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각적 이미지에 의해 좌우되는 인간의 의식은 은유를 동반한다. 더구나 색채가 주는 강렬함은 이성적 판단을 넘어선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종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색깔에 대한 문화적 습성은 원형적 이미지를 벗겨내지 못하고 한 민족이나 모든 인류에게 고착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 지금도 변화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다만 겉으로 표현을 하느냐 마느냐가 문제일 따름이다. 금기시 되어 있는 법적 효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을 지배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아직도 선입견을 넘어선 차별을 경험한다. 이 차별은 당연한 차이에서 비롯되었으나 현실에서의 변화는 만만치 않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매일 부딪히는 문제다. 동남아 노동자들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뿌리 깊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미국과 서구 유럽에 대한 근대의 열망으로 이어졌다. 혹자는 ‘한국 속의 세계’를 외치지만 아직도 오리엔탈리즘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약육강식의 국제질서는 빈틈없이 진행되고 있으며 자본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인간의 권리와 차별의 거부는 작은 외침으로 공허하게 들릴 때가 많다. 뿌리 깊은 인간의 의식의 원형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이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얼마나 탁월한 사상가들을 배출했는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변화와 삶의 본질적 모습이다. 그 끝이, 완성된 이상적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없으나 다만 변화와 발전의 과정이라는 낙관적 전망만이 오늘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될 지도 모른다.

  1951년 스물 일곱의 나이에 쓰여진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2006년에 읽는 심회를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영향을 끼친 명저의 공통점은 선구적 안목과 새로움, 탁월한 분석과 이론으로 보편성과 항구성을 유지한다. 다양한 가치를 긍정하고 인류의 사상사에 진일보한 족적을 남긴 책으로 손꼽히는 책들은 시대의 아픔을 담고 있거나 고통스런 사유의 결과물이다. 검은 피부를 가진 앙띨레스 출신 정신분석 의사가 써내려간 한 줄 한 줄이 뼈에 사무쳤을 것이다. 이 책은 프란츠 파농의 육성 고백을 듣는 느낌을 전해준다.

  흑인의 정체성을 거론하는 것은 ‘타자’화된 ‘백인’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서두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앙띨레스 출신 흑인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곧 흑인 전체를 대표하는 전형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유색인 여성과 백인 남성, 유색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관계를 고찰하고 동 시대인들의 관찰과 저작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식민지 민중의 의존 콤플렉스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글은 스물 일곱 청년의 육성이 배어 있다. 특히 흑인성이나 흑인과 정신병리, 흑인과 인정투쟁을 이야기할 때 드러나는 감정적 진술은 오히려 객관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인 검은 피부에 대한 회한과 절규로 들린다. 검은 피부가 백인에게 주는 은유들이 수없이 많다. 특히 사르트르의 <반유대주의와 유태인>을 인용하면서 흑인과의 유사성과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은 탁월하다. 유럽인들의 트라우마인 반유대주의와 흑인에 대한 반응은 겹침과 펼침을 적절하게 분석하고 있다. 백인들이 흑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편견과 흑인들 스스로 규정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원칙적으로 무언가를 기술한다는 것의 의미는 비판적 접근을 내포한다. 따라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는 해결책을 모색해 보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P - 203

  원칙과 나이와 상관관계는?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아직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는 해결책’을 고민하는 프란츠 파농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서른 여섯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생을 마감한 그의 고뇌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프랑스의 흑인 문제로 국한된 것처럼 보이는 그의 글은 이후 그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커다란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60년대 킹 목사나 말콤 X의 방법과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근본적 원인은 동일하다. 이십대에 프란츠 파농이 겪은 사유 과정이 시대를 넘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직도 그의 고민이 끝나지 않은 채 흑인 문제 뿐만 아니라 차별과 편견이라는 서로 다른 문제들에 공통적인 접근법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의 말이 현재형으로 다가오는 것은 반성적 태도를 요구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일 것이다. 프란츠 파농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세상을향한 웅변으로 들리는 이유는 검은 피부보다 더 역겨운 하얀 가면들이 세계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연구를 끝마치면서 나는 희망한다. 이 세계가 나와 더불어 활짝 열려진 모든 종류의 의식의 문을 느낄 수 있기를 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기도한다.
  “오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P - 292


060517-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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