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다윈혁명 - 우리 사회 지성 19인이 전하는 다윈 혁명의 현장
최재천 외 18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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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념이 가득한 자, 자신이 정의롭다고 확신하는 자들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의문이 가득한 자를 신뢰한다.” - 김훈

  무슨 책인지 잡지인지 알 수 없지만 소설가 김훈의 한 마디가 사무쳤다. 잘 적어 놓은 걸 보니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실천에 대해 고민이 있었나보다. 어떤 글이든 사람이든 ‘때’를 만나야 한다고 믿는다. 아무리 좋은 사람, 훌륭한 글을 읽어도 마음에 닿지 않는 때가 있고 보잘 것 없는 사소한 인연이지만 평생 함께하는 인연이 되기도 하고 평범한 한 줄의 글이 삶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는 것은 ‘언제’인가가 중요하다.

  짧은 생이지만 돌아보면 무수한 사람들과 만났고 헤어졌으며 많은 책을 읽고 잊어버렸다.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듯 잊고 싶지 않은 문장과 구절들이 이제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새삼스러운 이유는 나이 탓이 아니라 기억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망각의 힘은 위대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고백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고 사는지.

  굳은 신념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이제 겨우 150년이 흘렀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 때문에 다윈을 찾는 것은 아닐까? 과연 다윈이 우리에게 길을 열어준다고 믿는 이 많은 사람들의 맹목은 또 다른 종교적 광신은 아닐까? 하지만 왜 여전히 다윈을 기억해야 하는지 우리는 가만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류에게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죽음은 한 존재의 망각으로 완성된다고 한다면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은 불멸의 존재가 되어 누구보다도 열심히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다윈이다. 불과 150년 전인 1859년 11월 24일 영국 런던의 존 머레이 출판사가 <종의 기원>을 내 놓는다. 초판 1,170권은 당일 매진됐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회에 코페르니쿠스적 충격을 가한 이 책은 여전히 살아 숨쉬는 우리들의 고전이 되었다.

  특정 시기에 특정인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상징이 만만치 않게 우리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밝혀주고 있다. 이념을 넘어 다윈의 생각은 시대의 반역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회와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는 생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변화도 발전도 즐거움도 없는 것은 아닐까?

  평생 병마와 싸우며 어린 딸을 잃고 신의 존재마저 부정하고 싶었던 불행한 남자의 책은 작가의 삶을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명의 탄생이 우연이라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말을 뱉어버리고 싶은 다윈의 심정을 헤아려본다. 점점 지질학부터 인류학에 이르기까지 학문을 넘나들며 그 명백한 증거들 앞에서 진실을 외친 다윈은 행복했을까?

  개인의 행복과 불행을 넘어 인류의 지적 토대 자체를 뒤흔든 대지진이 벌어진다.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함께 20세기를 뒤흔든 지구인 3명 중 하나인 다윈의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네며 살아있다. 다만 우리가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귀를 막고 제 갈 길을 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뿐이다. <21세기 다윈 혁명>은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과 세계화를 통한 금융위기, 민주주의의 위기와 인문학의 위기, 환경 문제와 미래 사회를 내다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최재천을 비롯한 19명의 각 분야의 교수들이 21세기의 전망을 다윈코드에 맞춘다. 하나의 키워드로 이렇게 다양한 학문 분야를 섭렵할 수 있다는 사실도 놀랍기만하다. 철학, 과학, 윤리학, 종교, 사회과학, 심리학, 법학, 정치학, 경제학, 인류학, 성, 문학, 미술, 음악, 지질학, 환경, 의학, 공학, 복잡계과학이 그것이다.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출판 150주년을 맞은 올 해 기념식처럼 출간된 이 책은 최재천의 기획과 주도로 이루어졌다. 제목만 들어도 토할 것 같은 쓰레기 신문에 연재되었지만 김지하와 박홍을 들러리 세우는 신문에 실렸던 모든 글이 다 나쁠 수는 없다. 다윈을 통한 지식 백화점을 둘러본 느낌이다. 새로운 미래 사회에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각 분야에서 다윈은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학문을 통섭하는 다윈의 힘은 단순해서 아름다운 진화이론에서 나온다.

  그것은 고정 불변의 진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 어디서든 행복하고 즐겁게 춤출 수 있는 혁명을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변화와 새로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이 책도 다윈도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아니라 새로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을 따라 뛸 수 있는 체력과 열정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다윈보다 다윈의 생각이 낳은 결과와 여전히 창조론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을 함께 생각했다. 진리는 각자 마음 속에 간직하면 그뿐이다. 다만 변하지 않는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생각조차 영원히 변하지 않을 수 있을지 그것이 궁금할 따름이다.


09092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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