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보고 받았던 감성적 충격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Als das Kind Kind war아이가 아이였을 때……” 중저음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파리, 텍사스> 이후 개인적으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겨준 영화다. 흑백의 화면과 빨간 옷을 입은 어린 아이의 선명한 이미지의 대조는 십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된다. 이 영화를 보고 얼마 후 후배가 볼만한 영화가 없느냐고 묻길래 적극 추천했다. 여자친구와 이 영화를 보러 갔다가 10만에 자고 왔다는 원망을 들었다.

영화든 책이든 개인적인 취향과 감동의 깊이는 천양지차다. 객관화시킬 수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만큼 객관화시키기 어렵다는 말이다. 재미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보편성을 획득하고자하는 태도는 문학에서 가장 위험한 태도다. 굳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감동과 교훈을 고루 얻을 수 있는 소설을 만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 소설이라면 더욱 그렇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동굴>은 밀란 쿤테라의 <농담>을 읽었을 때의 극히 주관적 감동 상태와 유사하다. 늙은 소설가의 말년 작품은 극단적으로 위대하거나 초라하다. 나이와 연륜을 감당할 만한 작품들이 고루 탄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평범하고 지루해 보이는 이 소설이 내게는 깊은 심연의 ‘동굴’을 돌아보게 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세상에 대한 인식 방법을 회의하게 만든다. 이 소설의 제목이자 작가의 의도는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빛나는 작품이다.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보는 손과 목이 쇠사슬에 묶인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우리들의 자화상은 아닐까 반문하는 듯하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볼 수조차 없는 동굴 속의 나의 모습을 객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타인에게 투영된 나의 모습과 옆을 돌아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현대인의 우울한 뒷모습을 확인한 것은 나만의 공상일까?

평생 도자기 그릇을 구워온 노인과 그의 딸 그리고 사위, 한 동네에 사는 과부와 길을 잃고 노인에게 온 개 한 마리가 이 장편 소설의 등장 인물들이다. 단순한 구성과 밋밋한 갈등은 지루하고 나른한 소설로 팽개치기 십상이다. 더구나 인물들 간의 대화를 큰 따옴표로 묶지 않고 인용하듯 긴 문장들을 쉼표로 연결해 놓아 긴 호흡과 느린 템포를 유지한다. 노인의 시선과 서술자의 말투는 무더운 여름 오후의 거친 호흡처럼 답답하기까지 하다.

‘센터’는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노인의 모든 그릇이 이곳으로 납품되다가 일시에 거절당한 후 인형을 제작해 납품해보기로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센터에서 경비로 일하는 사위는 상주 경비원으로 승진해서 센터에서 제공하는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게 된다. 센터 밖에 거주하는 노인은 딸 내외를 따라 가기로 결심한다. 센터로 이주 한 후 지하 발굴 현장에 몰래 잠입해서 동굴의 실체를 확인한 후 다시 산업지대와 그린벨트를 지나 과부의 사랑을 확인하러 돌아온다. 사위와 딸도 동굴과 센터를 떠나 네 사람은 석양 속으로 먼 길을 떠나는 것으로 이 소설을 끝을 맺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동굴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비극적 인식에서 이 소설이 출발한다면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소설화한 해설서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의미는 동굴에 있지 않고 동굴 밖에 있다. 동굴을 포함한 센터와 센터 밖의 세계와의 대비가 아니라 두 세계를 포함한 세계 밖으로 길을 떠나는 네 사람의 여행 후기가 더욱 궁금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이 떠나는 세계는 양파 껍질처럼 겹겹이 둘러싸인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이 소설에는 서술자의 입을 통해 촌철살인의 인생에 대한 통찰들이 녹아 있다. 네 사람이 나누는 대화 사이사이 서술자가 개입하고 그 개입과 인물들의 대화가 하나가 된다. 그것은 대부분 아주 오랫동안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사유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내뱉을 수 없는 선언적 아포리즘들이다. 소설에 밑줄 그으면 읽는 일은 얼마나 우스운가. 그래도 다시 한 번 읽어보기 위해, 한 번 더 생각하며 여운을 즐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말할 가치가 없거나, 딱 한 번만 말하면 되는 말들로 가득 차 있다.(P. 48)”는 작가의 말은 길게 늘어 놓은 그의 소설 전체를 부정하는 말이 된다. 그렇게 많은 말들의 부질없음을 알고 있는 작가의 말에 귀기울여 볼만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독자들이 각자 찾아나서야 하는 모래밭에 바짝이는 작은 바늘 하일 수도 있다.


060629-0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