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산문답 - 개혁을 꿈꾼 과학사상가 홍대용의 고뇌
홍대용 원저, 김영호.이숙경 지음 / 꿈이있는세상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18세기 조선의 임금은 영조와 정조였다. 왕조 중심의 역사에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 인물에 대해 살펴 볼 때도 임금부터 확인한다. 나만 그런가? 당시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확인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한 인물의 생애와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결정적 사건을 찾아내는 일보다 그러한 토대를 제공한 상황이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18세기 조선은 이앙법으로 토지의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증가했으나 백성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고, 중국을 통해 자연 과학적 지식이 조금씩 전파 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유랑민이 발생했으며 상업 자본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자본과 권력이 결탁되고 신분 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한다. 예송 논쟁 등 그야말로 쓸데없는 소모적 권련 다툼이 이어지고 정조의 탕평책이라고 하는 개혁은 정약용 일가 등 천주교도에 대한 비교적 관대한 태도로 이어지지만 오히려 정조 사후 신유박해 등 피바람을 몰고 오는 원인이 된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변화와 개혁의 시도는 그 어떤 혁명보다도 어려운 법이다.

담헌 홍대용은 이런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다. 1731년에 태어난 홍대용은 18세기 실학자로 기억된다. 이덕무나 유득공, 박제가처럼 서자 출신도 아니고 노론 집안에서 태어나 출세가 보장된 그의 관심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노나라 공자의 유학이 주희의 성리학으로 굳어지면서 조선 사회는 철저하게 성리학적 이념이 통치의 근간이 된다. 이것은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백성들을 다스리는 이념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 태도와 사상적 근간이 되어 올가미처럼 벗어나기 힘든 것으로 만든다. 성리학에 대한 근본주의적 태도는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진 자들과 권력층의 기득권 옹호를 위한 전가의 보도가 된다.

홍대용의 기본 사상은 성리학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그의 사상의 단면을 확인 할 수 있는 책이 바로 <의산문답醫山問答>이다. 음직으로 40세가 넘어 관직에 나갈 때까지 홍대용은 치열한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둔 채 세상의 이치와 만물의 원리에 관심을 갖는다. 그가 보인 관심은 당연히 고정된 틀에 사로잡힌 조선 사회의 모순이다. 정확하게 문제를 짚어내고 대안을 제시한 해결사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혁명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만한 인물을 18세기 가질 수 있는 행복을 우리는 누리지 못한다. 동시대 인물인 박지원이 시대를 주유한 ‘유목민’으로 명명될 수 있을지 몰라도 시대를 온몸으로 거스른 실천적 지식인을 찾을 수는 없다.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살펴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자위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홍대용은 18세기 북학파 혹은 실학파의 대표 주자로 손색이 없는 인물인 것만은 틀림없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를 대표할 수 있는 특징은 종교에서 이성으로의 변환이다. 인간의 이성이 사물의 기준과 가치 판단의 근거가 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과학과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으로 이어진다. 관념론적 세계관으로 이해되지 않는 유물론적 세계관이 펼쳐지는 것이다. 물론 두 세계의 합종연횡은 이후 끊임없는 논쟁과 연구가 지속되지만 그러한 사유가 시작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18세기는 의미 있는 시대였다. 홍대용의 사상적 전환은 중국 방문에서 연유한다. 35세에 6개월간 북경에 다녀온 홍대용은 자연과학에 더욱 지대한 관심과 열의를 갖는다. 그러한 사유의 증거가 바로 이 책 <의산문답>이다.

허자虛字와 실옹實翁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홍대용은 기존의 통념을 명쾌하게 박살낸다. 이미 이름에서 감지하듯이 ‘허자’는 지금까지 가졌던 그릇된 지식과 사물에 대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 ‘실옹’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헛된 것들로 가득 찬 ‘허자’와 실재적인 것들로 무장한 ‘실옹’의 대화는 ‘허자’의 깨달음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풍자된다. 우회적이고 애매한 태도가 아니라 직접적이고 통렬한 방법으로 허자를 꾸짖는 실옹의 목소리는 바로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학자들에 대한 홍대용의 비판의 목소리로 들린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듯이 동양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단편적인 사실을 확인하는 책이 아니라 홍대용이 지니고 있는 사물에 대한 혹은 세계관 자체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과 ‘패더다임의 변환’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하는 책이다. 18세기에 이런 주장과 생각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당시의 현실과 그와 사상적 교류와 친분을 나눈 동시대 인물들에 대한 관심과 비교는 한층 더 흥미진진한 일이 될 것이다. 박지원과 정약용은 물론이고 북학파의 저작과 사상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생긴다.

겨우 250여 년 전 급격한 사회 변동이 일어나기 직전의 홍대용의 사상은 <의源??이라는 저작을 통해 그 단초를 제공한다. 19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근대’와 그 이후 ‘탈근대’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살펴보기 전에 그 변화의 조짐들을 읽어내는 일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짧은 내용에 중간 중간 해설을 덧붙이고 쉬운 말로 번역해 놓은 책이라서 원문과 멀어진 단점이 있고 해설 자체가 일반적이고 평범한 내용의 반복이라서 다소 지루한 느낌이 든다. 중간에 삽입된 해설 때문에 전체 내용의 흐름에 맥이 끊기기도 한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기획된 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출판사의 좋은 기획과 출판 의도가 좀 더 완성도 높은 책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060509-0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이 순간도 곧, 과거가 된다. 현재가 과거가 되고 미래가 금방 현재가 되어 버린다. 시간의 모든 주름들 사이로 시간은 하나가 되고 일직선상의 모든 흐름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의 고리가 되는 순간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공간을 탈주하라.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모든 시공간의 의미에 대해 해체와 분석을 시도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사람에게 고미숙의 <나비와 전사>는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근대를 넘어 탈근대 이후의 삶과 앎의 의미를 고민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거쳐 가야할 텍스트로 손색이 없는 훌륭한 책이다.

  ‘푸코가 고고학적 탐사를 무기로 근대성의 지축을 뒤흔든 전사라면, 연암은 그 위를 사뿐히 날아올라 종횡으로 누비는 나비’라는 저자의 표현은 이 책의 의미 전반을 투사하는 조명등이다. 18세기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가 이루는 세 개의 그물망이 이 책을 가로지르는 의미망이다. 그런데 이 의미망이 만만치가 않다. 그리고 대단히 혼란스러울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고미숙의 의도는 텍스트 전체가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는 책이 아니라 사유의 틀을 제공하고 각 장의 의미들이 엮어내는 경계들을 넘나들며 나비처럼 자유롭게 ‘앎의 혁명’을 꿈꾸고 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지식 코뮌에서 숙성된 고미숙의 글은 ‘그 밖의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학문적 틀 안에 갇힌 아카데미즘과 학술 보고서에 기초한 죽은 지식들의 파편들을 해체한 후, 죽어버린 지식과 인식의 틀을 바로 잡고 인공호흡을 통해 생명의 따스한 온기를 불어 넣는 신통력을 발휘한다. 이 신통력은 사이비나 이단, 사파로 분류될 수 없는 강렬한 흡인력을 갖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뛰어난 글쓰기 능력 때문이다. 이 능력은 독자에게 충분한 설득력과 긴장감을 동시에 공급한다. 18세기의 동양사를 가로지르는 깊이와 넓이는 설득력을 높이는 지적 헛기침이 아니라 자유롭게 확대 재생산된다. 적절한 인용과 글의 흐름에 탄력을 붙이는 솜씨가 일품이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고미숙만한 성찬을 준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스타일리스트의 일면을 여지 없이 보여주는 글이다.

  ‘나비’로 상징되는 박지원의 글쓰기에 숨어있는 유쾌하고 발랄함을 기본으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인용하면서 ‘근대’가 우리에게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다가 왔는지 흥미진진하게 근대의 접힘과 펼침을 반복한다. 이런 방식은 각 장 첫머리에 인용되는 ‘푸코’를 통해 재확인된다. ‘전사’의 냉정함과 날카로움은 고미숙이 꿈꾸는 이중적 방식 중의 하나였겠지만 내용이 아니라 전체를 구성하는 틀과 근대를 바로보는 인식 방법으로 재현된다. 그래서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연암에게서 춤사위를 빌려 왔으나 안무는 푸코에게 맡긴 것 같다.

느림 또는 시간의 유목주의란 이 ''얼빠진'' 일정표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코드화된 방향을 벗어나 새로운 리듬을 만드는 것. 삶과 지식의 새로운 배치를 구성하고,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이질적인 집단들의 네트워크를 만들 때 속도, 균질화, 화폐의 삼중주는 깨어진다. …… 느림의 또 다른 표상은 자기속도를 지니는 것이다. 순간속도가 강렬도의 문제라면, 자기속도는 이질성과 관련된 사항이다. 노마드의 여정에는 목적지가 없다. 아니, 여정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해야 맞다. 따라서 그는 여정마다에서 마주치는 온갖 대상들과의 능동적 접속을 시도한다. - P. 84

  이 책의 출발은 우리가 인지하는 시공간에 대한 개념이다. 여기에서부터 일탈이 시작된다. 직선상의 펼쳐진 팽팽한 긴장감. 이것이 우리의 일상에서 부딪히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다. 이곳으로부터 탈주해야 우리는 그녀가 안내하는 여행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책의 전체 구성은 ‘시공간-인간-성-몸-앎-글쓰기’으로 되어 있다. 11장으로 각 장이 구분되어 있으나 말과 사물들이 두서 없이 충돌하는 자유로운 해방의 공간이다. 여정 자체가 목적인 노마드는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인간의 존재와 성(性)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하는 몸에 대한 성찰이 안을 들여다보는 과정이라면 앎과 글쓰기는 밖으로 표출되는 존재 방식이다. 고미숙은 인간의 존재 방식으로 글쓰기를 택했다고 스스로 선언한다. 공부해서 글쓴다.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부럽다! 젠장!

  그러나 그 당당함과 유쾌함에 독자들은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다. 최근에 읽었던 수잔 손탁의 <은유로서의 질병>, 홍대용의 <의산문답> 등 근대를 이야기하는 중요한 주제와 관심사, 필수적인 저작들이 절묘하게 녹아 있기 때문에 편안하고 쉽게 쓰여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완전히 소화해내고 적절하게 버무리는 솜가 일품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 바로 여기에 있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텍스트가 이렇게 재밌게 읽히는 것은 독립적인 장과 절들의 재미와 유기적인 연관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특별한 주장이나 핵심적인 요소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지식들간의 합종 연횡, 주름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여유, 깔끔하고 탄력적인 문장들의 조합은 이 책의 가치를 배가 시켜준다.

  이 책의 고별사에 적힌 다음 글에 공감하며 나도 평생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공부는 더 이상 취미나 교양이 아니다. 더 이상 소위 전문가 집단이 독점하는 사적 소유물이 아니다. 한번 생각해보라. 우리네 삶에서 날마다 하고, 평생을 해도 변함없이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공부 말고 달리 무엇이 있는지를. 그러므로 대학 안에 있건 없건 누구나 평생 배워야 한다. 아무런 실용적 목적이 없어도 공부할 수 있을 때, 그때 공부는 비로소 최고의 지식이면서 동시에 자기 삶을 통찰하는 지혜의 수행이 된다.
공부와 일상이 이렇게 오버랩될 때, 지식은 비로소 근대적 표상으로부터 탈주하여 삶의 역동적 흐름 속으로 진입할 수 있으리라. "마음을 비워 공부함에 있어 사해(四海) 안에 모두가 형제(兄弟)이며, 중생(衆生)이 모두 깨달음의 스승들이다." 고로, 공부에 외부는 없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 P. 592


060512-057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leeza 2007-09-09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쾌한 리뷰 보면서 다시 한번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글을 쓴다는 건 많은 노하우가 필요한 거지만, 쓸 때만큼은 자기를 잊고 책의 내용에 흠뻑 잠기어 절단.채취하는 것이 더 중요한 거 같아요~
 
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각적 이미지에 의해 좌우되는 인간의 의식은 은유를 동반한다. 더구나 색채가 주는 강렬함은 이성적 판단을 넘어선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종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색깔에 대한 문화적 습성은 원형적 이미지를 벗겨내지 못하고 한 민족이나 모든 인류에게 고착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 지금도 변화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다만 겉으로 표현을 하느냐 마느냐가 문제일 따름이다. 금기시 되어 있는 법적 효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을 지배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아직도 선입견을 넘어선 차별을 경험한다. 이 차별은 당연한 차이에서 비롯되었으나 현실에서의 변화는 만만치 않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매일 부딪히는 문제다. 동남아 노동자들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뿌리 깊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미국과 서구 유럽에 대한 근대의 열망으로 이어졌다. 혹자는 ‘한국 속의 세계’를 외치지만 아직도 오리엔탈리즘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약육강식의 국제질서는 빈틈없이 진행되고 있으며 자본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인간의 권리와 차별의 거부는 작은 외침으로 공허하게 들릴 때가 많다. 뿌리 깊은 인간의 의식의 원형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이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얼마나 탁월한 사상가들을 배출했는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변화와 삶의 본질적 모습이다. 그 끝이, 완성된 이상적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없으나 다만 변화와 발전의 과정이라는 낙관적 전망만이 오늘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될 지도 모른다.

  1951년 스물 일곱의 나이에 쓰여진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2006년에 읽는 심회를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영향을 끼친 명저의 공통점은 선구적 안목과 새로움, 탁월한 분석과 이론으로 보편성과 항구성을 유지한다. 다양한 가치를 긍정하고 인류의 사상사에 진일보한 족적을 남긴 책으로 손꼽히는 책들은 시대의 아픔을 담고 있거나 고통스런 사유의 결과물이다. 검은 피부를 가진 앙띨레스 출신 정신분석 의사가 써내려간 한 줄 한 줄이 뼈에 사무쳤을 것이다. 이 책은 프란츠 파농의 육성 고백을 듣는 느낌을 전해준다.

  흑인의 정체성을 거론하는 것은 ‘타자’화된 ‘백인’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서두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앙띨레스 출신 흑인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곧 흑인 전체를 대표하는 전형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유색인 여성과 백인 남성, 유색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관계를 고찰하고 동 시대인들의 관찰과 저작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식민지 민중의 의존 콤플렉스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글은 스물 일곱 청년의 육성이 배어 있다. 특히 흑인성이나 흑인과 정신병리, 흑인과 인정투쟁을 이야기할 때 드러나는 감정적 진술은 오히려 객관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인 검은 피부에 대한 회한과 절규로 들린다. 검은 피부가 백인에게 주는 은유들이 수없이 많다. 특히 사르트르의 <반유대주의와 유태인>을 인용하면서 흑인과의 유사성과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은 탁월하다. 유럽인들의 트라우마인 반유대주의와 흑인에 대한 반응은 겹침과 펼침을 적절하게 분석하고 있다. 백인들이 흑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편견과 흑인들 스스로 규정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원칙적으로 무언가를 기술한다는 것의 의미는 비판적 접근을 내포한다. 따라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는 해결책을 모색해 보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P - 203

  원칙과 나이와 상관관계는?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아직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는 해결책’을 고민하는 프란츠 파농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서른 여섯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생을 마감한 그의 고뇌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프랑스의 흑인 문제로 국한된 것처럼 보이는 그의 글은 이후 그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커다란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60년대 킹 목사나 말콤 X의 방법과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근본적 원인은 동일하다. 이십대에 프란츠 파농이 겪은 사유 과정이 시대를 넘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직도 그의 고민이 끝나지 않은 채 흑인 문제 뿐만 아니라 차별과 편견이라는 서로 다른 문제들에 공통적인 접근법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의 말이 현재형으로 다가오는 것은 반성적 태도를 요구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일 것이다. 프란츠 파농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세상을향한 웅변으로 들리는 이유는 검은 피부보다 더 역겨운 하얀 가면들이 세계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연구를 끝마치면서 나는 희망한다. 이 세계가 나와 더불어 활짝 열려진 모든 종류의 의식의 문을 느낄 수 있기를 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기도한다.
  “오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P - 292


060517-0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센티멘털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세상의 모든 우연들이 관계를 만들어 간다. 독자가 한 작가를 만나는 것은 선택과 우연 이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 간접적인 만남은 직접적인 인간관계보다 의사소통의 장을 마련하고 깊이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일방적으로 혹은 맹목적으로 작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작가에 대한 모독이다. 우연히 만난 일본의 젊은 작가와의 만남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세기말에 만난 히라노 기이치로의 소설 <일식>은 대가의 탄생을 예고했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아깝지 않은 작품으로 기억한다.

최근 다시 주목받을 때까지 그를 잊고 있었다. 이후 <달>과 최근에 <장송>이 출판되면서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3부작이 마무리 되었다. 두 소설을 천천히 읽어야겠다. 책 읽는데 순서가 있을 수 없지만 그의 소설집 <센티멘탈 in a sentimental mood>은 장송 이후에 쓴 단편들의 모음이다. 이 책에서도 젊은(?) 소설가의 특성은 유감없이 발휘되는 느낌이다. 소설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무엇이며 앞으로의 전망이 어떨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3부작이 주로 중세와 근대에 대한 치밀한 탐구 정신의 산물이었다면 이 단편들은 드디어 현대와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의 시간들을 바탕으로 현재가 구성되어 있다는 직선적인 시간 개념에 입각해서 순차적인 소설쓰기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연소 아쿠타가와상 수상자라는 천재성이 말해주는 외형적인 개성도 도쿄대 법학부 재학생으로 무심히 게재한 소설의 수상으로 그의 관심이 변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무명으로 끝나버리거나 문학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다면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겠지만.

지금, 여기, 우리들의 이야기를 벗어난 소설을 생각할 수는 없다. 모든 작가들의 관심이 시공간을 넘나들더라도 결국 현재성을 확보하고 인간의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 정신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소설의 한계와 범위를 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인 소설의 본령을 생각해 보면 히라노의 게이치로의 소설은 이제 공시적 관점으로 전환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얼마나 깊고 예리한 혹은 폭넓고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는 작가의 역량과 선택에 달려 있다. 작은 단편집에 실린 소설은 겨우 네 편이다. 그러나 네 편이 가지고 있는 무게가 만만치 않다. ‘청수淸水’는 그가 꾸준히 천착해온 철학적 주제들과 맥을 같이 한다. 무한한 시공간 속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기억과 연결시키는 솜씨가 일품이다. 단순한 사소설을 넘어서 일상을 한계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나머지 세 작품은 각각 특별한 맛과 취향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표제가 된 ‘다카세가와’는 도쿄 북쪽의 강이다. 이 강변에서 벌어지는 젊은 소설가 오노와 잡지사 여기자 유미코의 섹스 장면에 대한 묘사가 노골적이다. 사랑의 의미를 묻는 대신 남녀간의 관계에 대한 세밀화가 오히려 극적인 재미를 더해준다. 부분의 묘사는 전체를 조망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이 단편에 등장하는 존 콜트레인과 듀크 엘링턴의 노래 ‘in a sentimental mood’를 들으며 읽는다면 감각적 이미지들이 살아 움직일 것이다. 사랑과 섹스에 대한 진부한 질문 대신에 현실적인 풍경이 오히려 그로테스크하다. 해체주의 시를 대할 때의 생경함과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추억’은 내용과 형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교묘한 퍼즐같은 작품이다. 작가의 의도와 고정된 틀에 대한 회의가 독자를 낯설게 한다. 마지막 작품인 ‘얼음 덩어리’는 새로운 형식과 내용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2단 편집으로 같은 페이지의 오른쪽과 왼쪽의 내용이 다르다. 동시에 벌어지는 다른 공간의 이야기가 교차 편집되어 있다.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기법이다. ‘롤라런’이나 ‘라 빠르망’을 기억하는 관객은 이 소설을 그렇게 읽을 수 있겠다. 중간중간 교차 혹은 중복되는 내용을 맞추기 위해 텍스트의 길이까지 세심하게 신경써야 하는 실험은 새로움으로 끝나지 않고 정교한 틀로 인식된다. 많지 않은 단편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새로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책은 많지 않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센티멘탈>은 그의 장편들을 읽기 전에 가볍게 접근하는 에피타이저나 장편들을 읽은 후의 디저트로도 좋다. 다만 장편을 장식하는 부록으로 읽지만 않는다면.

소설가의 나이가 젊다는 것은 많은 가능성과 기대감을 갖게 한다. 국적과 문화를 넘어서 흥미로운 새로운 작품들을 읽어나가는 재미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달>과 <장송> 그리고 번역중인 작품들이 남겨졌다. 천천히 음미하는 즐거움을!


060519-0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 또 하나의 세계 - 근사체험을 통해 다시 생각하는 죽음
최준식 지음 / 동아시아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작은 새가 알의 껍데기를 까고 날아가듯이
우리도 몸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나 날아간다.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죽음은 형태(form)의 변화일 뿐이다.

  우리는 단 하루도 죽음과 헤어져 본 적이 없다. 태어나는 순간, 생명을 얻는 순간 죽음은 시작된다. 무덤을 향한 끊임없는 질주가 우리의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이 생의 끝자락 어디쯤엔가 놓여 있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무엇으로 치부된다. 제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죽음과 대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물학적 논쟁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대한 논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죽음 이후가 아니라, 삶 이후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지금 우리들의 삶이 오히려 훨씬 더 풍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인도의 어떤 구루(영적스승)가 남긴 시 한편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나머지는 모두 주금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 이 시가 뛰어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분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또 다른 믿음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식과 인식 저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한 깨달음이거나 죽음의 이쪽편인 삶에 대한 반성적 태도이다.

  서양의 연속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항상 삶과 함께 하는 것이며 육체적 죽음은 하나님 곁으로 떠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삶과 죽음은 분리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신의 뜻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독교적 윤리관에서 보면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목적대로 도구적 삶의 형태를 띠고 있다. 반면 동양의 불연속적 세계관은 죽음을 극도로 혐오한다. 삶과 죽음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으며 이승과 저승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전혀 다른 형태의 시공간이 존재한다. 불교나 유교적 관점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죽음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대해서는 동일하다.

  최준식의 <죽음, 또 하나의 세계>는 일상에서 우리가 고민하는 죽음에 대한 고민의 단초를 제공한다. ‘근사체험을 통해 다시 생각하는 죽음’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주된 관심은 ‘근사체험near-death experience:NDE’에 두고 있다. 사람이 죽은 이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당연해 보인다. 저자는 우선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안락사에서 존엄사까지 의학적, 생물학적 죽음의 정확한 정의에서 죽음의 문제를 시작한다. 인간에게 죽음의 공포만큼 두려운 것이 있을까. 우리말에 ‘무섭다’는 대상이 존재할 때 사용하며, ‘두렵다’는 말은 대상을 알 수 없거나 특정 대상이 없을 때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죽은은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이 죽음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결국 죽음에 대한 고찰이 지닌 의미가 될 것이다.

  본격적으로 죽음 뒤의 세계를 살펴보면 체외이탈과 어둔 공간 속의 터널 체험을 거쳐 빛의 존재를 만난다. 그리고 장벽을 만나게 되며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장벽 앞에서 몸으로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다. 지역과 종교, 인종과 성별, 연령과 민족에 따라 다양하게 근사체험의 형태가 나타나지만 그것은 사회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차이일 뿐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임사체험>과 레이먼드 무디, 퀴블러 로스 등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근사체험에 대한 이야기들을 일목요연하게 잘 풀어주고 있다. 다양한 사례 수집과 수집된 자료 분석으로 통계를 내고 특징들을 분석하는 사회과학적 방법이 죽음을 말해 줄 수는 없다. 다만 이런 노력들이 죽음에 관한 인간의 두려움과 호기심에 대한 작은 해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의학계와 종교계의 견해는 여전히 부정적이다. 약물에 의한 환각 작용 실험 등 근사체험 자체를 부정하기 위한 실험도 있었고 종교적 교리와 배치된다는 이유로 근사체험을 부정하는 종교도 있다. 중요한 것은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그 잣대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일이다. 사후 세계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근사 체험을 한 사람들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근사체험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차분히 고민해 볼 일이다. 이 책의 저자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식에 내가 동의하게 된 이유도 죽음이 지금 현재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다.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게 된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존재의 상실감에 대한 허무로 발전한다. 종교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이유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죽음에 淪?깊이 고민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권해볼만한 책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죽음에게 물어보라. 잘 살기 위해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고민해보자.

  이슬처럼 사라져간 이슬이도 그 밝은 빛의 터널 속에서 평안하길 빌면서……


060523-0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