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시옷 - 만화가들이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손문상.오영진.유승하.이애림.장차현실.정훈이.최규석.홍윤표 지음 / 창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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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 단일어가 있고, 서로 기대어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복합어가 있는데 이것은 다시 합성어와 파생어로 나뉜다. 의미가 분명한 어근과 어근이 합쳐지는 단어 형성 방법을 합성어라고 한다. ‘사이시옷’은 이렇게 자기 색깔과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단어의 합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음운현상이다.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사람은 모두 독립적 개체다. 서로 기대지 않고 홀로 서는 것도 가능하지만 기대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이시옷’은 무엇일까? ‘사이시옷’의 역할을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사람들은 모르는 것일까? 그래서 이런 책이 필요한 것인가.

  또한 ‘사이시옷’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한자인 사람 ‘人’자와 닮았다. 상형문자인 한자의 의미는 뚜렷하다. 홀로 설 수 없는 두 사람이 기대 선 모습이라고 한다. 다정하고 행복해 보일수도, 불행의 근원이자 비참한 한계를 드러내 보이는 모습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인간은 홀로 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는 대다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2003년에 나온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는 만화책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나도 수십년만에 만화책을 사 보았다. 만화라는 형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은 다른 장르나 매체보다 강렬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든 만화책이라는 선입견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극명하게 보여 준 수작으로 기억한다. 후속편 격인 ‘사이시옷’도 역시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만화가들 8명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제 지나가던 강아지도 ‘사회 양극화’ 문제를 이야기하는 시점이다. 그만큼 심각하다. 참여정부의 남은 기간을 ‘양극화 해소’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청와대 비서실장의 인터뷰 기사는 오히려 현실을 비참하게 한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 무심코 책장을 넘기면 눈물을 한 방울 흘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실화를 소재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손문상의 만화가 인상적이다. 장애인과 사교육 문제 등 심각한 현안들을 다루고 있지만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고 지적하면 곤란하다. 문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날개를 잘라버린 아이들의 이야기나 마법학교 ‘호구왔다’에서 보여주는 이야기는 해결해야할 문제라기보다 인식과 태도의 문제라고 보아야한다. 나홀로 꿈꾸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꿈을 꾸면 현실이 되는 세상을 사람들은 꿈꾼다. 하지만 절대로 쉽게 변하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이기적 경쟁심, 시장과 자본의 논리를 앞세운 자유 경쟁의 원칙을 고수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일은 쉽지 않은 문제다.

  우리 사회는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힘이 없거나 결속이 약하다. 목숨을 건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극복할 만한 대책은 마련되지 않은 채 시간은 흘러가고 느리고 더딘 형태의 노력들은 지속되고 있으나 현실은 그에 상응하는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공공성을 전제로 한 정부의 정책은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은 한 ‘언발에 오줌누기’식 정책에 그칠 우려가 있다. 개별적 상황과 구체적 사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전국민이 토론에 나서 몇 만년 걸려도 답이 안나오겠지만 우리 사회가 나갈 방향과 정책 목표가 확실하다면 사실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각론은 다를 수 있고 논쟁도 가능하다. 사회적 합의와 타협은 요원해 보인다. 스웨덴식 사회적 대타협 이야기는 ‘쾌도난마 한국경제’의 장하준 이야기에 과민 반응하는 정부 경제 부처 각료들의 이상주의로 비쳐지기도 한다. 철학적 이념적 틀이 공고하지 않은 정부 여당의 일관성 없는 태도와 미온적인 정책들이 답답해 보이는 것은 개인적이 과격성 때문인가. 혼자 흥분해서 별 쓸데없는 이야기로 와전됐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두 번째 만화책 ‘사이시옷’은 ‘십시일반’만큼 의미 있는 작업이다. 지하철에 비치해서 온 국민이 멀뚱히 보낼 시간을 때워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옴니버스식 영화 ‘여섯 개의 시선’을 설특집 영화로 방영되어 온가족이 둘러 앉아 함께 보는 상상을 해 본다. 작은 차이와 조그만 노력들이 얼마나 큰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말해야 아는가. 개별적인 시각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마지막 만화 ‘창窓’은 군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등병과 병장의 시선은 다르다. 수십억, 수백억을 가진 사람들과 전기가 끊겨 촛불을 켜야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다르다. 개인적 노력과 경쟁의 논리를 넘어선자리에 합의점이 있지 않을까? 없으면 말고……


060216-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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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 네그리가 말하는 네그리, 안느 뒤푸르망텔과의 대화
안토니오 네그리.안느 뒤푸르망텔 지음, 윤수종 옮김 / 이학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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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토니오 네그리와 토니 네그리는 다른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네그리 자신이다. 사회적 가면과 본질적 자아 사이의 충돌은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상황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네그리를 persona와 anima의 대립과 갈등으로 살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행간에 녹아 있는 네그리의 내적 갈등과 고민의 깊이에 공감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하는 말일 뿐이다.

  내가 처음 만난 안토니오 네그리는 안토니오 그람시와 닮았다. 20세 초 파시즘이 극에 달할 무렵 이탈리아 공산당을 이끌었던 그람시의 생애와 사상이 안토니오 네그리를 통해 20세기 후반으로 이어지는 듯한 착각을 하게 한다. 치열한 삶에 대한 대가는 이기적 욕망과 거리가 멀다. 모든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사회적 욕망의 확대라고 해석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아집과 독선과 구별하기 위한 사회적 삶은 때때로 숭고하게 느껴진다. 옥중에서 사망한 그람시와 이제 겨우 자유의 몸이 된 네그리는 이탈리아라는 공통된 조국을 배경으로 시대를 달리하는 숭고한 힘으로 느껴진다.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안경너머의 네그리의 눈빛은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입가에 머문 미소는 의미 심장해 보인다. 갑자기 왠 관상인가.

  이 책은 네그리를 읽기 위한 전채 요리쯤 되겠다. 네그리 스스로가 말하는 생애와 사상이 솔직하고 담백하게 대담 형식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안느 뒤푸르망텔과의 대화를 통해 네그리를 읽을 수 있다. 막연한 주제와 인터뷰 형식이 아니라 알파벳 A(무기arme, 습격attentat, 미래avenir…)부터 Z(엘레아의 제논zenon d''Elee)까지 분명한 어휘와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에 자유스러우면서 선명한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네그리의 가장 큰 장점은 이탈리아 투쟁의 선봉에 선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체계적인 생각들이다. 폭†좇?철학적 지식을 배경으로 이론과 실천의 조화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한다. 편견과 좁은 시야로 오로지 한가지 목적에 매달리는 맹목성도 아니고 통합주의를 주장하는 위험한 줄타기도 아니다. 분명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한 이론과 실천은 쉽게 접근하기 힘든 점이 있다. 좀 더 읽고 파악해야 할 부분으로 남겨진다.

  행동하고 투쟁하는 것이 창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목소리는 ‘진보’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과격한 ‘혁명’이나 온건한 ‘개혁’이냐의 문제는 시대와 나라를 초월해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회적 갈등이다. 우리의 문제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갈등과 모순들은 해법이 다르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니 처방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모두가 동의하는 대안이 불가능하겠지만 네그리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깊이 반성해 볼 일이다. 

진리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진영을 선택하는 것에서 벗어난 진리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과학이 중립적이라고 주장할 때, 사람들은 과학이 무력하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삶이 중립적이라고 주장할 때, 사람들은 삶이 무기력하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전투적 태도, 그것은 사람들이 진리의 즐거움과 삶의 쾌락에 접근할 수 있는 형식입니다. 전투적 태도는 충만한 열정에 일치하는 언어적 장을 발전시키고, 삶의 살을 특이한 신체로 변형시킵니다. - P. 57

  진리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전언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현실에서 진영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진리는 각기 다른 형상을 하게 된다. 진리 이전의 문제를 고민하는 상황에서 ‘전투적 태도’야 말로 네그리 사상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선택과 갈등은 삶의 한 양상이니 그리고 전투적 태도와 투쟁이야말로 삶을 이끌어 나가기 위한 도구이자 분명한 방편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안토니오 네그리가 안토니오 그람시와 닮았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은 바로 세계를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형하고 세계를 발명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혁명하는 것입니다. - P. 240


060218-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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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신화의 수수께끼 - 아주 오래된 우리 신화 속 비밀의 문을 여는 30개의 열쇠
조현설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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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가 가지고 있는 상상력은 예술적 상상력의 원천이다. 인류가 이룩해 온 역사와 신화는 이성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꿈과 소망, 무의식과 욕망이 뒤섞인 본질적인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신화 속에 감추어진 각 민족의 정체성은 민족과 국가를 형성하는 기원과 바탕 틀이 된다. 인류의 예술적 상상력은 여기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민족의 기원과 결속을 다지고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이야기를 공유하는 내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신화는 인류의 과거이며 현재이고 영원한 미래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성공한 이유는 쉽게 풀어썼기 때문이다. 어렵고 복잡해서 신들의 이름이나 몇 명 외다가 책장을 덮어 버리던 이야기를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로 풀어낸다. 저자의 신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열정이 숨어 있고 탄탄한 문장과 이해하기 쉬운 문장 구성으로 사람들에게 성큼 다가선 신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후 신화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만화로 출간된 ‘그리스 로마 신화’는 상업 출판물이라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외하더라도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양 중심의 신화가 이토록 열풍을 일으키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야기’ 자체에 대한 관심과 흥미는 인간의 본능적 속성에 해당한다. 그것을 말릴 수는 없다.

  조현설의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는 편집의도와 구성면에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오래된 우리 신화 속 비밀의 문을 여는 30개의 열쇠’라는 부제도 그렇거니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그러하다. 표절이나 아류 시비는 아니지만 다른 접근 방식에 대한 고민이 아쉽다. 더구나 우리 신화는 보편성과 지역성이 강해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다. 신화는 민간에서 전승되는 전설과 민담으로 정착되거나 변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내용도 많고 같은 이야기의 다른 결말도 많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화는 건국 신화가 대부분이다. 단군신화를 비롯해서 주몽, 혁거세, 석탈해, 김수로 등 건국과정에서 민족의 자긍심과 우수성을 나타내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달래산’이나 ‘달래내 길’ 등에 얽힌 오누이 설화와 홍수 설화, ‘바리데기’ 설화 등은 신화로 명명되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책은 우선 우리 민족에게 잠재해 있는 신화소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국가 형성 이전에 민족과 부족 간에 공유했던 변형된 이야기들은 유사성과 차별성을 지닌다. 우리 신화에 잠재된 ‘신화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첫 번째 열쇠는 이렇게 주변 민족과 유사 공통체를 이루었던 이민족들의 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변형과 재생을 거듭한 신화는 그 전승과정과 욕망의 과정을 나타내는 적나라한 증거의 역할을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최초의 시도이자 훌륭한 아내자의 역할을 한다. 특히, 제주도의 신화에 대한 이야기들은 우리 신화의 다양성과 풍부함에 대한 즐거움을 배가 시킨다. 익숙한 신화든 처음 듣는 신화든 논리의 비약과 과장된 결론이 이끌어내는 호기심과 궁금증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과정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러나 저자의 문장을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이윤기의 문장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지만 재미있지 않다. 오랫동안 신화를 연구한 학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신뢰성과 차분하고 꼼꼼한 면을 찾을 수는 있지만 신화의 특성인 상상력과 흥미로움의 세계로 안내하지는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대중성과 아카데미즘의 중간에 선 포즈가 어정쩡하다. 아쉬운 대목이다. 좀 더 쉽고 친근하게 할머니의 옛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편안하게 읽힐 수 있는 문장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주제와 인물을 좀 더 거칠고 단순하게 묶어 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그리고 여러 종류의 신화 관련 서적 중에서 뛰어난 가치와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남는 아쉬움이다.

  통시적, 공시적 관점의 폭넓은 시야와 현대적 의미로 여성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등 신화에서 소홀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한 지적과 해석도 훌륭하다. 이윤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단순히 한 민족의 신화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유산이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훨씬 더 재미있고 다양한 우리 신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권할만?nbsp;책이다.


  저자의 말대로 “신화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종교 윤리가 아니다. 신화는 본질적으로 윤리 이전의 문제, 혹은 윤리 너머에 있는 것을 말하고 싶어한다.”는 면에서 신화에 대한 관심과 흥미는 당연할 수밖에 없다.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신화의 세계는 “윤리적 인간 뒤에 숨겨진 원초적 충동, 바로 그것이다.”


06022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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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지음 / 책벌레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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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책의 조건은 카프카의 말대로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같은 역할을 해야한다고 믿는다. 새로운 깨달음과 각성의 순간을 가져다주는 불같은 열정을 되살린다. 선동적이고 자극적인 책과는 구별되어야함은 물론이다. 그 깊이와 사유 방식의 넓이에 압도당하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개인적으로 2005년 최고의 책 한 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존 베리의 <사상의 자유의 역사>를 꼽는다. 리뷰에 코멘트가 달려 있는 것을 지금 확인했다. 두 개의 코멘트를 읽어보니 ‘사상의 자유’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한 개인의 인식의 틀은 교육에 의해서,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코멘트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내재된 억압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이데올로기의 편향성. 중립국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논리도 이제는 낡은 유물이 되어 버렸다. ‘이명준’이 ‘타고르호’에서 겪었던 선택과 실존적 갈등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관점과 시선의 차이가 아니라 객관적 정보의 차단과 편향된 교육이 낳은 폐해는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고 믿는다.

  출판된 지 5년이 지나도록 이 책을 만나지 못했던 건 게으름과 관심부족, 정보에 뒤떨어졌거나 무식의 소치로 볼 수밖에 없다.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는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필독도서 목록에 반드시 올려 놓아야한다. 좋은 책의 조건은 앞서 얘기했던 것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 이외의 것들 속에 이 책의 의미가 숨어 있다. 이 책은 새로운 정보와 죽비 같은 깨달음을 주는 책은 아니지만, 서술의 능력의 탁월함을 보여준다. 어렵고 딱딱한 경제사를 사례 중심으로 ‘살아있는 자본주의 역사’로 풀어내는 능력은 순전히 저자의 탁월한 능력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21일자 한겨레 1면은 경제 교과서에 대한 여야의 논란이 장식했다. 건설적인 토론과 논쟁은 건강한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교육과정의 탄력적 운용이 가능하다면 이 책을 경제사 기본 교재로 채택하는 운동을 벌이고 싶다. 감정적인 접근 방식이나 절대적 지지만큼 위험한 선택은 없겠지만, 이 책은 그런 위험성을 감안할 만한 책이다.

  이 책의 미덕은 객관적이며 논리적인 서술에 있다. 역자가 밝히고 있듯이 ‘우리 나라 일부 대중적 저자들처럼 좌파 사상을 통속화’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사상을 짚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사회사적 흐름과 역사적 사건들을 경제의 관점으로 일관성있게 서술하고 있으며 시대를 대표하는 경제학자들의 꼼꼼한 이론 분석을 통해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론적 접근이나 용어들을 알기 쉽게 풀어내는 능력은 아카데미즘에 매몰될 수 있는 경제사를 저널리즘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극찬을 들을 만하다. 용어의 선택이 문제가 될 소지가 있겠지만, 대중성을 확보해야 하는 주제는 깊이와 넓이를 담보하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두 가지 모두 성공한 사례로 손꼽힐 만하다.

  이 책의 출판연도는 1936년 7월이다. 21세기에도 유효하고 생생한 느낌을 받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1929년의 세계 대공황과 나치즘과 파시즘의 폭풍 속에서 이 책을 써 나간 작가의 안목에 감탄할 뿐이다. 특별한 관점과 새로운 각도가 아니다. 깨달음과 새로운 정보를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봉건제에서 자본주의 이후의 대한 독자들의 고민을 이끌어내는 능력은 ‘역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을 제대로 읽어내고 있다는 말이다. 구 소련이 붕괴된 21세기에 유효하지 않은 한 장을 번역에서 제외됐다는 것이 아쉽지만 그것이 이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못한다.

  잡다한 상식과 단편적인 경제사에 대한 지식으로 오히려 머리가 복잡한 사람들에게 꼭 맞는 책이다. 시기와 상관없이 만났으니 다행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해석하는 방식도 항상 시대에 따라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생성과 발전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중세이후 20세기 초까지의 역사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 권할만한 책이다. 최고의 책은 아니겠지만 최선의 책이 될 수는 있겠다.

  자유 시장 경제 체제를 옹호하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달라고 외치는 (주)대한민국에서 박노자의 말대로 ‘노동하기 좋은 나라’가 왜 되기 힘든 것인가 하는 대답과 고민이 자본주의 역사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세계화’가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되어 버린 지금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가 갖는 의미는 탁월한 경제 학자들의 견해와 미래 학자(?)로 명명된 사람들에 해 다각도로 논의되어 왔고 논의 되고 있다. 이후의 문제 제기는, 즉 ‘자본주의에서 어디로’에 이어지는 문제는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현실이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다르듯이 책을 쓴다는 것은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 책이다.


06022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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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세계 -상 - 우리는 어떻게 세계와 소통했는가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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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학적 위치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현재를 확인하는 일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역할을 한다. 흔히들 ‘세계 속의 한국’이 갖는 의미와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 과거를 돌아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당연하게도 ‘세계’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작업이다.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장 단순한 작업 중에 하나가 ‘역사’에 대한 재평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에 관한 한 어느 누구도 하나의 통일된 관점이나 기준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늘 새로운 견해와 다른 각도에서 서술되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 사관에 따라 잘못 씌어진 역사에 의해 우리들 머릿속에 심어진 우리 역사에 대한 편견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활발한 토론과 자기 학습 능력을 키워주는 교육제도와 시스템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맹목적 주입식 암기식 교육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육현실에서 ‘역사’ 교육은 특히 그러하다. 일단 주입된 사관은 스스로 깨치고 확인하기 전에는 고스란히 하나의 집단 무의식으로 고착된다.

  민족이라는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단일 민족이란 무엇인가? 혈연의 단일성을 쉽게 떠올리지만 저자의 말대로 우리나라 275개 성씨 중 136개가 귀화 성씨라는 사실은 ‘한핏줄’을 무색케 한다. 한 나라의 민족의식은 역사를 통해 확인되며 혈연 공동체를 넘어서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역사 공동체의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러나 개인을 넘어선 민족은 의미가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타 민족이나 국가와의 비교 우위에 서고 싶어하는 우생학적, 역사적 우월감은 그 근본 뿌리부터 현재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전 세계에 대한 편견과 아집으로 고정될 우려가 있다. 경계해야 할 일이다. 섣불리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에 매몰되는 일처럼 두려운 일은 없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과 민족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확인되듯이 위정자들은 민족과 국가를 내세워 ‘개인’을 희생하도록 강요해 왔다. 그 민족과 국가는 일부 특권층과 권력층의 직권남용과 공인된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가면으로 민중들을 현혹시켜왔기 때문이다. 단 한가지의 역할론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위험성에 대한 수많은 역사적 교훈과 경험들은 우리를 소심하게 할 수 밖에 없다. 역사적 작용과 반작용 속에서 다양한 이념들이 가진 의미를 확인하는 일은 미시사를 연구하는 일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 민족과 역사를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세계 속의 한국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선행한다.

  ‘한국 속의 세계’라는 용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분명하다. 이 책은 냄비처럼 들끓었던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물려 한겨레 신문사에서 기획한 대국민 홍보용 내지 우리 역사 바로 알기 혹은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고 자긍심과 우월감 고취하기의 일환으로 연재됐던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서술과 사실 확인 차원에서 냉정하고 정확하며 꼼꼼한 고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이다. 통시적 관점을 넘어서 공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는 분명히 차이가 난다. 씨줄과 날줄로 엮어야 옷감을 짤 수 있듯이 단선적인 역사 서술이 1차원라면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2차원적 관점은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갖게 하며 세계사와 맞물려 납득할 만한 구체적 사실들을 확인하게 된다.

  ‘국사’와 ‘세계사’를 구분하지 말고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과정에서부터 이런 작업이나 노력들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다. 고조선에서 조선까지 통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우리의 역사는 고립된 역사가 아니다. 외침과 방어 생존과 독립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역사는 처절한 고통의 역사로만 여겨진다. 내가 받은 역사 교육은 그렇다. 그러면서 끝까지 잘 버티고 용케 살아남았다는 느낌으로 끝이었다. 통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우리의 역사는 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나의 연속된 흐름을 가지기 위해 그렇게 서술되거나 가르칠 수밖에 없는 문제인지 고민해 볼 일이다.

  저자가 고민했던 부분은 기준은 공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문명교류사’로서의 한국 역사다. 짤막한 연재물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깊이있게 다루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역사적 흐름이나 연속선상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일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한 책에서 모든 것을 구할 수는 없다. 이 책은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지닌 소설처럼 작은 단편들이 하나의 주제를 향 각개 전투하는 방식이다. 몰랐던 사실을 아는 즐거움과 우리 역사에 대한 닫힌 관점을 열린 관점으로 전환하는데 일정부분 역할을 하고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왜곡 부분과 일본의 임나일본부, 칠지도에 대한 저자의 격한 목소리는 다소 감정적인 면이 드러나지만 역사학자로서 당연한 의분이라고 본다. 냉정함과 객관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정도라면 단점이라기보다 책을 읽는 재미로 볼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저자의 견해에 대한 적절한 비판적 안목이 전제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타임즈』에 조선의 “양반들은 개혁을 부패나 직권남용 같은 자신들의 공인된 권리의 상실”로, “자신들의 삶의 양식을 빼앗아가는 악”으로 간주한다(1897. 9. 17)는 이야기가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교훈으로 각인된다.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는 아놀드 토인비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전히 ‘혁명’을 꿈꾸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기적 민족주의나 국가 우월주의의 위험성을 걷어 낸다면 우리 민족과 국가도 ‘관계’ 속에 발생하고 성장해 왔다는 역사에 대한 당연한 인식이 필요한 책이다. 서로 다른 문명들의 삼투압 작용을 배제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따로 또 같이’ 살아온 인류에 대한 확인 작업이 단편적이지만 분명한 의미를 지닌 책이다.


060225-029(상), 030(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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