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라 시대의 사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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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마르케스의 소설에선 아몬드 향이 진하게 배어 있다. 

그는 플로렌티노 아리사를 통해 사랑의 유효기간이 53년 7개월 11일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사랑(혹은 사람)이 어떻게 변하니?” 남자의 외침이 허공에 흩어지는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 공허하게 흩어진다. 심수봉의 말대로 사랑밖에 난 모른다고 고백하듯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낭만적 사랑과 연애의 결정판을 보여준다. 근대 이전 인류의 최고 발명품이 종이, 화약, 나침반이라면 근대 이후 최고의 발명품은 자유연애와 낭만적 사랑이다. 개인의 삶에 주어진 자유와 인간 평등사상은 누구든 자기 욕망과 의지에 따라 짝짓기를 시도할 수 있는 원시시대로의 회귀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칠까. 상대가 누구든 내가 어떤 사람이든 우리에겐 사랑할 자유가 권리가 있다. 물론 그 사랑을 거절하고 이별할 수 있는 티켓을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는다. 페르미나 다사의 특별함이 서사의 중심을 이룰 수 없다. 이 소설은 후베날 우르비노와 플로렌티노 아리사 그리고 페르미나 다사의 삼각 관계와 거리가 멀다. 각자가 맺은 관계양상은 전혀 다른 형태와 의미를 지니며 삶의 시기에 따라 독립적 형태로 나타난다. 만약 후베날 우르비노가 아니어도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페르미나 다사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노년의 재회에는 큰 영향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사람은 자기 삶의 과정과 결과를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절반의 필연과 절반의 우연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식민지였던 콜롬비아는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다. 1819년 독립한 후에도 금과 은 같은 보물을 스페인으로 보내고 아프리카 노예시장으로 번성했던 선명을 기억을 항구도시 카르타헤나에 새겨져 있다. 아마도 마르케스는 카리브해의 뜨거운 태양과 조국의 역사와 문화가 짙게 드리운 공간을 배경으로 전근대 사회의 모순과 식민지 시절의 고통, 낭만적 사랑과 열정을 에로스적 욕망으로 풀어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인간의 본능과 배치되는 모든 규범과 질서에 대한 저항은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분명한 기준이다. 집단과 전체주의적 삶에서 벗어난다는 건 가부장적 질서와 여성의 질곡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첫발을 내디딘 남아메리카의 관문에서 ‘늙음’을 거부하고 예순이 되기 전에 자살한 제레미아 드 생타무르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소설은 아이러니하게도 칠순이 넘은 다음에야 비로소 사랑에 눈을 뜨는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페르미나 다사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소설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뒤집으면, 사랑은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마지막 문장)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첫 문장)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영화 『세렌디피티』에서 케이트 베켄세일이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 헌책방에 판 책이 바로 이 소설이다. 존 쿠삭의 ‘지폐’와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운명적 사랑과 낭만적 연애로 포장된다. 우연을 가장한 음험한 욕망은 반드시 현실을 능가한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세기말(19세기말)과 새로운 시대(20세기)를 시대의 사랑은 콜레라만큼 치명적이고 사회적 질병으로 다뤄져야 할만큼 혼란스럽다. 전통과 문화는 단단한 보수적 이데올로기와 관습적 사고에 불과한 고정 관념이다. 선악의 판단이 불가능한 선택적 기호와 취향의 결과물이다. 우르비노의 계급과 계층, 종교적 태도가 만든 사랑과 결혼은 육체적 욕망과 부딪쳐 혼란스런 결과를 초래한다. 겉으로 페르미나 다사와 쇼윈도 부부로 원만하고 평온한 삶을 유지하지만 페르미나의 개인적 태도와 아버지의 욕망이 투영된 결혼은 결코 ‘행복’과 거리가 멀다.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 622라는 숫자에 아로새겨진 여인들은 어떤 의미일까. 페르미나 다사에 대한 사랑은 광기와 집착을 넘어 진정한 사랑이라고 명명하고픈 낭만주의자들의 바람은 이루어진 걸까. 

1927년생 마르케스가 58세가 되던 1985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전혀 다른 성격의 소설이다. 팬데믹을 진지하게 다루며 인간의 실존적 의미를 묻는 카뮈와 달리 마르케스는 수인성 전염병인 콜레라 6차 대유행의 끝물을 경험한 세대에게 과연 사랑의 본질은 무엇이며 에로티즘은 사랑의 어떤 표정에 해당하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 100년 쯤 지난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코로나 시대의 사랑’을 묻는다면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환멸, 연민, 추억, 후회로 점철된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사랑과 체스, 사진관, 앵무새, 망고나무, 가지, 테레빈유, 돈 산초 호텔의 거울에 투사된 마르케스의 열망은 어떻게 읽어내야 할까. 낭만적 사랑의 개막 혹은 종말은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변비처럼 꽉 막힌 채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소설의 알레고리가 마르케스가 경험한 시대에 대한 향수이든 현대 사회의 사랑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든 상관없다. 뜨거운 태양과 마그달레나 강의 축축하고 끈적한 분위기가 시원한 배설이 불가능한 변비의 고통을 생생하게 전한다. 

“난 절대로 노인이 되지 않을 거야.”라는 제레미아 드 생타무르의 절규와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나를 창녀로 만들어주었거든요.”라는 나사렛 과부의 고백보다 “공적인 생활의 과제는 두려움을 지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부부 생활의 과제는 지겨움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는 페르미나 다사의 깨달음과 “훌륭한 결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안정이오.”라는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조언보다 나이브하게 들린다. 우리는 각자 자기 삶의 주인공이다. 무엇이 어떠하든 자기 몫의 사랑, 욕망, 환멸, 추억, 후회, 연민, 환희, 절망을 남긴다. 

에바 일루즈는 『사랑은 왜 끝나나』에서 “19세기 구애의 대부분은 처음부터 사랑을 선포하고 이루어진 것이지, 남녀가 서로 사귀며 키운 감정이 아니었다. 구애를 시작하면서 사랑을 선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감정의 불확실성을 덜어주었다. 아니, 더 나아가 사랑한다는 고백을 처음부터 듣고 시작하는 감정적 확실성은 여성이 남성을 만날 조건”이었으며, “20세기의 흐름과 더불어 우아함과 매력과 물질적 풍요와 애정 생활을 가꾸는 책임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 되었다. 이런 프로젝트를 위한 중요한 문화적 자원은 소비문화가 제공한다. 그 제공 방식은 다양하다.”고 분석했다. 우르비노와 플로렌티노의 사랑은 19세기식 연애 방식이 종말을 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20세기식 사랑법을 시도했기 때문에 페르미나 다사는 극도의 혼란을 느꼈을 법하다. 그리하여, “전근대의 구애는 감정으로 시작해 섹스로 끝났다. 그리고 전근대의 섹스는 죄책감과 불안감으로 불러일으킬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현재의 관계는 (쾌락적) 섹스로 시작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감정을 가꿔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관계를 두렵게만 여기는 불확실성과 씨름한다. 몸은 감정을 표현하는 무대로 기능해왔다(“좋은 관계는 좋은 섹스로 표현된다”는 상투적 표현을 보라). 그러나 감정은 성적 상호작용과는 관계없는 것이 되었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낭만적 사랑과 에로티즘 사이의 혼란과 갈등은 콜레라 시대를 지나서는 좀체 찾아보기 힘든 선택의 영역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관점으로 플로렌티노 아리사, 후베날 우르비노, 페르미나 다사의 사랑법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들은 전근대적 전통과 종교적 신념, 자본주의가 형성한 신흥 부르주와 계급 그리고 낭만주의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꿈을 간직하고 있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또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사랑’의 의미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고 토로한다. 기혼과 미혼이 바라보는 ‘결혼’이 달랐고 후베날 우르비노와 페르미나 다사의 ‘거의 사랑’에 대한 의견도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 결혼을 결심한 순간, 이별의 아픔과 그리움이 교차했을 터. 사람이 산다는 건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의 반복에 불과한 건 아닐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사랑을 광기 혹은 집착이라고 부르든 영원하고 순수한 사랑의 표본이라 생각하든 우리는 단 한 번 뿐인 인생에서 각자의 사랑에 대해 깊이 고민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어떤 사랑도 틀린 게 아니라 다를 뿐이다. 남의 사랑을 저울질하고 평가하고 판단하지만 않는다면, 조금 더 다양한 방식의 사랑에 대해 관대할 수 있다면 나사렛의 과부처럼, 사라 노리에가처럼, 아메리카 비쿠냐처럼 각자의 방식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한 여자가 없었던 까닭에, 그는 모든 여자들과 동시에 함께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페르미나 다사가 아닌 여자들 입장에서는 아리사를 사랑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모든 작가와 독자에게 아직도 사랑에 대해 할 이야기가 남아 있어 다행이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에 대해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아 있는 이유가 사랑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며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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