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멘털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세상의 모든 우연들이 관계를 만들어 간다. 독자가 한 작가를 만나는 것은 선택과 우연 이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 간접적인 만남은 직접적인 인간관계보다 의사소통의 장을 마련하고 깊이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일방적으로 혹은 맹목적으로 작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작가에 대한 모독이다. 우연히 만난 일본의 젊은 작가와의 만남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세기말에 만난 히라노 기이치로의 소설 <일식>은 대가의 탄생을 예고했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아깝지 않은 작품으로 기억한다.

최근 다시 주목받을 때까지 그를 잊고 있었다. 이후 <달>과 최근에 <장송>이 출판되면서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3부작이 마무리 되었다. 두 소설을 천천히 읽어야겠다. 책 읽는데 순서가 있을 수 없지만 그의 소설집 <센티멘탈 in a sentimental mood>은 장송 이후에 쓴 단편들의 모음이다. 이 책에서도 젊은(?) 소설가의 특성은 유감없이 발휘되는 느낌이다. 소설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무엇이며 앞으로의 전망이 어떨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3부작이 주로 중세와 근대에 대한 치밀한 탐구 정신의 산물이었다면 이 단편들은 드디어 현대와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의 시간들을 바탕으로 현재가 구성되어 있다는 직선적인 시간 개념에 입각해서 순차적인 소설쓰기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연소 아쿠타가와상 수상자라는 천재성이 말해주는 외형적인 개성도 도쿄대 법학부 재학생으로 무심히 게재한 소설의 수상으로 그의 관심이 변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무명으로 끝나버리거나 문학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다면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겠지만.

지금, 여기, 우리들의 이야기를 벗어난 소설을 생각할 수는 없다. 모든 작가들의 관심이 시공간을 넘나들더라도 결국 현재성을 확보하고 인간의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 정신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소설의 한계와 범위를 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인 소설의 본령을 생각해 보면 히라노의 게이치로의 소설은 이제 공시적 관점으로 전환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얼마나 깊고 예리한 혹은 폭넓고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는 작가의 역량과 선택에 달려 있다. 작은 단편집에 실린 소설은 겨우 네 편이다. 그러나 네 편이 가지고 있는 무게가 만만치 않다. ‘청수淸水’는 그가 꾸준히 천착해온 철학적 주제들과 맥을 같이 한다. 무한한 시공간 속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기억과 연결시키는 솜씨가 일품이다. 단순한 사소설을 넘어서 일상을 한계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나머지 세 작품은 각각 특별한 맛과 취향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표제가 된 ‘다카세가와’는 도쿄 북쪽의 강이다. 이 강변에서 벌어지는 젊은 소설가 오노와 잡지사 여기자 유미코의 섹스 장면에 대한 묘사가 노골적이다. 사랑의 의미를 묻는 대신 남녀간의 관계에 대한 세밀화가 오히려 극적인 재미를 더해준다. 부분의 묘사는 전체를 조망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이 단편에 등장하는 존 콜트레인과 듀크 엘링턴의 노래 ‘in a sentimental mood’를 들으며 읽는다면 감각적 이미지들이 살아 움직일 것이다. 사랑과 섹스에 대한 진부한 질문 대신에 현실적인 풍경이 오히려 그로테스크하다. 해체주의 시를 대할 때의 생경함과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추억’은 내용과 형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교묘한 퍼즐같은 작품이다. 작가의 의도와 고정된 틀에 대한 회의가 독자를 낯설게 한다. 마지막 작품인 ‘얼음 덩어리’는 새로운 형식과 내용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2단 편집으로 같은 페이지의 오른쪽과 왼쪽의 내용이 다르다. 동시에 벌어지는 다른 공간의 이야기가 교차 편집되어 있다.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기법이다. ‘롤라런’이나 ‘라 빠르망’을 기억하는 관객은 이 소설을 그렇게 읽을 수 있겠다. 중간중간 교차 혹은 중복되는 내용을 맞추기 위해 텍스트의 길이까지 세심하게 신경써야 하는 실험은 새로움으로 끝나지 않고 정교한 틀로 인식된다. 많지 않은 단편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새로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책은 많지 않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센티멘탈>은 그의 장편들을 읽기 전에 가볍게 접근하는 에피타이저나 장편들을 읽은 후의 디저트로도 좋다. 다만 장편을 장식하는 부록으로 읽지만 않는다면.

소설가의 나이가 젊다는 것은 많은 가능성과 기대감을 갖게 한다. 국적과 문화를 넘어서 흥미로운 새로운 작품들을 읽어나가는 재미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달>과 <장송> 그리고 번역중인 작품들이 남겨졌다. 천천히 음미하는 즐거움을!


060519-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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