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움의 순간들 더 갤러리 101 1
이진숙 지음 / 돌베개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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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술적 감수성은 인간의 본능에 내재 돼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감수성은 저절로 발현되는 게 아니라 원석에 감춰진 보석처럼 갈고 닦아야 빛이 난다. 예술사, 즉 예술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방법이 작품을 이해하는 초석이다.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감각적 행위는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과 삶에 대한 태도를 반영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겪는 역사적 경험과 철학이 스며들어 인류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존 버거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권했으나 어느 시대에도 기존 방식을 답습하라고 권한 예술가가 있었을까. 때로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재현하려 노력했고 때로는 보편적 미의 원칙을 거부하며 이성보다는 감성과 비합리적 세계를 추구하기도 했다. 예술은 현실 너머 세계를 지향하는 듯하지만 인간의 문제를 넘어설 수는 없지 않은가.

신의 세계를 갈망했던 중세가 저물고 르네상스가 열렸다. 그림자와 원근법으로 무장하며 인본주의humanism는 지금-여기의 인간을 중심에 놓는다. 신과 귀족을 넘어 신흥 부르주아, 광대까지 제3신분으로 대상이 확대되며 미술은 민중 속으로 걸어들어온다. 그림이 미술관에 박제된 건 근대 이후의 일이지만 보편성을 획득하며 누구나 보고 즐길 수 있는 된 건 이중 혁명 시대의 열매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태동하며 근대사회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를 이중혁명의 시대라고 명명한 건 에릭 홉스봄이다. 그가 지적한 대로 이중 혁명을 거쳐 21세기, 오늘을 사는 우리 삶의 틀은 겨우 200년여 년 동안 확립됐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현대인은 고대와 중세, 근대라는 시간을 통과하며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미래는 뭐라 부를지 알 수 없으나 미술사의 한 시기가 아니라 사적 발전 과정으로서 오늘이 궁금하다. 아니, 오늘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과 목적지가 우려될 뿐이다.

프랑스의 라루스 출판사에서 심혈을 기울여 출간한 ‘라루스 미술사-이해와 인식’ 7권(중세미술~현대미술)이 번역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다. 서가 한쪽에 꽂혀 있는 이 라루스 백과사전이 내겐 마중물이 됐다. 본격적으로 예술에 관심과 재미를 갖게 된 건 그림 자체가 지닌 미적 요소보다 도상학에 반영된 시대 정신과 인문학적 지식이었다. 물론 화가의 일생, 세속적 욕망, 정치적 목적이 혼재된 배경지식만으로 그림을 이해할 수는 없다. 아름다움에 감응하는 인간의 본능이 필요조건이라면 미술사에 대한 이해와 인문학적 소양은 충분조건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미술 읽어주는 여자’를 자처한 한젬마부터 이주헌의 저작들, 최근의 인기 도슨트의 책까지 미술 대중화에 힘쓴 혹은 상업적 이용에 활용한 사람들의 공과를 논할 생각은 없다. 각자 나름의 자리에서 명암이 엇갈리는 역할을 해왔을 테니까. 그래서 감상이 곁들여진 주관적 그림 해설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다. 미학과 철학, 역사 공부가 오히려 도움이 됐다. 그림을 이해하는 비법 같은 건 애초에 없다. 특강 몇 번으로 예술에 다가가기도 힘들다. 그러나 이진숙의 『인간다움의 순간들』(르네상스부터 낭만주의까지)은 화가와 관객과의 거리 조절에 성공했다. 내 말만 들으면 그림을 이해할 수 있다거나 그림을 이렇게 봐야 한다는 가르치지 않는다. 달콤한 감상과 현란한 수식으로 상찬하지도 않고 개인적 소회를 버무려 현실을 위로하지도 않는다. 객관적 사실을 설명하고 그림의 탄생 배경과 시대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할 뿐이다. 글쓴이의 감상은 절제되어 있어 차분하고 지적인 태도가 돋보인다. 그렇게 깊이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문학과 철학과 역사에 바탕을 둔 적확한 해설이 탁월하다. 호들갑스럽지 않으면서도 애정 어린 텍스트가 그림 앞으로 한발 다가서게 하는 효과를 거둔다.

이 책에는 33명의 화가를 소개한다. 전부 101명을 기획해서, 라파엘 전파부터 추상미술까지 다룬 『위대한 고독의 순간들』에는 67명까지 소개했다. 이 시리즈를 찬찬히 읽고 나면 어떤 전시를 둘러봐도 기본적인 소양과 미술사에 대한 이해로는 충분해 보인다. 저자는 단순히 그림을 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학, 역사, 철학, 사회와 상호작용까지 들여다본다.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사이 사이의 관계를 매끄럽게 연결하고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주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책은 현란한 말솜씨와 다른 텍스트의 깊이를 담보해야 하는 일이다.

혹시 주변에서 미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혹은 예술 전반에 관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난해하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부담스럽다. 대개 그림 에세이들은 지나치게 감상에 젖어 있고, 해설서들은 단편적 지식의 나열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진숙의 글은 그림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적절한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고 있다. 적당한 거리두기는 코로나 시대의 방역지침이 아니라 학문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해야 마땅하다.

“프랑스혁명은 인간에게 제2의 영혼인 권리를 줌으로써 두 번째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위고는 말한다. 이 말은 지금까지 우리가 탐구해온 ‘인간다움’의 여정이 중요한 한 순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문학, 미술을 포함한 모든 예술이 열렬히 탐구한 가장 오래되고 본질적인 주제는 ‘인간’이었다. - 4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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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에 대하여 - 아무도 말하지 않은 인생의 다른 이름
베벌리 클락 지음, 서미나 옮김 / 현암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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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할 결심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도 좌절과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매일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가 뗄 수 없는 동반자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 인생은 마치 제로섬 게임 같아서 어느 쪽에 몰입하면 다른 부분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양손에 떡을 움켜쥐면 타인에게 손을 내밀기 어렵다. 잃어야 얻고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이런 평범한 삶의 지혜를 몰라서 지옥을 경험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능력이 있고, 경험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습성이 있다. 이론과 실제가 달라 온몸과 마음으로 겪어보지 않는 감정은 혼란스럽다. 거울에 비치는 사물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고 남의 일같이 보이던 실패와 상실은 어느새 내 곁에 머물러 있다.

익숙함은 실패한 사랑의 주연이 되기 쉽다. 실패를 통해 시행착오의 교훈을 얻고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대개 인간은 귀인이론의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인과관계가 없는 대상이나 원인을 지목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고 상황을 외면하거나 회피함으로써 정신승리를 택한다. 상처는 쉽게 아물고 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우리에겐 리셋 버튼이 없다. 초기화 기능 없는 인간에게 실패와 상실은 익숙해지지 않는 삶의 굴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은 마음이라는 데, 베벌리 클락은 “상실과 실패의 순간에 우리는 존재의 본질과 마주한다. 이 경험으로 진정 중요한 것에 다가갈 기회를 얻는다. 틸리히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고통스러운 경험이 없다면 삶의 표면만 건드린 채, 인간의 피상적 의미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고 강력하게 말한다. 그의 표현은 시적인 느낌마저 든다.”라고 어깨를 다독인다. 꺾이지 않는 마음만 있으면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삶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철학적 위로는 달콤한 감정적 격려, 대책 없는 희망, 무기력한 긍정과 어떻게 다른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실패의 본질과 의미뿐만 아니라 실패의 속성과 과정을 살핀다. 근본적인 원인을 따져보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두 번째 기회를 얻어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쉽다. 흔히 말하는 회복 탄력성은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기 쉽다. 사회 안전망이 견고한 사회에서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법이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정책과 제도적 뒷받침이 마련되야 하지 않겠는가.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는 공동체의 울타리는 개인이 가진 의지 혹은 신념의 단단한 버팀목이다.

현실적인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 대체 불가한 성별(여성혐오), 나이(노인 빈곤), 학력(임금 격차), 종교(대체 군복무), 출신(지역 차별) 등에 기인한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빈부 격차(육아, 출산, 수월성 교육, 입시 제도, 사교육비, 대학 서열)는 개인의 노력이나 열정과 무관하지 않은가. 모든 게 다 노무현 탓이라던 한 시대의 비극적 유행어를 뒤집어보면 모든 게 다 정치 탓이라는 은유가 성립한다. 우리는 ‘기득권’을 재해석하는 놀라운 리더를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했다. 여기에 동참하며 호응하는 사람들의 속내는 사다리를 걷어차고 밥그릇을 빼앗는 사람들의 의도와 무관하다. 무지는 참담한 현실을 초래하고 무의식적 분노와 감정적 혐오가 불러올 파장은 개인적 실패가 아니라 공동체의 실패로 귀결될 것이다.

베벌리 클락의 초점은 주로 개인에게 맞춰져 있으나 여성, 죽음, 불안의 문제는 철저하게 삶의 조건들, 즉 공동체의 태도와 환경에 기인한다. 성공에 대한 욕망, 실패에 대한 두려움보다 우선 ‘좋은 삶’에 대한 정의와 기준이 중요하지 않을까. 어떻게 좋을 삶을 실현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논의를 시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좋은 삶은 철저한 경쟁과 승자독식 자본주의다. 시장에게 자유를 허하라는 말에 동조하는 90퍼센트 가난한 국민들의 태도가 놀라운 건 무지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10퍼센트가 될 수 있다는 욕망 때문이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되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가학적 시장주의적 태도 때문이다. 이미 시장이 정치를 지배한 지 오래지만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고민이 없는 한 좋은 삶은 불가능하다는 철학자의 조언은 이념과 무관하지 않은가.

좋은 삶의 대척점에 놓인 경고는 ‘삶의 모든 영역에 시장원리가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삶의 불확실성이 오로지 경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언젠가 세상에서 사라진다. 저자는 좋은 삶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점검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묻는다. 타인과 세계와 연결된 삶을 위해 좋은 관계가 필요하다. 새로운 관계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상실이 생긴다. 삶을 쉽게 통과할 방법은 없다고 단언하는 이 책의 미덕은 멈출 때 삶이 공간이 생기고, 지금-여기에서 열정을 다하며, 걷는 행위를 통해 다르게 사는 법을 익히라는 충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상실이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수용과 동행이라는 조언이다. 명확한 해법을 제시하고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아 좋다.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가 새로운 관점의 출발이다. 실패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우선 나와 타인의 관계 그리고 세상을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감정적 태도를 버려야 다른 삶, 보다 좋은 삶을 위한 고민이 시작되리라.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에서 아무도 실패와 상실을 피하지는 못한다. 우주는 우연과 변화, 성과 쇠, 성장과 부패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인간은 이것의 일부다. 삶은 필연적으로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오르막과 내리막, 성공과 실패를 모두 담고 있다. -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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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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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설 자리를 잃었다는 풍문은 사실일까. 누군가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했고, 누군가는 스토리텔링의 시대가 도래를 확신했다. 그 많은 소설들 사이에서 독자들은 위로와 안식을 얻었으나 또 그만큼 현실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외면과 회피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나 여전히 소설은 우리에게 시간을 뛰어넘고 공간을 가로지르며 꿈과 환상을 선물한다. 소설가는 여전히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 혹은 환멸을 느끼며 삶의 진실을 찾으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듯하다. 우리는 왜 여기에 혹은 거기에서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을까. 가면을 가리키며 걸어보라던 김연수가 자기 언어를 소진한 듯 이야기를 멈췄다가 오랜만에 소설집을 냈다. 평범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짧고도 긴 이야기를 담은 단편 8개가 바닷가 카페 문 앞에 걸린 풍경처럼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

시에 먼저 닿은 소설가라서 해서 특별히 언어에 대한 깊이와 태도가 남다르진 않다. 다만, 외부를 관찰하기 위해 연 창문의 크기는 남달라 보인다. 적당한 거리에서 타자를 바라보고 세상을 들여다보는 태도에는 대체로 연민이 묻어난다. 슬픔과 고통에도 찬란한 햇빛 한 조각을 묻혀 놓는다든가, 산산이 조각난 거울의 유리 파편이 뒤섞여 있는 느낌이 드는 문장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반짝이는 슬픔과 모래가 씹히듯 서걱이는 이물감이 불편하지 않게 자리를 잡는다.

핍진성이 결여된 소설을 읽는 일은 고역이다. 예술의 영역에서 진실은 극히 주관적일 수 있다. 개연성을 바탕으로 직조된 허구의 세계에 단단한 내적 구조에 균열이 생기면 독자들은 몰입의 즐거움을 잃고 창조된 세계의 질서에 의문을 품는다. 김연수의 소설은 일관성 있게 ‘시간’의 문제를 꺼내 들고 통시적 관점에서 현재를 묻는다. 당신의 오늘은 괜찮으냐고. 내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매끈하다. 1972년 10월을 시간의 끝이라고 부른 연인의 이야기.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는 결심하기만 하면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인 오늘을 제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전언이 새삼스럽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 부는 ‘세컨드 윈드’가 그렇고, 「진주의 결말」에서 제시한 희망의 방향이 그러하다. “꿈은 밤의 수족관이다.”(「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라는 빅토르 위고의 짧은 문장이 헛된 희망 고문일지라도 어쩔 수 없다. 연약하고 불완전한 ‘나’ 자신을 견디고 견딜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실패와 상실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단 한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삶은 외롭다’는 진부하지만 사랑을 잃고 나는 쓴다는 기형도의 고백처럼 김연수의 상실감은 대개 특별하지 않은 연인과의 이별, 오래된 기억과의 결별에서 비롯된다. 고독보다 쓸쓸함에 가까운 서사는 실존적 위기가 아니라 일상적 슬픔을 담아낸다. 익숙하면서도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로 여백을 채우는 김연수의 대중성은 딱 여기까지다.

아주 오랫동안 한 작가의 글들을 읽는 일은 기쁨이자 슬픔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느 순간 지루해지듯 어떤 소설가든 연타석 홈런을 칠 수는 없다. 하지만 시인과 소설가에도 정년은 필요하다. 누군가는 절필을 선언하고 누군가는 현실에 안주하며 자연스레 문학을 떠난다. 또 누군가는 독자들에게 외면받고 누군가는 새로운 문장과 이야기로 새로움에 도전한다. 일관성과 변화는 양날의 검이다. 정호승과 김지하의 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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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의 반란!
대니얼 카너먼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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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보다 감정이 앞서는 동물이기도 하다. 통상 좌뇌는 물리적이고 이성적 판단에 관여하고 우뇌는 창의적 사고의 뇌로 직관적 판단에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신피질과 변연계는 그 기능과 역할이 각각을 담당하고 있으나 그 역할과 기능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유전 형질, 교육환경, 성장 과정이 생각과 감정 통제 시스템에 영향을 미친다. 시간과 공간마다 다른 요소가 작동하니 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이 고정되어 있을 수 없다. 판단과 선택도 계속 변한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이 변하니?” 따위의 영화 대사는 설 자리가 없다.

대개 우리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타인보다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은 자아 정체성이 사회적 관계, 정성적 평가, 객관적 능력의 종합적 판단과 차이가 있다는 의미일까.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냐고 울부짖던 리어왕이 아니라도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알에서 껍질을 깨고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었던 싱클레어와 같은 욕망은 없어도 우리는 스스로 자기 인식의 오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운명이다.

그 오해와 변명에 대한 고찰이 심리학의 연구 영역일 것이다. 실험심리학의 아버지 분트 이후 인간의 마음이 증명될 수 있는 과학적 진리의 영역에 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의 일관된 오류, 불합리한 선택, 비이성적 행동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다. 끝내 우리는 우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고전 경제학에 마침표를 찍고 행동경제학의 도래를 알린 사건이 벌어졌다. 2002년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노벨 경제학을 받으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로서 경제행위를 하는 인간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듯했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니 ‘영끌’했던 사람들은 ‘영털’이 되었다. 집값이 바닥을 찍어도 매수하지 않는 실수요자들은 곧 후회와 아쉬움의 술잔을 기울이리라. 그러나 노여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생각은 원래 그렇다. 디폴트 값이니 개인의 실수나 잘못이 아니라는 위로는 가능하다.

한발 더 나아가 『넛지』의 저자인 리처드 탈러는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 자문이었다. 현실 정치에 행동경제학이 뛰어든 사례다. 나심 탈레브는 『블랙 스완』으로 인간의 속성과 경제 체제를 까발렸다. 누구나 멍청하다. 똑똑한 ‘척’하는 사람의 설명과 판단을 좇는 순간 망한다. “누구나 나름대로 계획이 있다. 링에 올라와 처맞기 전까지는.”이라는 타이슨의 다소 과격한 조롱이 미래를 예측하고 정답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울리는 경종은 아니었을까.

우리 머릿속에는,

* 시스템 1 : 빠르게 생각하고 직관적인 반응체계

* 시스템 2 : 느리게 생각하고 고심하면서 시스템 1을 감시하고 제한된 자원으로 최대한 통제력 유지

이렇게 두 개의 시스템이 들어 있다. 대개 시스템 1은 본능에 가깝다. 생존을 위해 움직인다. 생각보다 혀가 먼저 움직이고 눈이 손보다 빠른 이유다. 대개 변연계가 담당하는 영역이리라. 시스템 2는 논리와 이성의 영역이다. 가장 마지막에 진화한 신피질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대니얼 카너먼은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판단Judgement Under Uncertainty : 어림짐작과 편향Heuristics and Bias」에서 기나긴 인간의 착각에 마침표를 찍었다. 「선택, 가치, 틀짜기Choices, Values, and Frames」와 함께 이 책의 부록으로 실린 두 편의 기념비적 논문은 숱한 논란의 출발이 되었고 경제학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촉발했다. 우리는 ‘이콘Econ : 합리적 이론의 토대에 발을 딛고 사는 허구의 존재’일까 아니면 ‘인간Human : 실제 세계에서 행동하는 비이성적 존재’일까.

대체로 ‘기억하는 자아 : 삶의 점수를 기록하고 선택하는 자아’가 ‘경험하는 자아 : 실제로 살아가는 자아’를 압도한다. 인간의 뇌에서 벌어지는 숱한 오류가 시스템 1과 시스템 2, 즉 이콘과 휴먼의 충돌과 어색한 화해 때문이라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대개 기억하는 자아와 경험하는 자아의 간극 때문이다. 매 순간 선택의 순간이 온다. 어림짐작과 편향은 일상이 되어 한 인간의 정체성이 되고 성향과 성격을 좌우한다. 이 책은 그 모든 순간, 그 모든 자유 의지를 회의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당신의 판단, 당신의 결정, 당신의 선택은 과연 괜찮으냐고.

지식 생산자 사이에 유통되는 논문이 아니라 대중적 글쓰기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에 해당하는 책이기도 하다. 어쩌면 부록에 해당하는 짧은 논문 두 편의 해설에 해당하는 본문 670쪽은 너무 방대해 보인다. 하지만 충분한 사례와 설명, 관련 논문과 저작들이 고루 소개되어 읽는 즐거움은 배가 된다. 경제학의 프레임을 뒤엎은 심리학자의 실험과 설명이 언제나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각의 방향과 깊이를 바로잡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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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이라는 칼 문학과지성 시인선 573
김기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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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시인은 사물주의자이다.”라는 송승환의 평가는 적확하다. 『사무원』, 『소』 등의 시집을 읽으면서 김기택에게 매료된 건 건조한 시선과 상상력 때문이다. 사람을 빗겨 간 자리에 사물이 놓인 게 아니라 사물이 존재의 그림자가 되어 인간의 실존을 드러낸다. 즉물적 태도에서 벗어나 오히려 삶의 기쁨과 슬픔, 웃음과 눈물이 배어 있는 사물들. 그렇게 무심한 듯 사물을 통해 생의 단면을 벤 시들이 좋았다.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하고 사물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장인 정신에 공감했다.

낫과 칼은 만듦새와 모양새가 다른 듯 같지만, 같은 듯 다르다.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채 누군가를 안고 싶은 외로운 낫은 잘 벼린 칼날, 군더더기 없는 직선과 같을 수 없다. 김기택은 매번 그렇게 사물을 통해 내 안에, 아니 우리에게 잠재된 날것의 욕망과 감정을 끌어낸다. 거역할 수 없는 사물의 몸짓으로.

안쪽으로 날이 휘어지고 있다

찌르지 못하는

뭉툭한 등을 너에게 보이면서

심장이 있는

안쪽으로 구부러지고 있다

팔처럼

날은 뭔가를 껴안으려는 것 같다

푸르고 둥근 줄기

핏줄 다발이 올아가는 목이

그 앞에 있다

뜨겁고 물렁한 것이 와락 안겨올 것 같아

날은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리고 있다

아주 오랜만에 읽는 김기택의 시는 세월을 담았다. 동시대 시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만큼 쓸쓸한 일이 있을까. 소설가 조세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이청준, 박경리, 최인훈이 떠날 때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시인 오규원, 조태일이 떠나듯 노년과 죽음에 다가선 시인들의 시는 세월을 담아낸다. 명랑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사유가 부딪히던 자리에 부드럽고 느린 시선이 머문다. 그것은 시간의 변화로 받아들여야 할 뿐, 오호의 감정이나 비평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듯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물 혹은 생활 감각에 대한 시적 사유는 나이와 무관하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당연히 이전과 다르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웃음, 거리낌 없이 나이브한 말과 행동은 미성숙의 지표다. 그러나 세월은 돌이킬 수 없는 그 순간을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지나간 모든 것을 미화하는 게 아니라 그간의 경험과 기억이 현재를 새롭게 발견하게 한다. 그래서 시인도 아기 앞에서 입 벌리고 헤벌쭉 웃지 않았을까. 그렇게 멍때리는 순간보다 더 나은 일이 없다는 듯. 남은 인생에서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 아닌가.

아기 앞에서

아직 제가 태어나지 않은 것 같은 표정으로

몸이 생겼는지 모르는 것 같은 눈으로

유아차에 앉아 있던 아기가

내 눈과 마주친다, 순간

아기가 다칠 것 같다

내 눈빛에서 튀어 나가는 이빨과 발톱을

어떻게 눈알에 붙들어 매야 하나 난감하다

자신을 방어할 어떤 몸짓도 하지 않고

아기는 편한 자세로 앉아 있다

끊임없이 뭔가를 방어하고 있던 내 두려움도

아기 앞에서 다 들켜버린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풀리고 관절이 연약해지며

내 안에서 조용히 무너지는 것이 있다

혀에 가득한 말들은 발음을 잃고

표정은 뭘 해야 할지 몰라 입 벌리고 멍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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