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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소설이 설 자리를 잃었다는 풍문은 사실일까. 누군가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했고, 누군가는 스토리텔링의 시대가 도래를 확신했다. 그 많은 소설들 사이에서 독자들은 위로와 안식을 얻었으나 또 그만큼 현실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외면과 회피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나 여전히 소설은 우리에게 시간을 뛰어넘고 공간을 가로지르며 꿈과 환상을 선물한다. 소설가는 여전히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 혹은 환멸을 느끼며 삶의 진실을 찾으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듯하다. 우리는 왜 여기에 혹은 거기에서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을까. 가면을 가리키며 걸어보라던 김연수가 자기 언어를 소진한 듯 이야기를 멈췄다가 오랜만에 소설집을 냈다. 평범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짧고도 긴 이야기를 담은 단편 8개가 바닷가 카페 문 앞에 걸린 풍경처럼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
시에 먼저 닿은 소설가라서 해서 특별히 언어에 대한 깊이와 태도가 남다르진 않다. 다만, 외부를 관찰하기 위해 연 창문의 크기는 남달라 보인다. 적당한 거리에서 타자를 바라보고 세상을 들여다보는 태도에는 대체로 연민이 묻어난다. 슬픔과 고통에도 찬란한 햇빛 한 조각을 묻혀 놓는다든가, 산산이 조각난 거울의 유리 파편이 뒤섞여 있는 느낌이 드는 문장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반짝이는 슬픔과 모래가 씹히듯 서걱이는 이물감이 불편하지 않게 자리를 잡는다.
핍진성이 결여된 소설을 읽는 일은 고역이다. 예술의 영역에서 진실은 극히 주관적일 수 있다. 개연성을 바탕으로 직조된 허구의 세계에 단단한 내적 구조에 균열이 생기면 독자들은 몰입의 즐거움을 잃고 창조된 세계의 질서에 의문을 품는다. 김연수의 소설은 일관성 있게 ‘시간’의 문제를 꺼내 들고 통시적 관점에서 현재를 묻는다. 당신의 오늘은 괜찮으냐고. 내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매끈하다. 1972년 10월을 시간의 끝이라고 부른 연인의 이야기.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는 결심하기만 하면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인 오늘을 제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전언이 새삼스럽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 부는 ‘세컨드 윈드’가 그렇고, 「진주의 결말」에서 제시한 희망의 방향이 그러하다. “꿈은 밤의 수족관이다.”(「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라는 빅토르 위고의 짧은 문장이 헛된 희망 고문일지라도 어쩔 수 없다. 연약하고 불완전한 ‘나’ 자신을 견디고 견딜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실패와 상실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단 한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삶은 외롭다’는 진부하지만 사랑을 잃고 나는 쓴다는 기형도의 고백처럼 김연수의 상실감은 대개 특별하지 않은 연인과의 이별, 오래된 기억과의 결별에서 비롯된다. 고독보다 쓸쓸함에 가까운 서사는 실존적 위기가 아니라 일상적 슬픔을 담아낸다. 익숙하면서도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로 여백을 채우는 김연수의 대중성은 딱 여기까지다.
아주 오랫동안 한 작가의 글들을 읽는 일은 기쁨이자 슬픔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느 순간 지루해지듯 어떤 소설가든 연타석 홈런을 칠 수는 없다. 하지만 시인과 소설가에도 정년은 필요하다. 누군가는 절필을 선언하고 누군가는 현실에 안주하며 자연스레 문학을 떠난다. 또 누군가는 독자들에게 외면받고 누군가는 새로운 문장과 이야기로 새로움에 도전한다. 일관성과 변화는 양날의 검이다. 정호승과 김지하의 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