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노래한다 창비청소년문학 20
권하은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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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풍노도의 시기. 진부하고 습관적인 표현이지만 청소년기를 우리는 그렇게 표현한다. 잔잔한 수면에 물방울 하나가 잔을 넘치게도 하고 순간적으로 아름다운 왕관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에릭슨은 이때를 ‘결정적 시기’라고 표현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모든 것에 도전할 수 있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사춘기는 단순한 생각의 봄이 아니라 성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제 2의 탄생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민과 방황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런 시기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를 둘러싼 세계의 부조리에 눈에 띤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알게되고 세상은 불공평한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의 존재가 <변신>의 벌레처럼 하찮게 느껴져 비참해지고 삶의 목적과 이유를 찾지 못해 죽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모두 그 시절을 겪었으면서 어른이 되고나면 시치미를 떼는 특징이 있다. 세대가 바뀌어도 부모나 선생님이 되고나면 자식과 학생들에게 자기가 들었던 이야기를 지겹게 반복한다. 자신들의 가치관과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세상에서 배운 삶의 테크닉과 경쟁의 질서를 일방적으로 주입한다. 말 잘 듣고 통제에 잘 따르며 반항하지 않는 순종적인 사람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불철주야 노력한다. 그게 바른 길로 인도하는 방법이라는 착각을 버리지 못한다.

  그들을 이해하지 않으려하고 어른의 기준과 잣대로 재단하는 버릇은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빵틀에 밀가루 반죽을 집어넣듯 모두 같은 모양과 맛을 내려한다. 대한민국 학교의 빵틀은 모두 똑같다. 부모들의 생각틀도 다르지 않다. 아이들은 질식하지 않을까? 정말 묻고싶다. 국영수만 잘하면 행복해지고 잘 살게 되는거냐고?

  권하은의 <바람이 노래한다>는 아니라고 말한다. 부모없이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한쪽 팔이 없는 소주, 어머니 없이 주정뱅이 아버지와 함께 사는 석준 그리고 유복한 목사의 딸로 시골에 전학 온 주인공의 만남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렵지만 그것은 외적 조건으로 판단한 어른들의 시선일 뿐이다. 어려운 환경을 딛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범적인 청소년들의 이야기도 아니고 사춘기에 겪게되는 첫사랑의 애틋함을 다룬 소설도 아니다. 작가는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아이들의 관계 속에서 삶의 길을 찾고 있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어디 있을까? 어떤 면으로 모든 아이들은 결핍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든 경제적 능력이든 우정이든 자존감이든 완벽하게 조건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라는 아이들은 없을 것이다. 혹시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딘가 모자르거나 생각이 없는 아이가 아닐까 싶다. 성인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인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목적과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상처받은 세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거품과 과장을 걷어냈기 때문이다. 뻔한 결론이나 교훈을 들이대지도 않고 아름답고 예쁘게 포장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생활을 있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그려낸다. 작가의 첫 소설이기 때문에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려지만 후속작을 기대할 만하다. 청소년 소설이라는 영역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성인과 다른 환경, 시기,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특별한 존재다. 홀로서기가 불가능하고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받기도 힘들다.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는 많은 작가들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이 소설은 물로 만나 불로 헤어지는 주인공들의 관계가 비극적으로 그려진다. 석준의 죽음으로 끝맺는 결론 때문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과 관계의 양상이 어른들의 그것처럼 한계를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프게 그려진다. 우정과 사랑이 전제되어 서로를 위해 희생하지만 결국 이들의 생은 제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단순히 비극적 세계인식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성인이 되는 과정과 현실을 희망적으로 포장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과 희망이 아니라 방황과 좌절의 과정을 보여주고 그것을 극복하는 다양한 방식을 현실감있게 보여주는 소설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소설은 현실 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그려보는 도화지같은 역할을 해야한다. 진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삶의 아이러니와 부조리를 읽어낼 수 있는 청소년 소설을 통해 아이들이 조금씩 더 자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진실은 항상 저 너머에 존재하는 법이고 정말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으며 부모의 말도 정답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소설은 어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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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 새로고침 (책콩 청소년)
테리 트루먼 지음,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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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아빠’가 되었을 때의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죽기 전에 끊어지지 않는 보이지 않는 끈이 이어진 느낌이었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다는 신비로움과 살아 꿈틀거리는 한 가녀린 존재에 대한 애틋함보다 내 존재 의미를 되돌아보는 것이 세상 모든 아빠들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감정은 건강한 아이를 만나고 난 후의 개인적 소회에 불과하다. 기형이나 장애아를 기르는 부모의 심정이나 생활을 우리는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테리 트루먼의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는 매우 충격적인 제목의 청소년 소설이다. 외국 작가의 소설은 우리와 다른 성향과 문화적 기호로 인해 현실감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최중증 장애아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어느 나라 부모든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워내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동반한다. 단순하게 육체적 고통과 경제적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족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린다는 의미다. 장애인 문제는 복지국가를 향한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관점과 문제의식을 제공한다. 그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더불어 함께 치료하고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공감과 배려가 필요하다.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일까만 장애아를 키우는 일은 부모의 입장에서 평생의 업보가 된다. 또한 부모가 죽으면서도 마음 편하지 못하다. 그 아이의 나머지 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죽은 후에도 고통받게 된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과 가족의 고통은 물론 사회적 편견과 시선까지도 극복해야하는 이중고를 겪게된다.

  외모는 개인이 선택할 수 없다. 장애도 마찬가지다. 선천성 장애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장영희도 평생 장애와 싸웠다. 자전거를 타다가 심하게 넘어져 오른손을 기브스한 채 두달만에 왼손으로 젓가락을 사용하시는 분도 뵈었다. 하물며 평생 신체의 일부가 불편하다면 어떨까 생각해보자. 더구나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심한 지적 장애의 경우는 가족이 거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한다. 아무리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추진다해도 기본적으로 부모가 짐져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소설은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꾸며내거나 신경숙의 <외딴방>처럼 실제 작가의 경험이 녹여낸다. 이 소설은 후자에 가깝다. 작가 테리 트루먼에게는 ‘헨리 쉬한 트루먼’이라는 소설 속 주인공과 똑같은 중증 장애 아들과 멀쩡한 아들이 있다. 작가의 직접경험에서 길어올린 소설의 진정성은 어떤 감동과도 비교할 수 없다. 단순히 현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제목처럼 섬뜩한 이야기지만 그 깊은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숀이다. 열네살 남자아이에게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과 누나가 있다. 단란한 한 가정이 숀에 의해 어떤 고통을 받는지 실감나게 그려낼 것이라는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 소설의 화자는 바로 중증 장애아인 숀이다. 숀의 시선으로 가족들을 바라보고 세상을 말하는 방식은 낯설지만 신선하고 재미있게 그려진다. ‘숨겨진 천재’ 숀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한번 보고 들은 것은 절대 잊지 않는다. 뛰어난 지능과 남다른 유머감각을 가진 소년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곳일까? 이 소설은 장애의 원인과 대책을 찾기보다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것을 요구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숀은 겉모습으로 판단할 수 없는 아이로 등장한다. 특히 아버지의 마음과 생각을 읽어내고 아버지가 쓴 모든 시를 감동적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숀의 장애 때문에 아버지는 가족을 떠난다. 단지 힘겨운 삶의 고통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설명하는 방식이 이 소설의 주제가 아닐까 싶다. 소설에는 실제 두 살짜리 아들을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킨 비정한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를 인터뷰하고 TV에 출연해서 숀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다가 숀은 또다시 발작을 일으킨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고통받지 않게 해주고 싶다는 말을 옹호하는 숀의 아버지를 보고 숀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아닐까?

  가끔 장애를 극복한다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가끔 뉴스에서는 사회적 편견이나 역경을 딛고 자신의 목표를 이룬 장애인들의 삶이 소개된다. 그 곁에는 항상 헌신과 희생으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장애가 있는 자식에게 바친 부모가 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자. 신체가 아니라 훨씬 더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삶이 어떠한지 그 가족들의 생활은 어떤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적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먼저 물었다.

  이 책은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사랑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이 전제된 상태에서 장애인과 그 가족 그리고 사회적 문제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소설의 끝부분은 열려있다. 아버지와 처음으로 대면한 숀. 아버지의 결정이 무엇이든 그리고 숀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결과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들의 살아온 과정과 삶의 흔적들 그리고 그들의 미래가 어떠할지는 모든 독자가 마음속에 그려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 마음에는 어떤 장애가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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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네가 누구라고 생각해? - 친구와 적에 대한 16편의 이야기 창비청소년문학 19
존 업다이크 외 지음, 달린 매캠벨 외 엮음, 이은선 옮김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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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무 때문에 세계일주 후에 연락을 한다는 오래된 친구의 문자 한통. 아침에 느닷없이 재미있게 늙어가냐는 문자를 받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 녀석의 직장은 우리집에서 지하철 두 정거장 승용차로 10분 거리에 있지만 2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불현 듯 생각나면 전화나 문자로 안부를 전하기도 하지만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워낙 바쁘게 사는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일도 어색해질 때가 있다.

  이제 우정이라는 단어는 낡은 앨범 속에 숨어사는 친구들의 옛 이름이다. 부대끼고 자주 만날 수 있는 친구가 늘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원주로 여행을 갔다가 음표 모양의 풀꽃을 모아 붙인 편지를 새벽에 우리 집 우체통에 넣고 가던 친구에게 온 문자 한 통이 하루 온종일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동성 간의 사랑을 우정이라고 표현한 어느 작가의 말이 새삼스러운 것은 <넌 네가 누구라고 생각해?>라는 도발적인 질문의 책을 만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를 말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타인을 통해서다. 친구와 가족을 통해 나를 돌아본다.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나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지를 안다는 것은 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성찰이다. 타인의 눈에 비친 모습이 나의 전부일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눈은 나를 돌아보는 거울이 될 수 있다.

  그 중에 가장 뚜렷한 기준이 될 만한 것이 친구다. 친구의 직업이나 성격이 아니라 어떤 친구에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 확인해 보자. 나는 누구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존 업다이크를 비롯한 열 다섯명의 미국 작가의 단편을 모아놓은 <넌 네가 누구라고 생각해?>는 ‘우정’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나의 모습을 확인하는 이야기들을 모아 놓았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여러 명의 작가가 다양한 시각으로 풀어냈는지 그들의 작품 중에 선별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친구를 통해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스무 살이 넘어 제각기 다른 삶의 방향을 찾고 다양한 직업을 선택하면서 친구들과 조금씩 멀어진다. 심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생활의 차이를 말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만난 친구와 그 이후에 만난 친구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머릿속에 각인된다. 감정이 앞서고 이성보다 행동이 앞섰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함께했던 친구는 무모함까지 받아들여준 기억을 공유한다. 말로 설명될 수 없는 관계가 세상에는 늘 존재하는 법이다. 그러나 스물 살 이후의 친구 관계는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현대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이라는 수식어는 염두해 둘 필요가 없다. 다만 짤막한 단편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음미할 수 있다면 좋겠다. 에리 브래드버리의 ‘이럴수가’는 친구와의 이별을 이야기한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별하는 모습은 유년시절에 헤어진 친구들을 떠오르게 한다. 연인이든 친구든 이별의 아픔은 영원한 문학의 주제가 되어왔다. 한 인간의 성숙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처럼 여겨지는 이별은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그 대상과 무관하게 ‘고독’와 ‘외로움’의 경계를 알려준다.

  어린 시절 친구가 시간이 흘러 연인이 되기도 한다. 주디스 오티스코퍼의 ‘미국사’, 존 업다이크의 ‘악어 떼’, 기시 젠의 ‘바뀐다는 것의 의미’에 등장하는 친구는 어린시절 짝사랑 하던 남자 혹은 여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밖에도 짐이 되는 친구, 나이와 계층을 뛰어넘는 우정 등 다양한 ‘친구’와 ‘우정’에 대한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대형마트의 시식코너처럼 다양하게 나열하고 있다.

  한 가지 당황스런 점은 장편에서 발췌한 경우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청소년들이 읽기에 적합하고 다양한 관점과 흥미를 위해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황당한 편집이다. 쉽고 가볍게 읽을 수만은 없는 작품도 많다. 이 책은 현대 미국작가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그들이 보여주는 유년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내는데 목적을 두면 좋겠다. 이 책을 통해 더 많은 작가의 작품을 접하고 또 한 작가를 깊이 있게 읽기 시작한다면 터미널의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있다. 그 나이, 그 시절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삶의 일회성. 돈이나 권력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시간, 관계맺음, 감성, 열정 - 그 모든 것을 위해 잠시 침묵한다.


091006-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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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네껜 아이들 푸른도서관 33
문영숙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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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우리의 삶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역사와 기억에 새겨진 역사가 다른 것은 개인적 경험과 해석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가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지나온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나와 우리가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를 고민하는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역사를 돌아보는 일이 아닐까 싶다.

  켜켜이 먼지 묻은 과거를 들추는 일은 고루하고 지루한 퇴행이 아니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과 이유를 되새기고 미래를 전망하는 출발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역사는 우리에게 삶의 방향과 목적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기도 한다. 근대 이후 역사는 다양한 방법과 시각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지배자와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만 기록되지도 않는다.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모습이 반영되어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실제 사람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대다수의 고민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은 그 원인을 제공했던 국가권력과 통치자의 행위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겨진다.

  조선 왕조가 쇠퇴하고 흔들리고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우리 선조들의 삶은 위태롭게 흔들린다.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문화가 여전히 살아있고 근대화의 물결에 적응하지 못한 조선은 결국 일본에 의해 강제로 국권을 잃게된다.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의 운명과 근본 원인을 살펴보는 것은 역사가에게 맡겨 둘 문제만은 아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고통받고 절규하는 민중들의 삶이다. 그들은 어떻게 한 시대를 살아냈는가? 그들은 왜 그렇게 살아가야만 했는가? 위정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는 없지만 100여년 전 조선의 가장 안타까운 시대를 돌아보는 일은 우리에게 많은 아픔과 상처 그리고 교훈과 통찰을 전해준다.

  1905년 4월 4일 조선사람 1,033명을 태운 일포드호는 제물포 앞바다에 뱃고동을 길게 울리며 묵서가로 떠난다. 문영숙의 <에네껜 아이들>은 바로 이들의 삶을 추적한 소설이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떠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조선에서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만주, 러시아, 멕시코 등 한민족의 디아스포라는 우리 역사의 아픔이며 씻을  수 없는 상처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평범한 우리의 이웃이며 아버지며 할아버지였다. 이 사람들의 역사가 어떤 식으로 기록될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불과 100년 전의 일을 까맣게 잊고 사는 우리들의 기억력을 탓할 수도 없지만 바로 전 세대의 아픔과 상처를 잊는다면 역사는 반복될지도 모른다. 교훈을 얻기 위해서 역사가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작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색다른 방식으로 전해준다. 이야기의 중심에 아이들을 앞세운다. 사회적 상황과 어른들의 다양한 이해방식이 아니라 아이들의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백정의 아들 덕배와 고아 봉삼이, 옥당대감의 아들 윤재 그리고 병약한 딸을 중심으로 한 이 소설은 에네껜 농장 이민자들의 고단한 삶을 그려낸다. 출발부터 농장에서의 삶을 3인칭의 관점으로 살펴본다. 덕배 아버지와 감초 아저씨 그리고 옥당대감은 아이들을 이끌고 서로 다른 목적으로 일포드호에 오른다. 역사적 관점에서 이들의 삶을 신산스럽게 그려낸 김영하의 <검은 꽃>과 달리 이 소설은 아이들을 중심으로 에네껜 농장의 삶을 보여준다. 제물포에서 출발한 소설은 메리다 조선인 학교에서 끝을 맺는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인간의 삶은 계속되고 있지만 우리에게 그들의 삶이 전해주는 뼈아픈 교훈과 감동은 잊어서는 안될 소중한 역사다.

  덕배와 봉삼 그리고 윤재의 만남은 시대적 상황을 극복해가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웅변하는 듯하다. 신분을 넘어 인간의 본성을 확인하고 삶의 본질을 확인하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과거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을 통해 현재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역사의 아픔을 기억하고자 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잊혀지기 쉽다. 하지만 우리들 삶의 조각들이 모여 진정한 역사가 이루어지고 미래가 만들어진다고 믿는다면 그들이 바로 우리의 과거이고 역사일 것이다.

  객관적 사실을 넘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단면을 드러내는 소설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청소년 소설이 아이들의 고민과 방황을 그려내고 그들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담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또 다른 삶의 조건들을 보여주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소설은 현재와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과거의 기억으로 많은 아이들에게 읽힐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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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다윈혁명 - 우리 사회 지성 19인이 전하는 다윈 혁명의 현장
최재천 외 18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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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념이 가득한 자, 자신이 정의롭다고 확신하는 자들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의문이 가득한 자를 신뢰한다.” - 김훈

  무슨 책인지 잡지인지 알 수 없지만 소설가 김훈의 한 마디가 사무쳤다. 잘 적어 놓은 걸 보니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실천에 대해 고민이 있었나보다. 어떤 글이든 사람이든 ‘때’를 만나야 한다고 믿는다. 아무리 좋은 사람, 훌륭한 글을 읽어도 마음에 닿지 않는 때가 있고 보잘 것 없는 사소한 인연이지만 평생 함께하는 인연이 되기도 하고 평범한 한 줄의 글이 삶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는 것은 ‘언제’인가가 중요하다.

  짧은 생이지만 돌아보면 무수한 사람들과 만났고 헤어졌으며 많은 책을 읽고 잊어버렸다.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듯 잊고 싶지 않은 문장과 구절들이 이제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새삼스러운 이유는 나이 탓이 아니라 기억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망각의 힘은 위대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고백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고 사는지.

  굳은 신념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이제 겨우 150년이 흘렀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 때문에 다윈을 찾는 것은 아닐까? 과연 다윈이 우리에게 길을 열어준다고 믿는 이 많은 사람들의 맹목은 또 다른 종교적 광신은 아닐까? 하지만 왜 여전히 다윈을 기억해야 하는지 우리는 가만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류에게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죽음은 한 존재의 망각으로 완성된다고 한다면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은 불멸의 존재가 되어 누구보다도 열심히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다윈이다. 불과 150년 전인 1859년 11월 24일 영국 런던의 존 머레이 출판사가 <종의 기원>을 내 놓는다. 초판 1,170권은 당일 매진됐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회에 코페르니쿠스적 충격을 가한 이 책은 여전히 살아 숨쉬는 우리들의 고전이 되었다.

  특정 시기에 특정인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상징이 만만치 않게 우리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밝혀주고 있다. 이념을 넘어 다윈의 생각은 시대의 반역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회와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는 생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변화도 발전도 즐거움도 없는 것은 아닐까?

  평생 병마와 싸우며 어린 딸을 잃고 신의 존재마저 부정하고 싶었던 불행한 남자의 책은 작가의 삶을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명의 탄생이 우연이라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말을 뱉어버리고 싶은 다윈의 심정을 헤아려본다. 점점 지질학부터 인류학에 이르기까지 학문을 넘나들며 그 명백한 증거들 앞에서 진실을 외친 다윈은 행복했을까?

  개인의 행복과 불행을 넘어 인류의 지적 토대 자체를 뒤흔든 대지진이 벌어진다.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함께 20세기를 뒤흔든 지구인 3명 중 하나인 다윈의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네며 살아있다. 다만 우리가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귀를 막고 제 갈 길을 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뿐이다. <21세기 다윈 혁명>은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과 세계화를 통한 금융위기, 민주주의의 위기와 인문학의 위기, 환경 문제와 미래 사회를 내다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최재천을 비롯한 19명의 각 분야의 교수들이 21세기의 전망을 다윈코드에 맞춘다. 하나의 키워드로 이렇게 다양한 학문 분야를 섭렵할 수 있다는 사실도 놀랍기만하다. 철학, 과학, 윤리학, 종교, 사회과학, 심리학, 법학, 정치학, 경제학, 인류학, 성, 문학, 미술, 음악, 지질학, 환경, 의학, 공학, 복잡계과학이 그것이다.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출판 150주년을 맞은 올 해 기념식처럼 출간된 이 책은 최재천의 기획과 주도로 이루어졌다. 제목만 들어도 토할 것 같은 쓰레기 신문에 연재되었지만 김지하와 박홍을 들러리 세우는 신문에 실렸던 모든 글이 다 나쁠 수는 없다. 다윈을 통한 지식 백화점을 둘러본 느낌이다. 새로운 미래 사회에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각 분야에서 다윈은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학문을 통섭하는 다윈의 힘은 단순해서 아름다운 진화이론에서 나온다.

  그것은 고정 불변의 진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 어디서든 행복하고 즐겁게 춤출 수 있는 혁명을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변화와 새로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이 책도 다윈도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아니라 새로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을 따라 뛸 수 있는 체력과 열정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다윈보다 다윈의 생각이 낳은 결과와 여전히 창조론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을 함께 생각했다. 진리는 각자 마음 속에 간직하면 그뿐이다. 다만 변하지 않는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생각조차 영원히 변하지 않을 수 있을지 그것이 궁금할 따름이다.


09092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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