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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네껜 아이들 ㅣ 푸른도서관 33
문영숙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는 우리의 삶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역사와 기억에 새겨진 역사가 다른 것은 개인적 경험과 해석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가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지나온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나와 우리가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를 고민하는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역사를 돌아보는 일이 아닐까 싶다.
켜켜이 먼지 묻은 과거를 들추는 일은 고루하고 지루한 퇴행이 아니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과 이유를 되새기고 미래를 전망하는 출발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역사는 우리에게 삶의 방향과 목적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기도 한다. 근대 이후 역사는 다양한 방법과 시각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지배자와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만 기록되지도 않는다.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모습이 반영되어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실제 사람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대다수의 고민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은 그 원인을 제공했던 국가권력과 통치자의 행위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겨진다.
조선 왕조가 쇠퇴하고 흔들리고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우리 선조들의 삶은 위태롭게 흔들린다.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문화가 여전히 살아있고 근대화의 물결에 적응하지 못한 조선은 결국 일본에 의해 강제로 국권을 잃게된다.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의 운명과 근본 원인을 살펴보는 것은 역사가에게 맡겨 둘 문제만은 아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고통받고 절규하는 민중들의 삶이다. 그들은 어떻게 한 시대를 살아냈는가? 그들은 왜 그렇게 살아가야만 했는가? 위정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는 없지만 100여년 전 조선의 가장 안타까운 시대를 돌아보는 일은 우리에게 많은 아픔과 상처 그리고 교훈과 통찰을 전해준다.
1905년 4월 4일 조선사람 1,033명을 태운 일포드호는 제물포 앞바다에 뱃고동을 길게 울리며 묵서가로 떠난다. 문영숙의 <에네껜 아이들>은 바로 이들의 삶을 추적한 소설이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떠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조선에서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만주, 러시아, 멕시코 등 한민족의 디아스포라는 우리 역사의 아픔이며 씻을 수 없는 상처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평범한 우리의 이웃이며 아버지며 할아버지였다. 이 사람들의 역사가 어떤 식으로 기록될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불과 100년 전의 일을 까맣게 잊고 사는 우리들의 기억력을 탓할 수도 없지만 바로 전 세대의 아픔과 상처를 잊는다면 역사는 반복될지도 모른다. 교훈을 얻기 위해서 역사가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작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색다른 방식으로 전해준다. 이야기의 중심에 아이들을 앞세운다. 사회적 상황과 어른들의 다양한 이해방식이 아니라 아이들의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백정의 아들 덕배와 고아 봉삼이, 옥당대감의 아들 윤재 그리고 병약한 딸을 중심으로 한 이 소설은 에네껜 농장 이민자들의 고단한 삶을 그려낸다. 출발부터 농장에서의 삶을 3인칭의 관점으로 살펴본다. 덕배 아버지와 감초 아저씨 그리고 옥당대감은 아이들을 이끌고 서로 다른 목적으로 일포드호에 오른다. 역사적 관점에서 이들의 삶을 신산스럽게 그려낸 김영하의 <검은 꽃>과 달리 이 소설은 아이들을 중심으로 에네껜 농장의 삶을 보여준다. 제물포에서 출발한 소설은 메리다 조선인 학교에서 끝을 맺는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인간의 삶은 계속되고 있지만 우리에게 그들의 삶이 전해주는 뼈아픈 교훈과 감동은 잊어서는 안될 소중한 역사다.
덕배와 봉삼 그리고 윤재의 만남은 시대적 상황을 극복해가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웅변하는 듯하다. 신분을 넘어 인간의 본성을 확인하고 삶의 본질을 확인하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과거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을 통해 현재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역사의 아픔을 기억하고자 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잊혀지기 쉽다. 하지만 우리들 삶의 조각들이 모여 진정한 역사가 이루어지고 미래가 만들어진다고 믿는다면 그들이 바로 우리의 과거이고 역사일 것이다.
객관적 사실을 넘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단면을 드러내는 소설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청소년 소설이 아이들의 고민과 방황을 그려내고 그들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담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또 다른 삶의 조건들을 보여주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소설은 현재와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과거의 기억으로 많은 아이들에게 읽힐 필요가 있다.
091004-0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