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보다 감정이 앞서는 동물이기도 하다. 통상 좌뇌는 물리적이고 이성적 판단에 관여하고 우뇌는 창의적 사고의 뇌로 직관적 판단에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신피질과 변연계는 그 기능과 역할이 각각을 담당하고 있으나 그 역할과 기능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유전 형질, 교육환경, 성장 과정이 생각과 감정 통제 시스템에 영향을 미친다. 시간과 공간마다 다른 요소가 작동하니 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이 고정되어 있을 수 없다. 판단과 선택도 계속 변한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이 변하니?” 따위의 영화 대사는 설 자리가 없다.
대개 우리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타인보다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은 자아 정체성이 사회적 관계, 정성적 평가, 객관적 능력의 종합적 판단과 차이가 있다는 의미일까.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냐고 울부짖던 리어왕이 아니라도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알에서 껍질을 깨고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었던 싱클레어와 같은 욕망은 없어도 우리는 스스로 자기 인식의 오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운명이다.
그 오해와 변명에 대한 고찰이 심리학의 연구 영역일 것이다. 실험심리학의 아버지 분트 이후 인간의 마음이 증명될 수 있는 과학적 진리의 영역에 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의 일관된 오류, 불합리한 선택, 비이성적 행동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다. 끝내 우리는 우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고전 경제학에 마침표를 찍고 행동경제학의 도래를 알린 사건이 벌어졌다. 2002년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노벨 경제학을 받으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로서 경제행위를 하는 인간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듯했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니 ‘영끌’했던 사람들은 ‘영털’이 되었다. 집값이 바닥을 찍어도 매수하지 않는 실수요자들은 곧 후회와 아쉬움의 술잔을 기울이리라. 그러나 노여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생각은 원래 그렇다. 디폴트 값이니 개인의 실수나 잘못이 아니라는 위로는 가능하다.
한발 더 나아가 『넛지』의 저자인 리처드 탈러는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 자문이었다. 현실 정치에 행동경제학이 뛰어든 사례다. 나심 탈레브는 『블랙 스완』으로 인간의 속성과 경제 체제를 까발렸다. 누구나 멍청하다. 똑똑한 ‘척’하는 사람의 설명과 판단을 좇는 순간 망한다. “누구나 나름대로 계획이 있다. 링에 올라와 처맞기 전까지는.”이라는 타이슨의 다소 과격한 조롱이 미래를 예측하고 정답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울리는 경종은 아니었을까.
우리 머릿속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