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선집
막스 베버 지음, 박성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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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전망에 대해 맑스는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보았을까? 전자본주의가 자본가와 노동자의 생산수단의 소유 문제에서 출발한다면 후기 자본주의는 자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자생력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기본 토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자본가의 형태가 고전적인 의미에서와 같이 한정적으로 논의하기는 쉽지 않게 되었다. 물론 노동의 관점과 시각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노동력으로 생활을 영위하면서 또 다른 자본을 소유하고 생산계급이면서도 자본가적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합리적 사고 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21세기의 자본주의 경제를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는 경제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안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달라지지 않는다고 해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탄생한 20세기 초반과 비교한다면 현재의 상황에서 이 책은 무의미해 보인다. 그러나 베버의 사상이 현재적 의미를 갖는 부분은 경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에서 바라본 자본주의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무엇인지, 칼뱅과 루터 그리고 가톨릭에서 말하는 노동과 직업의 소명 의식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로 이 책을 읽어야 했던 나는 이해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구절과 구절의 의미는 물론 번역의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원전의 의미를 철저하게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이 번역이 아니라면 긴 문장을 나누고 다듬어 기본적인 이해가 가능해야 한다. 얄팍한 배경지식과 무식의 소치로 돌리기엔 번역된 문자이 주는 고통도 상당하다.

자본주의의 발달을 노동에 대한 직업 소명의식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탁월하다. 맑스가 이미 <자본론>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해 놓은 시대의 저작이라면 1905년에 발표된 이 논문도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근대의 출발선 언저리에서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변화를 바라보는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에 대한 관심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수많은 논쟁의 여지를 가지고 있는 종교의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바라보았던 베버의 진정한 의도는 찾을 수가 없다. 시대를 초월한 반론과 수많은 쟁점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연구를 유발했다. 청교도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 노동과 자연스런 부의 축적을 자본주의와 연관지으려는 베버의 태도는 자본주의에 대한 오독으로 보여지기까지 한다. 기독교적 금욕주의에서 근대적 자본주의가 잉태했다는 베버의 주장이 여전히 타당한가?

노동과 직업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는 많이 달라졌다. 베버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돈벌이를 자신의 물질적 생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는 것이다.’는 주장은 이제 설득력이 없다. 물질적 생활 욕구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상상을 초월하게 되었으며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되고 있다. 어떤 계층 어떤 계급에 속하든 물질적 부의 척도는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과 삶의 태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는 단순히 생에 대한 통찰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과 인간의 삶의 양태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반성적 관점에서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은 공허한 울림이 되겠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분명히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종교적인 질문도 세속적인 질문도 아닌 단순한 삶에 대한 자기 점검을 위한 질문일 뿐이다. 도구와 수단을 살펴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삶에 대한 철학이 부재한 것은 아닌가. ‘유태교의 에토스는 한 마디로 말해 천민 자본주의의 에토스이다.’는 위험한 발언을 선언적으로 할 수 있었던 시대의 베버는 오히려 행복했던 것은 아닐까? 유태교에 대한 혹은 유태인에 대한 비하가 아니라 청교도주의에서 추구하는 직업과 소명 의식에 대한 반성으로 읽히는 이유는 현재의 자본주의가 베버가 비판했던 유태교의 에토스보다 악화됐다고 믿는 까닭이다.

시대가 변하고 시간이 흘러도 오로지 돈에 대한 집착과 인간의 욕망만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무조건 거부하거나 돈을 멀리하자는 멍청한 말이나 태도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와 태고 변화가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자본주의를 변화 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소박한 낙관주의일까?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아니라 그 어떤 대상과도 자본주의 정신은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다양한 관점과 생산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막스 베버의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번 쯤 떠올렸음직한 고민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060619-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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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오퍼스 7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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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란 어떤 것의 일별, 스쳐 지나가는 섬광입니다. 아주 작은 것이지요. 아주 작은, 내용 말입니다.(월램 드 쿠닝, 어떤 인터뷰에서)

외양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얄팍한 사람들 뿐이오. 세계가 간직한 수수께끼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란 말이오.(오스카 와일드, 한 편지에서)

위와 같은 인용문으로 <해석에 반대한다>는 시작된다. 이분법적 흑백논리가 가지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수잔 손택의 첫 번째 경고로 들리는 것은 극단적이 이 두개의 인용문 때문이다. 예술에서, 엄밀하게 문학에서 ‘내용’과 ‘형식’ 논쟁의 전제에는 그것을 분리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 하지만 수잔은 그것을 부정한다. 예술에서, 특히 문학에서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고 그 특성을 ‘해석’하는 것이 지금까지(책이 출판된 1960년대)의 관행이었다. 문학 비평은 30년대 신비평주의자들에 의한 형식비평을 필두로 급격한 변화와 도전을 받게 되어 지금까지 숱한 변화와 주장들을 겪어 왔지만 여전히 ‘비평’의 존재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첨예한 시대에 수잔의 이 책은 그녀를 폭풍의 핵으로 만들었고 지속적인 논쟁을 불러 왔다. 또한 문학 비평에 대한 재인식의 기폭제가 된 것이 사실이다. 문제작이란 이런 책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이후 수잔은 사회적 목소리를 높혔으며 문학안에 머물지 않고 예술 전반과 그것의 모방 대상인 실제 현실에 직접 개입하게 된다.

60년대까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내용과 형식은 우선순위와 상호 배타적 우월성을 표방하는 논쟁들과 소모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석 자체를 반대한다는 도발적인 선언과 그 대안은 여류 비평가를 주목하게 하는 데 충분했다. 수잔은 이 책에서 단순히 문학과 예술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주는 무의미한 논쟁에 대한 종식을 선언함은 물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스타일’이다. 형식과 다른 개념과 용어로 설명하기 위해 번역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스타일’과 ‘스타일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적용이 제시된다. 스타일은 ‘투명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개념이다.

투명성은 오늘날의 예술 - 그리고 비평 - 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의미심장한 가치다. 투명성이란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 P. 33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에 대해 뭔가를 말하여 한다면 우리는 예술작품(그리고 거기에서 유추한 우리의 경험)이 우리에게 훨씬 더 실감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 P. 35

스타일을 논하는 것은 어떤 예술작품의 총체성을 논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총체성에 관한 담론이 으레 그렇듯이, 스타일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에도 은유에 기대야 한다. 그리고, 은유는 얘기를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간다. - P. 39

위에 인용한 부분은 수잔이 ‘투명성’과 ‘스타일’에 대한 논의의 핵심을 말한 부분이다. 문학을 감상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전공자나 비평가의 몫일 뿐 실제 문학의 소비자인 독자들과 거리가 멀거나 아카데미즘의 고유 영역일 수 있다. 독자반응비평같은 주장이 제기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작가와 작품, 현실과 작품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하나의 축이었다면 작품의 내재적 의미만을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이 또 하나의 작품 해석의 축이었다. 거기에 독자와 작품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것을 중요한 요소로 삼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수잔은 그 모든 형식과 내용에 관한 기본 틀을 제거할 것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문학 비평에서 패러다임 자체를 전환하자는 이야기다. 투명성과 스타일은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작품 스스로 빛을 내는 반짝임 자체를 이해하는 일, 그것이 작품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것은 엘리어트가 말한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는 해석 이전의 문제로의 회귀를 뜻한다. 투명성을 경험한 독자는 작품을 보다 잘 느끼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해석을 전제로 한 이해가 아니라 총체적인 스타일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글인 ‘해석에 반대한다’와 ‘스타일에 대해’가 수잔 손택의 문학비평에 관한 핵심 주장이다. 나머지는 실제 작품에 적용을 여준다. 특히 기존의 해석과 방법과 다른, 혹은 영화에도 적용되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예술은 투명성을 확보하고 나름의 고유한 스타일을 찾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을 보다 더 잘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요구한 예술에 대한 기본 자세이다.

하나의 예술 작품에서 받아 들일 수 있는 아우라를 총체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거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요구한 예술의 투명성은 결국 독자들의 생생한 경험이어야 한다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를 주장한 것이다. 지금은 당연해진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가 그녀의 주장 이전까지는 통용되지 않았다는 것일까? 문학과 예술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이해의 폭은 중간에 끼여든 평론가를 통해 왜곡되고 변형될 수 있다. 비평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부터 다양한 문제점과 해법들이 제시되고 있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 전반에 걸친 맹목적인 주례비평에서 헤게모니를 둘러싼 권력 다툼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비평이다. 결국, 문학에서 감상과 수용의 최종 단계라고 할 수 있는 독자들과의 만남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해석과 비평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로 남는다. 수잔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는 주는 의미는 바로 이 지점에 대한 논의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는 책이다.


060625-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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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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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보고 받았던 감성적 충격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Als das Kind Kind war아이가 아이였을 때……” 중저음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파리, 텍사스> 이후 개인적으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겨준 영화다. 흑백의 화면과 빨간 옷을 입은 어린 아이의 선명한 이미지의 대조는 십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된다. 이 영화를 보고 얼마 후 후배가 볼만한 영화가 없느냐고 묻길래 적극 추천했다. 여자친구와 이 영화를 보러 갔다가 10만에 자고 왔다는 원망을 들었다.

영화든 책이든 개인적인 취향과 감동의 깊이는 천양지차다. 객관화시킬 수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만큼 객관화시키기 어렵다는 말이다. 재미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보편성을 획득하고자하는 태도는 문학에서 가장 위험한 태도다. 굳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감동과 교훈을 고루 얻을 수 있는 소설을 만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 소설이라면 더욱 그렇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동굴>은 밀란 쿤테라의 <농담>을 읽었을 때의 극히 주관적 감동 상태와 유사하다. 늙은 소설가의 말년 작품은 극단적으로 위대하거나 초라하다. 나이와 연륜을 감당할 만한 작품들이 고루 탄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평범하고 지루해 보이는 이 소설이 내게는 깊은 심연의 ‘동굴’을 돌아보게 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세상에 대한 인식 방법을 회의하게 만든다. 이 소설의 제목이자 작가의 의도는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빛나는 작품이다.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보는 손과 목이 쇠사슬에 묶인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우리들의 자화상은 아닐까 반문하는 듯하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볼 수조차 없는 동굴 속의 나의 모습을 객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타인에게 투영된 나의 모습과 옆을 돌아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현대인의 우울한 뒷모습을 확인한 것은 나만의 공상일까?

평생 도자기 그릇을 구워온 노인과 그의 딸 그리고 사위, 한 동네에 사는 과부와 길을 잃고 노인에게 온 개 한 마리가 이 장편 소설의 등장 인물들이다. 단순한 구성과 밋밋한 갈등은 지루하고 나른한 소설로 팽개치기 십상이다. 더구나 인물들 간의 대화를 큰 따옴표로 묶지 않고 인용하듯 긴 문장들을 쉼표로 연결해 놓아 긴 호흡과 느린 템포를 유지한다. 노인의 시선과 서술자의 말투는 무더운 여름 오후의 거친 호흡처럼 답답하기까지 하다.

‘센터’는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노인의 모든 그릇이 이곳으로 납품되다가 일시에 거절당한 후 인형을 제작해 납품해보기로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센터에서 경비로 일하는 사위는 상주 경비원으로 승진해서 센터에서 제공하는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게 된다. 센터 밖에 거주하는 노인은 딸 내외를 따라 가기로 결심한다. 센터로 이주 한 후 지하 발굴 현장에 몰래 잠입해서 동굴의 실체를 확인한 후 다시 산업지대와 그린벨트를 지나 과부의 사랑을 확인하러 돌아온다. 사위와 딸도 동굴과 센터를 떠나 네 사람은 석양 속으로 먼 길을 떠나는 것으로 이 소설을 끝을 맺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동굴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비극적 인식에서 이 소설이 출발한다면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소설화한 해설서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의미는 동굴에 있지 않고 동굴 밖에 있다. 동굴을 포함한 센터와 센터 밖의 세계와의 대비가 아니라 두 세계를 포함한 세계 밖으로 길을 떠나는 네 사람의 여행 후기가 더욱 궁금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이 떠나는 세계는 양파 껍질처럼 겹겹이 둘러싸인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이 소설에는 서술자의 입을 통해 촌철살인의 인생에 대한 통찰들이 녹아 있다. 네 사람이 나누는 대화 사이사이 서술자가 개입하고 그 개입과 인물들의 대화가 하나가 된다. 그것은 대부분 아주 오랫동안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사유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내뱉을 수 없는 선언적 아포리즘들이다. 소설에 밑줄 그으면 읽는 일은 얼마나 우스운가. 그래도 다시 한 번 읽어보기 위해, 한 번 더 생각하며 여운을 즐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말할 가치가 없거나, 딱 한 번만 말하면 되는 말들로 가득 차 있다.(P. 48)”는 작가의 말은 길게 늘어 놓은 그의 소설 전체를 부정하는 말이 된다. 그렇게 많은 말들의 부질없음을 알고 있는 작가의 말에 귀기울여 볼만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독자들이 각자 찾아나서야 하는 모래밭에 바짝이는 작은 바늘 하일 수도 있다.


060629-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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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민주화 - 한국 민주주의의 변형과 헤게모니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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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시대를 초월한 삶의 기본 조건일까?

정치적 형태로서 민주주의가 갖는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기원과 역사적 과정을 고찰하지 않더라도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정치적 이념으로 채택하고 있다. 민주주의 이전의 중세 봉건 사회에서 공화정으로 이행 과정은 피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현재 우리가 쟁취한 절차적 민주주의는 비릿한 피냄새가 가득하다. 오욕의 한국 현대사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얼마나 많은 희생과 투쟁을 통해 획득한 가치인가는 누구나 알고 있다. 노무현 정권의 출범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에서 정착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민주주의의 과정을 통해 달라진 삶의 질적 변화이다. 물론 변화가 없을 리 없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민주화라는 정치적 이념과 결합되지 못하는 수많은 난제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확실한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해서 비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문제를 점검하고 그 뿌리를 확인하는 일은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최장집의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이러한 현실적 문제와 대안을 고민하기 위한 분명한 제언들로 가득하다. 개별 사안과 정치적 쟁점들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논쟁들도 중요하지만 거대 담론을 점검하는 좋은 기회가 되는 책이다.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항들이지만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현재 가장 첨예한 국가의 정책 사안인 한미 FTA에 대해 국민들은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우리들 삶에 얼마나 직접적이고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지에 대해 고민하지만 정책 결정 과정이나 의사 표현이 서툰 것은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와 거리가 멀어서일까. 그렇지 않다. 극단적인 정치 혐오증은 민주주의 열망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다. 17대 총선은 대통령 탄핵에 대한 여당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최근에 벌어진 5 ․ 31 지방 선거는 집권 여당에 대한 분노가 고스란히 드러난 선거로 볼 수 있다. 미래를 향한, 혹은 선거와 정책을 통한 국민적 열망들이 정치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보복과 실망감의 표현 수단이 되어 버렸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제기한 ‘헤게모니’의 개념을 조금 다른 차원과 개념으로 정의한 뒤 민주주의와 헤게모니의 문제를 다루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다. 이 문제는 노동과 민주주의 그리고 동아시아 전체를 조망하는 평화와 공존의 공동체적 관점에서 한반도 문제를 살펴본다. 특히 3장 ‘노동없는 민주주의의 위기’에서 우리나라 현실에서 벌어지는 특수한 개념이 아니라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촉발하는 민주주의와 국가의 역할 문제를 다루고 있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이어서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한미 FTA’ 현안에 대한 문제와 대안은 눈여겨 볼 만하다. 정치인들과 학자들의 입장에서 엘리트주의를 표방하는 민주주의는 성공할 수 없고 양극화를 심화시킬 뿐이며 당면한 현실적 문제들을 풀어나갈 방법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들 삶에 좀 더 밀착된 이념으로서 민주주의 이후의 문제를 제대로 고민하고 미래의 방향들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전우익 선생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는 양극화가 고착될 경우 공멸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김유선의 <한국 노동자의 임금실태와 임금정책>을 보면 IMF이후 정규직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대통령이 나서 대기업 노동자들에게 반성하라고 가르치는 나라의 노동 문제는 인식 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 내맘대로, 내멋대로, 능력대로의 민주주의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민주화되고 있는지 다같이 고민해 볼 일이다. 또한 그것이 바람직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즉 사회적 약자와 소외 계층에 대한 복지와 분배를 염두에 둔 민주주의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민주주의를 바라보던 관점을 벗어난지 오래다. 이제는 미래의 한국사회에 걸맞는 이념과 정책의 방향들이 정치권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서도 고민의 깊이와 방향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개인적, 지적 능력과 상상력은 매우 크지만,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인간의 집단적 능력은 매우 낮다는 것 또한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실정치에 대한 나의 기대수준은 매우 낮니다.(P. 44)”는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가 더 큰 문제다. 우수한 개인의 능력들이 왜 집단적 능력으로 발휘되지 幣求째? 정치가 아닌 철학의 문제인가.

활발하고 꾸준한 논의와 공론의 장이 마련되는 것도 매우 의미있는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내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정치와 제도의 문제에 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대표성과 책임성 그리고 참여를 기본으로 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적 성격은 바로 너와 나,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060701-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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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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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 동안 출판된 소설 중에서 (아마도) 제일 아름다운 소설이랍니다.
둘이 읽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소설을 가리켜서 page turner라고 하지요.
하지만 그건 잘못된 표현이지요. 정말 재미있는 소설은 자꾸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소설이 아니라,
책장 넘기기를 거부하게 만드는 소설이지요. 뒷부분이 다가올수록 안타까움이 짙어지는 소설이에요.
이번 가을에 어떤 소설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올해 단 한권의 추천소설은 바로 이 책이랍니다.

소설가 김연수의 블로그에 실린 ‘지금 당장 이 책을 사서 읽으세요’라는 글의 전문이다. 이 책은 바로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라는 소설이다. 이런 내용의 추천사를 읽고 이 소설을 사 읽지 않을 재주가 없어 그날로 주문해서 읽었다.

수많은 영화 가운데 기억나는 몇 편을 꼽으라면 그 중 하나로 <인생은 아름다워>를 꼽는다.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과 진실의 힘을 보여줬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 때문이다. 로베르토 베니니가 각본, 연출은 물론 주연까지 맡아 화제가 되었던 영화다. 주인공 귀도는 초등학교 교사인 도라를 본 순간 그녀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진심을 담아 도라를 감동시키고 그녀와 결혼한다. 아들 조슈아를 얻은 그들은 나치즘의 절정에서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아들에게 1,000점 내기 게임이라고 속여 유태인 포로수용소 생활을 게임과 같은 환상으로 만들어 준다. 결국 귀도는 독일군에게 발각되어 사살당하지만 아들 조슈아는 나무 상자에서 마지막 숨바꼭질에 성공하고 꼬박 하루 동안 숨어 있다가 누가 1등을 했는지 궁금해서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배경으로 밖으로 나와 지나가는 탱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귀도와 조슈아가 전해주는 감동은 전쟁의 참혹과 비정성으로 인해 더욱 돋보였으며 마지막 장면이 주는 인상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전쟁이 어린 영혼에게 주는 충격과 상처는 상상을 초월한다. 고전이 되어 버린 <안네의 일기>는 어른의 시선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읽힌다.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의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현실들이기 때문이다. 왜 싸우는지 왜 죽이는지 알지 못한다. 비참한 현실만이 또다른 폭력으로 아이들에게 각인된다. 전쟁이라는 폭력은 어린 영혼에게 가해지는 가장 심각하고 무거운 정신적인 좌절과 혼란이 된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세계 무역 센터에 두 대의 비행기가 충돌한다. 침대에 누워 편안한 자세로 반복되는 화면을 보면서 너무나 비현실적인 장면이 너무나 먼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아주 오래전 일인 것 같은데 아침밥을 먹으로 걸프전의 폭격장면을 시청했던 1991년만큼이나 황당했다. 세상밖의 현실처럼 여겨지는 이런 일들이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실이 된다. 오늘도 이라크에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다. 전쟁은 계속된다. 인류가 지구를 떠나지 않는 한.

12살 소년 오스카 셀은 아버지 토마스 셀을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에서 잃는다. 이후 소년의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에 소설의 초점은 맞춰져 있다. 그렇다고 심리소설이나 성장소설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얽혀있다. 소년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 이야기가 그것이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는 물론 소년 자신의 이야기도 그렇다. 아버지가 남긴 열쇠 하나를 찾기 위해 뉴욕 시내를 헤매며 만나는 수많은 ‘블랙’씨들도 그렇다. 이 소설의 특별함은 작위적이지 않은 소년의 순수성을 표현할 줄 아는 작가의 힘에 있다.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을 어른이 대신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작가는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작가 스스로가 꿈꾸고 상상하며 온몸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들’은 소설을 읽으며 독자가 찾아야 할 것이다.

<사랑의 역사>를 쓴 니콜 크라우스의 남편으로, 뛰어난 부부 작가로 주목받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2006년 가을에 찾아온 특별한 소설임에 틀림없다. 김연수의 추천사를 믿어도 좋다.

자칫 혼란스럽고 몰입을 방해하는 형식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인물들의 시점은 입체적인 소설로 일으켜 세운다. 일관된 시점과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의 문제를 깊이 있게 천착하는 작품에 비해 다소 가볍고 경쾌한 흐름으로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으며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곳에 언제나 놓여 있는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머나먼 여행으로 읽히기도 한다. 제목의 의미는 물론 독자가 찾아야 할 숨은 그림이다. 나도 모르겠다. 그것이 폭력에 대한 경고인지 사랑에 대?찬사인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소설은 재미있다는 점이다.


06102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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