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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움의 순간들 ㅣ 더 갤러리 101 1
이진숙 지음 / 돌베개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예술적 감수성은 인간의 본능에 내재 돼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감수성은 저절로 발현되는 게 아니라 원석에 감춰진 보석처럼 갈고 닦아야 빛이 난다. 예술사, 즉 예술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방법이 작품을 이해하는 초석이다.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감각적 행위는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과 삶에 대한 태도를 반영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겪는 역사적 경험과 철학이 스며들어 인류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존 버거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권했으나 어느 시대에도 기존 방식을 답습하라고 권한 예술가가 있었을까. 때로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재현하려 노력했고 때로는 보편적 미의 원칙을 거부하며 이성보다는 감성과 비합리적 세계를 추구하기도 했다. 예술은 현실 너머 세계를 지향하는 듯하지만 인간의 문제를 넘어설 수는 없지 않은가.
신의 세계를 갈망했던 중세가 저물고 르네상스가 열렸다. 그림자와 원근법으로 무장하며 인본주의humanism는 지금-여기의 인간을 중심에 놓는다. 신과 귀족을 넘어 신흥 부르주아, 광대까지 제3신분으로 대상이 확대되며 미술은 민중 속으로 걸어들어온다. 그림이 미술관에 박제된 건 근대 이후의 일이지만 보편성을 획득하며 누구나 보고 즐길 수 있는 된 건 이중 혁명 시대의 열매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태동하며 근대사회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를 이중혁명의 시대라고 명명한 건 에릭 홉스봄이다. 그가 지적한 대로 이중 혁명을 거쳐 21세기, 오늘을 사는 우리 삶의 틀은 겨우 200년여 년 동안 확립됐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현대인은 고대와 중세, 근대라는 시간을 통과하며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미래는 뭐라 부를지 알 수 없으나 미술사의 한 시기가 아니라 사적 발전 과정으로서 오늘이 궁금하다. 아니, 오늘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과 목적지가 우려될 뿐이다.
프랑스의 라루스 출판사에서 심혈을 기울여 출간한 ‘라루스 미술사-이해와 인식’ 7권(중세미술~현대미술)이 번역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다. 서가 한쪽에 꽂혀 있는 이 라루스 백과사전이 내겐 마중물이 됐다. 본격적으로 예술에 관심과 재미를 갖게 된 건 그림 자체가 지닌 미적 요소보다 도상학에 반영된 시대 정신과 인문학적 지식이었다. 물론 화가의 일생, 세속적 욕망, 정치적 목적이 혼재된 배경지식만으로 그림을 이해할 수는 없다. 아름다움에 감응하는 인간의 본능이 필요조건이라면 미술사에 대한 이해와 인문학적 소양은 충분조건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미술 읽어주는 여자’를 자처한 한젬마부터 이주헌의 저작들, 최근의 인기 도슨트의 책까지 미술 대중화에 힘쓴 혹은 상업적 이용에 활용한 사람들의 공과를 논할 생각은 없다. 각자 나름의 자리에서 명암이 엇갈리는 역할을 해왔을 테니까. 그래서 감상이 곁들여진 주관적 그림 해설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다. 미학과 철학, 역사 공부가 오히려 도움이 됐다. 그림을 이해하는 비법 같은 건 애초에 없다. 특강 몇 번으로 예술에 다가가기도 힘들다. 그러나 이진숙의 『인간다움의 순간들』(르네상스부터 낭만주의까지)은 화가와 관객과의 거리 조절에 성공했다. 내 말만 들으면 그림을 이해할 수 있다거나 그림을 이렇게 봐야 한다는 가르치지 않는다. 달콤한 감상과 현란한 수식으로 상찬하지도 않고 개인적 소회를 버무려 현실을 위로하지도 않는다. 객관적 사실을 설명하고 그림의 탄생 배경과 시대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할 뿐이다. 글쓴이의 감상은 절제되어 있어 차분하고 지적인 태도가 돋보인다. 그렇게 깊이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문학과 철학과 역사에 바탕을 둔 적확한 해설이 탁월하다. 호들갑스럽지 않으면서도 애정 어린 텍스트가 그림 앞으로 한발 다가서게 하는 효과를 거둔다.
이 책에는 33명의 화가를 소개한다. 전부 101명을 기획해서, 라파엘 전파부터 추상미술까지 다룬 『위대한 고독의 순간들』에는 67명까지 소개했다. 이 시리즈를 찬찬히 읽고 나면 어떤 전시를 둘러봐도 기본적인 소양과 미술사에 대한 이해로는 충분해 보인다. 저자는 단순히 그림을 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학, 역사, 철학, 사회와 상호작용까지 들여다본다.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사이 사이의 관계를 매끄럽게 연결하고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주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책은 현란한 말솜씨와 다른 텍스트의 깊이를 담보해야 하는 일이다.
혹시 주변에서 미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혹은 예술 전반에 관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난해하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부담스럽다. 대개 그림 에세이들은 지나치게 감상에 젖어 있고, 해설서들은 단편적 지식의 나열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진숙의 글은 그림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적절한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고 있다. 적당한 거리두기는 코로나 시대의 방역지침이 아니라 학문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해야 마땅하다.
“프랑스혁명은 인간에게 제2의 영혼인 권리를 줌으로써 두 번째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위고는 말한다. 이 말은 지금까지 우리가 탐구해온 ‘인간다움’의 여정이 중요한 한 순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문학, 미술을 포함한 모든 예술이 열렬히 탐구한 가장 오래되고 본질적인 주제는 ‘인간’이었다. - 4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