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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_소설 ㅣ 해시태그 문학선
김지은.이광호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2월
평점 :
책을 팔아야 하는 건 출판사의 숙명이다. 팔리지 않는 책을 만들 수도 없고, 안 팔리는 책을 좋은 책이라고 자위할 수도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은 하나의 상품이며 기획과 제작 마케팅과 유통 과정에서 다양한 이미지로 각색되고 전혀 다른 목적으로 소비되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문학 출판사에서 재탕은 음식점의 반찬 재활용과 다른 차원이지만 주제와 형식과 표지 디자인을 갈아 신상으로 출시하는 경우가 많다. 해시태그 문학선도 이와 유사한 상품인데 하나의 주제로 단편소설을 여럿을 묶었다. 요즘 유행하는 주제어를 ‘우리 사회의 첨예한 문제의식들의 결정체’라는 말로 포장하고, ‘한국문학의 스펙트럼을 보다 깊게 이해하게 만든다’는 명목을 내세운다. 해설에 해당하는 ‘포스트잇’은 시대 상황과 작가의 특징을 소개한다는 면에서 이해할 수 있으나 ‘생각의 타래’는 이 책의 성격에 의문을 갖게 한다. 토론용 교재로 활용하라는 말인지, 독서 모임용 맞춤 도서인지, 수업용 부교재로 적절하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내용 확인을 넘어 생각의 확장이 아니라 주인공의 심정과 의도를 유도하는 질문들에 반감이 생긴다. 감상과 수용은 독자의 몫이니 엮은이는 그냥 빠지세요, 라고 일부러 마음속으로 툴툴거렸다. 독자의 반응까지 원하는 대로 끌어내고 싶은가.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 마련된 중고용 학습 교재가 아니라면 이런 발문은 득보다 실이 크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해시태그 문학선 『#젠더_소설』에는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 백신애의 「적빈」, 오정희의 「유년의 뜰」, 박완서의 「겨울 나들이」, 최윤의 「하나코는 없다」,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 배수아의 「프린세스 안나」,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 모아놓은 단편들은 한국문학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소중한 작품들이다. 작가의 면면이나 작품의 무게가 남달라 모두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는 놀랍게도 백신애, 배수아의 작품을 빼고는 모두 읽은 작품이다. 단편의 특성상 읽고 잊는다. 장편과 달리 소설집은 망각의 속도가 더 빠르다. 읽는 재미와 속도가 다르지만 장편과 다른 식으로 소비되고 기억되는 모양이다. 기시감을 느끼며 다음 장면이 생각날 듯 말 듯 결론이 기억나기도 하고 군데군데 처음 읽는 느낌이고. 시와 달리 소설은 재독을 하지 않는 버릇 때문일 수도 있으나 시대별 흐름의 작품 배치의 의도가 보이지만 ‘젠더’의 관점이 어떤 식으로 이동했는지 구별하는 재미도 있다. 처음 읽는 「적빈」은 이 책의 첫 작품이면서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1920~30년대 한국 소설의 주제어는 일반적으로 ‘가난’과 ‘죽음’으로 요약된다. 근대소설의 태동기에 식민지 현실에 대한 자각, 농경문화에 바탕을 둔 묘사, KAPF를 중심으로 한 이념 논쟁 등 한국문학사는 불행하게도 자유분방한 문학적 상상력이나 다양한 형식적 실험보다 ‘현실’의 도구와 ‘순수’ 문학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물론 이 자리에 ‘여성’이 놓일 자리는 없다. 그래서 백신애의 단편이 도드라지게 빛난다.
피난지 유년 시절을 술회한 오정희 「유년의 뜰」은 애잔하고, 아내와 사별한 남편과 딸의 모습을 보고 여행을 떠난 박완서의 「겨울 나들이」는 가슴이 시리며,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태도와 시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최윤의 「하나코는 없다」는 본격적으로 현대 여성들의 고민과 ‘젠더’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기 시작한 시대를 감지한다. 식물이 되어가는 아내를 묘사한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는 여성의 수동성, 식물성에 대한 탁월한 메타포가 돋보이며, 배수아의 「프린세스 안나」는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의 모습을 건조하게 드러내며,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는 유명세에 값하는 발랄한 문체와 감각적 묘사로 두 여성을 통해 개인적이고 내밀한 심리를 통해 젠더 문제를 일반화한다.
소설에서 인물과 사건은 거대한 알레고리로 기능한다. ‘젠더gender’를 표면에 내세우지 않아도 시대의 단면을 드러내고 구체적인 사건이 모여 거대 담론으로 나아간다는 면에서 생물학적 ‘성sex’ 문제는 우리 모두의 고민이다. 풀어야 할 숙제이며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다.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뚜렷한 지향점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각각의 목표와 방향이 다르고 남성과 여성의 이해가 달라 단기간에 해결될 수도 없다. 그러니 무조건 속도 조절을 하자는 말이 아니라 영원히 ‘합의’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누군가의 용기와 누군가의 배려, 또 누군가의 결단이 모여 세상이 조금씩 바뀌었다. 그 중요한 변곡점에서 여성인 소설가들의 여성 주인공들이 모여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프고 저릿하다. 단순한 고통과 슬픔의 차원을 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소외’를 담고 있다. 그들은 우리들의 어머니이자 딸이며 아내이자 연인이다. 그래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젠더’는 바로 눈앞에 현실이며 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