합성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법을 이용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이다.

과학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수학에 기초한 명징한 과학의 세계가 그 어느 분야보다 확실하고 분명한 정답을 제시할 것 같지만 과학자의 태도와 방법에 따라 숱한 오해와 착각만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플로리안 아이그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과학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한다. 과학 대신 직감을 믿을 수는 없다. 라마누잔의 직관이 수학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활용한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하지만 대개 과학은 인간의 삶을 여기까지 이끌어 온 가장 정교한 사고체계에 해당한다.

생각하는 힘을 길러 세상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관찰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폭을 넓히기 위한 과학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저자는 이 책을 과학에 대한 사랑 고백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과학 자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가 곳곳에 묻어난다. 그 대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글은 자연스럽게 독자의 관심을 유도한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설명도 중요하지만 이성과 논리, 합리적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오히려 애정과 관심도 필요하다. 힐베르트, 버트런드 러셀, 헴펠, 러커토시 임레, 토머스 쿤,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학자들을 등장시켜 이들의 과학적 태도와 방법이 세상을 어떻게 조금씩 바꿔왔는지 설명하는 부분들이 인상 깊다. 인류사회에 공헌하기 위한 원대한 꿈을 안고 과학자가 되는 이는 드물다. 정교하고 명징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로 시작해서 맹목적 믿음과 애매한 추측을 걷어내는 과정에 매혹된 사람들이 과학자다. 나름의 이유로 과학에 입문하고 자신의 연구에 몰두한 결과물이 세상을 조금 나은 곳으로 만들어왔다. 다만 저자가 주목한 것은 위대한 성과물이나 천재들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 과정에 필요한 과학적 사고의 중요성이다.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열린 자세, 반증 가능성을 동반한 과학 이론,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은 인간과 세상의 숨은 비밀들이 주된 관심사다.

학창시절, 겨우 세상에 눈뜰 무렵 문과와 이과로 나뉘고 다시는 그 벽을 넘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야 하는 교육제도 탓은 아니겠으나 합리적 사고, 과학적 태도가 익숙하지 못한 문과형 인간들이 세상을 주도하는 난장판에 이성에 바탕을 둔 논쟁이 오가고 논리적 근거를 앞세운 대안들이 제시될 수는 없을까. 저자가 말하는 우리에겐 과학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론과 지식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을 판단하는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를 돌아보라는 충고다. 열린 자세로 경청하고 자기 생각과 행동이 변할 수도 있다는 여지가 남아 있다면 우리 앞에 생이, 저기 저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자신을 바꾸라는 충고는 이기적 기회주의자로 살라는 조언과는 결이 다르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기에 그들보다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습니다. 거인의 어깨 비유는 과학의 발전을 설명할 때 애용되는 비유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발을 디딘 거인이 그리도 커보이는 것은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의 어깨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거인은 없고, 서로 키가 다른 난쟁이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피라미드만 있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 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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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4-22 1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이 읽기 좋게 정갈하시네요. 잘 읽고 갑니다.

sceptic 2022-04-23 09:06   좋아요 1 | URL
별말씀을요.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제니 오델 지음, 김하현 옮김 / 필로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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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산텔라는 “일을 미루는 사람이 그러듯이 결코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한 가지 일에서 등을 돌려 다른 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일은 차츰차츰, 조금씩 진행될 뿐이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지식을 손에 넣고 욕망을 채울 수 있으리라.”(『미루기의 천재들』)는 말로 세상의 모든 미루기의 천재들을 빙자한 게으름뱅이에게 용기를 주었다. 일찍이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가 주장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자본주의형 인간의 탄생을 예고했음이 틀림없다. ‘개미와 베짱이’는 모든 게으른 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베짱이처럼 굶어 죽을 처지라는 극단적 사례가 아니라면 우리는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피땀 흘려 일해야 하는가. 욕망의 크기를 줄이고 삶의 방법과 태도를 바꾸면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리지 않을까. 고대 철학자들이 말한 행복의 조건과 현대인의 행복은 그 결이 다를까. 관습적 사고를 깨뜨리는 제목을 달고 등장하는 수많은 도발적 책들을 가끔 집어 든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류의 책은 보지 않았으나 각종 배신 시리즈와 전복적 사고를 유도하는 책은 마다할 이유가 없다. 깊이와 넓이가 어느 정도 확보되어 주관적 편향에 흐르지 않는다면 저자의 경험과 생각의 조각들은 대체로 밴드왜건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수도 있다. 생각 없이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오래된 금언이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믿는 수많은 헛똑똑이를 위해 이런 종류의 책은 멈추지 말고 정수리에 찬물을 들이붓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게 열심히 살 필요가 있나?”라는 깨달음은 촌각을 다퉈 ‘노오력’의 끝을 본 사람이 뱉을 수 있는 질문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예측하고 추론만으로 진리를 확신할 수는 없다. 하루 3시간만 일하면 충분하다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나 인류의 역사는 노동 시간 단축의 역사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리오 휴버먼에게 현대인의 삶은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기계적 노동자, 중세의 농도의 삶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내세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자발적 노예로 살아가기 쉽다. 자본주의 욕망과 가상세계의 밈들이 현대인의 뇌를 점령한지 오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천정에 자기 망상을 투영하거나 방바닥에 엎드려 장판을 디자인하는 법과는 거리가 멀다. ‘열심히’ 안 해도 ‘잘’하면 되는 나이와 위치가 되는 일의 기쁨과 슬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무언가 계속하고 있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제니 오델의 데뷔작은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매력적이다. 누가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그 치열함으로 부와 권력이 나눠진 시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더구나 현대인의 하루,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에 노력과 열정이 빠져 좌절하거나 실패하는 경우도 드물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손바닥 안에 네모난 화면을 들여다보면 그 어떤 환각제보다 강렬한 세상이 펼쳐진다. 욕망을 자극하고 쾌락을 주며 웃음과 눈물을 창조한다.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지 않은가. 그게 좋으면 그만인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이라는 말은 일시적으로 소비될지언정 변화를 일으킬만한 트렌드로 자리잡긴 어렵다.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공원에 앉아 새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꽃이 지고 바람이 부는 계절을 느끼는 일은 대개 일시적 휴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루하루 우리 삶을 돌아보면, 그 시간이 누적되어 자기 인생이 된다고 해도 괜찮은가. 왜 다르게 살 순 없을까. 정말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고,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저자는 독자를 다그치지 않는다. 조용한 목소리로 쓸모없음의 쓸모에 생각해보라고 속삭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 자리에서의 저항”이며, 이는 곧 “스스로를 자본주의적 가치 체계에 쉽사리 이용당하지 않는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다. 자기만의 저항법은 매우 중요하다. 각자 선 자리가 다르다. 바틀비처럼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 삶을 단단하게 지켜내려는 저항은 그 자체로 숭고하다. 저자는 상업적 소셜 네트워크, 즉 관심 경제에 관심을 집중한다.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을 특징짓는 여러 가지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관심 경제다.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한 시대를 살면서 그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개인적 성공과 성취가 어떠하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긴 매우 어렵다. 생산성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 저항, 유지, 회복, 돌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다. “악당은 상업적 소셜미디어의 침략적 논리이며, 이득을 취하려고 우리를 불안과 질투, 산만한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소셜미디어의 금전적 동기다. 더 나아가 악당은 이러한 플랫폼에서 자라나 오프라인의 자기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사고방식에 악영향을 미치는 개인주의와 퍼스널브랜드 숭배다.”(20쪽)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다.(15쪽) 바쁜 일상에서 잠시 맛보는 휴식은 달콤하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재충전하는 시간도 소중하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만들어 가는 건 자기 자신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사치도, 시간 낭비도 아니다. 오히려 의미 있는 생각과 발화의 필수 요소다. 자기 삶의 소중함을 자각하는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세상의 기준과 세속적 성공에서 벗어나 조금 다른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태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획일적 욕망을 꿈꾸는 세상에서 무지개처럼 다양한 빛깔로 살아가는 건 멋진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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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_소설 해시태그 문학선
김지은.이광호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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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팔아야 하는 건 출판사의 숙명이다. 팔리지 않는 책을 만들 수도 없고, 안 팔리는 책을 좋은 책이라고 자위할 수도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은 하나의 상품이며 기획과 제작 마케팅과 유통 과정에서 다양한 이미지로 각색되고 전혀 다른 목적으로 소비되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문학 출판사에서 재탕은 음식점의 반찬 재활용과 다른 차원이지만 주제와 형식과 표지 디자인을 갈아 신상으로 출시하는 경우가 많다. 해시태그 문학선도 이와 유사한 상품인데 하나의 주제로 단편소설을 여럿을 묶었다. 요즘 유행하는 주제어를 ‘우리 사회의 첨예한 문제의식들의 결정체’라는 말로 포장하고, ‘한국문학의 스펙트럼을 보다 깊게 이해하게 만든다’는 명목을 내세운다. 해설에 해당하는 ‘포스트잇’은 시대 상황과 작가의 특징을 소개한다는 면에서 이해할 수 있으나 ‘생각의 타래’는 이 책의 성격에 의문을 갖게 한다. 토론용 교재로 활용하라는 말인지, 독서 모임용 맞춤 도서인지, 수업용 부교재로 적절하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내용 확인을 넘어 생각의 확장이 아니라 주인공의 심정과 의도를 유도하는 질문들에 반감이 생긴다. 감상과 수용은 독자의 몫이니 엮은이는 그냥 빠지세요, 라고 일부러 마음속으로 툴툴거렸다. 독자의 반응까지 원하는 대로 끌어내고 싶은가.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 마련된 중고용 학습 교재가 아니라면 이런 발문은 득보다 실이 크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해시태그 문학선 『#젠더_소설』에는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 백신애의 「적빈」, 오정희의 「유년의 뜰」, 박완서의 「겨울 나들이」, 최윤의 「하나코는 없다」,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 배수아의 「프린세스 안나」,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 모아놓은 단편들은 한국문학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소중한 작품들이다. 작가의 면면이나 작품의 무게가 남달라 모두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는 놀랍게도 백신애, 배수아의 작품을 빼고는 모두 읽은 작품이다. 단편의 특성상 읽고 잊는다. 장편과 달리 소설집은 망각의 속도가 더 빠르다. 읽는 재미와 속도가 다르지만 장편과 다른 식으로 소비되고 기억되는 모양이다. 기시감을 느끼며 다음 장면이 생각날 듯 말 듯 결론이 기억나기도 하고 군데군데 처음 읽는 느낌이고. 시와 달리 소설은 재독을 하지 않는 버릇 때문일 수도 있으나 시대별 흐름의 작품 배치의 의도가 보이지만 ‘젠더’의 관점이 어떤 식으로 이동했는지 구별하는 재미도 있다. 처음 읽는 「적빈」은 이 책의 첫 작품이면서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1920~30년대 한국 소설의 주제어는 일반적으로 ‘가난’과 ‘죽음’으로 요약된다. 근대소설의 태동기에 식민지 현실에 대한 자각, 농경문화에 바탕을 둔 묘사, KAPF를 중심으로 한 이념 논쟁 등 한국문학사는 불행하게도 자유분방한 문학적 상상력이나 다양한 형식적 실험보다 ‘현실’의 도구와 ‘순수’ 문학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물론 이 자리에 ‘여성’이 놓일 자리는 없다. 그래서 백신애의 단편이 도드라지게 빛난다.

피난지 유년 시절을 술회한 오정희 「유년의 뜰」은 애잔하고, 아내와 사별한 남편과 딸의 모습을 보고 여행을 떠난 박완서의 「겨울 나들이」는 가슴이 시리며,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태도와 시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최윤의 「하나코는 없다」는 본격적으로 현대 여성들의 고민과 ‘젠더’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기 시작한 시대를 감지한다. 식물이 되어가는 아내를 묘사한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는 여성의 수동성, 식물성에 대한 탁월한 메타포가 돋보이며, 배수아의 「프린세스 안나」는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의 모습을 건조하게 드러내며,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는 유명세에 값하는 발랄한 문체와 감각적 묘사로 두 여성을 통해 개인적이고 내밀한 심리를 통해 젠더 문제를 일반화한다.

소설에서 인물과 사건은 거대한 알레고리로 기능한다. ‘젠더gender’를 표면에 내세우지 않아도 시대의 단면을 드러내고 구체적인 사건이 모여 거대 담론으로 나아간다는 면에서 생물학적 ‘성sex’ 문제는 우리 모두의 고민이다. 풀어야 할 숙제이며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다.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뚜렷한 지향점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각각의 목표와 방향이 다르고 남성과 여성의 이해가 달라 단기간에 해결될 수도 없다. 그러니 무조건 속도 조절을 하자는 말이 아니라 영원히 ‘합의’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누군가의 용기와 누군가의 배려, 또 누군가의 결단이 모여 세상이 조금씩 바뀌었다. 그 중요한 변곡점에서 여성인 소설가들의 여성 주인공들이 모여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프고 저릿하다. 단순한 고통과 슬픔의 차원을 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소외’를 담고 있다. 그들은 우리들의 어머니이자 딸이며 아내이자 연인이다. 그래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젠더’는 바로 눈앞에 현실이며 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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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한 줄 사회학 EBS CLASS ⓔ
노명우 지음 / EBS BOOKS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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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쓸 시간이 없어 길게 쓴다는 어느 작가의 한 마디가 빛나듯 속담은 공동체의 지혜를 함축한다. 오랫동안 구전되어 갈고 다듬어져 대구와 리듬이 생기고 기억하기 좋고 전달하기 쉽다. 민족과 국가마다 유사한 속담을 볼 때마다 인류의 삶은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때도 많다. 지역과 인종과 무관하게 인간의 속성은 문명발달의 속도에 맞춰 달라지지 않는다. 한 사회의 집단지성이라 할 만한 속담은 사회학자에게 매력적인 연구 대상이다. 노명우처럼 대중 속으로 걸어 들어가 함께 호흡하며 현장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사회학자에겐 더욱 그렇다. ‘한 줄 사회학’은 ‘속담 사회학’이다. 단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뼈를 때리는 촌철살인. 한마디로 담아낼 수 없을 때 말과 글이 길어진다. 한 편의 시와 한 권의 시를 비교할 수 없으나 그 감동과 무게와 부피를 분량으로 가늠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노명우의 거의 모든 책을 읽고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동어반복과 일관된 관점의 혼돈이 없다. 지적 과잉으로 흐르지 않고 새로운 정보과 관점의 변화가 참신하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애정과 따스한 눈길이다. 무엇보다도 현학적이지 않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찰하고 생각하고 다듬은 생각들에 대체로 ‘공감’하기 때문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부모님을 통해 한 시대와 사회를 보고,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세상 물정을 엿볼 수 있는 노명우의 이야기는 편안하게 읽히지만 한참 고민하며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예를 들어, 존 던(John Donne)의 「사람은 섬이 아니다」에서 언급한 대도시적 무관심이 어빙 고프만의 예의 바른 무관심과 유사한 개념이지만 현대인에게 양면의 칼날처럼 활용될 수 있음을 환기시킨다. 자기방어 매커니즘은 타인의 개입을 거부하는 시스템이다. 허용적 태도와 무질서 사이에서 길을 잃고, 질서와 규정은 권리와 의무를 돌아보게 한다. 둘 이상 모이면 갈등이 생기는 법이다. 인간은 모두 다르다. 생각도 감정도 판단도 선택도 태도도 행동도 제각각이다. 그들이 모이면 최소한의 룰을 정하기 마련이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며 문화와 관습이 만들어진다. 그것을 통해 세상이 돌아가는 한 줄 속담이 생기기 시작한다. 시간을 견뎌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속담은 너무 많다. 노명우는 그중 열두 개를 골랐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에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한다’까지 누구나 알고 실제 생활에서도 사용하는 속담들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지방선거가 다가오는 요즘 다시 생각해 볼 속담이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주인이 받는다’는 속담에서 플랫폼 노동과 그림자 노동을 읽어내고,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에서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속담 하나하나가 모두 지금-여기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와 닿아 있다. 현재적 유용성이 없다면 어떤 속담도 활용되거나 전해지지 않을 테니 당연한 일이겠으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도 인간 사회가 드러내는 욕망과 검은 속내가 그리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입맛이 쓰다.

인스타그램에는 불행이 없다. 밴드왜건 효과를 거두는 인플루언서를 통해 견물생심, 박탈감이 계속되고 1초도 멈추지 않는 비교, 비교, 비교...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우리는 상대적 빈곤에 허덕이는 시대를 살고 있다. 노명우는 디지털 디톡스, SNS 디톡스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과연 가능할까. 그 도구와 방법은 무엇일까.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세상을 사는 것은 멋있어 보이지만, 사실 주류를 거슬러 사는 ‘인디적’ 삶은 결코 쉽지 않다. 웬만한 자신감이 없으면 자기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세우고, 자신만의 원칙을 따르며 선택하고 결정하고, 다른 사람이 세상을 사는 방식에 흔들리지 않고 “My Way”를 걸어갈 수 없다. 이어서 노명우는 “모방은 우리가 행동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갖게 해주고, 지금까지 이루어진 동일한 행위들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단단한 토대 덕분에 현재의 행위는 스스로 이루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부터 해방된다.”(게오르크 지멜,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56쪽)라고 말한다. 모방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My Way”를 걸어갈 수 있을까. 각자의 판단과 각자의 노력이라고 말하기엔 무책임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인생은 어차피 자신의 몫이다. 우리가 사회학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거시적 안목에서 전체를 보고 나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 후 삶의 태도와 방향을 바로 잡기 위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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