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이라는 칼 문학과지성 시인선 573
김기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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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시인은 사물주의자이다.”라는 송승환의 평가는 적확하다. 『사무원』, 『소』 등의 시집을 읽으면서 김기택에게 매료된 건 건조한 시선과 상상력 때문이다. 사람을 빗겨 간 자리에 사물이 놓인 게 아니라 사물이 존재의 그림자가 되어 인간의 실존을 드러낸다. 즉물적 태도에서 벗어나 오히려 삶의 기쁨과 슬픔, 웃음과 눈물이 배어 있는 사물들. 그렇게 무심한 듯 사물을 통해 생의 단면을 벤 시들이 좋았다.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하고 사물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장인 정신에 공감했다.

낫과 칼은 만듦새와 모양새가 다른 듯 같지만, 같은 듯 다르다.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채 누군가를 안고 싶은 외로운 낫은 잘 벼린 칼날, 군더더기 없는 직선과 같을 수 없다. 김기택은 매번 그렇게 사물을 통해 내 안에, 아니 우리에게 잠재된 날것의 욕망과 감정을 끌어낸다. 거역할 수 없는 사물의 몸짓으로.

안쪽으로 날이 휘어지고 있다

찌르지 못하는

뭉툭한 등을 너에게 보이면서

심장이 있는

안쪽으로 구부러지고 있다

팔처럼

날은 뭔가를 껴안으려는 것 같다

푸르고 둥근 줄기

핏줄 다발이 올아가는 목이

그 앞에 있다

뜨겁고 물렁한 것이 와락 안겨올 것 같아

날은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리고 있다

아주 오랜만에 읽는 김기택의 시는 세월을 담았다. 동시대 시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만큼 쓸쓸한 일이 있을까. 소설가 조세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이청준, 박경리, 최인훈이 떠날 때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시인 오규원, 조태일이 떠나듯 노년과 죽음에 다가선 시인들의 시는 세월을 담아낸다. 명랑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사유가 부딪히던 자리에 부드럽고 느린 시선이 머문다. 그것은 시간의 변화로 받아들여야 할 뿐, 오호의 감정이나 비평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듯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물 혹은 생활 감각에 대한 시적 사유는 나이와 무관하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당연히 이전과 다르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웃음, 거리낌 없이 나이브한 말과 행동은 미성숙의 지표다. 그러나 세월은 돌이킬 수 없는 그 순간을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지나간 모든 것을 미화하는 게 아니라 그간의 경험과 기억이 현재를 새롭게 발견하게 한다. 그래서 시인도 아기 앞에서 입 벌리고 헤벌쭉 웃지 않았을까. 그렇게 멍때리는 순간보다 더 나은 일이 없다는 듯. 남은 인생에서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 아닌가.

아기 앞에서

아직 제가 태어나지 않은 것 같은 표정으로

몸이 생겼는지 모르는 것 같은 눈으로

유아차에 앉아 있던 아기가

내 눈과 마주친다, 순간

아기가 다칠 것 같다

내 눈빛에서 튀어 나가는 이빨과 발톱을

어떻게 눈알에 붙들어 매야 하나 난감하다

자신을 방어할 어떤 몸짓도 하지 않고

아기는 편한 자세로 앉아 있다

끊임없이 뭔가를 방어하고 있던 내 두려움도

아기 앞에서 다 들켜버린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풀리고 관절이 연약해지며

내 안에서 조용히 무너지는 것이 있다

혀에 가득한 말들은 발음을 잃고

표정은 뭘 해야 할지 몰라 입 벌리고 멍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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