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책쟁이들 - 대한민국 책 고수들의 비범한 독서 편력
임종업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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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불고 해가지는 것처럼 사소한 일들이 매일 반복된다. 하지만 그 사소한 자연의 질서보다 위대한 인간의 일은 무엇일까? 구름 따라 흘러가듯 인생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던 시대가 따로 존재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조금 더 여유 있고 한가롭게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대가 20세기 이후에는 없었으리라.

  가끔 책에 관한 책을 읽는다. 고수들의 독서 편력이나 글 쓰는 사람들의 노하우를 공개하는 책들을 읽다보면 세상에 책이 없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싶어진다. 우선 학교가 없어지고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를까? 사서들과 서점 직원들은 뭘 할까? 도서관과 서점은 뭘 팔아야할까? 가상 시나리오지만 책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본다.

  일요일 아침은 유일하게 저절로 눈을 뜰 때까지 잘 수 있는 날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침대에서 뒹굴며 12시까지는 책만 본다. 절대독서시간. 평소에 읽는 것도 모자라 절대 독서 시간을 정해 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정말 아무생각 없이 가장 편안한 자세로 책에 푹 빠져 있는 이 시간이 나는 가장 행복하다. 그 시간에 일을 해야 하는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등산을 하든, 산책을 하든, 공부를 하든, TV를 보든 사람들은 누구나 가장 행복한 일을 한다고 믿는다. 아무것도 안하고 매일 그렇게 살 수 있을 때까지 나는 가능하다면 일요일 오전의 편안한 책읽기 시간을 행복하게 즐기고 싶다.

  책에 관한 책이 눈에 띠면 여러 번 망설이다가 한 권씩 사서 읽는다. 임종업의 『한국의 책쟁이들』도 여러 번 망설이다 읽었다. 사실 어떤 특별함이 없기 때문이다. 책에 미친 사람들의 성향이나 방법은 정상인의 눈으로 보아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그건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어떤 분야의 매니아가 되면 상식 수준을 넘게 된다. 다만 그것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따라 우리의 평가는 조금 달라질 수 있겠다. 하지만 세인들의 평가와 무관하게 지극한 행복과 한 우물을 파는 즐거움을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확인하기는 힘든 일이다.

  한동안 토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북섹션이 들어왔다. 두고두고 일주일 내내 읽었는데 어느 날부터 사라졌다. 그 한 코너에 실린 글들과 빠졌든 글들을 모은 『한국의 책쟁이들』은 책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다. 제목 그대로다. 책밖에 모르는 미련퉁이들의 이야기다. 누구보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이 책을 읽는동안 부러움과 불편함이 동시대 밀려왔다. 그들의 이야기에 감탄하다가 비슷한 상황과 처지에 공감하기도 했다.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 권의 책으로 인생이 바뀌었거나 책 때문에 부와 명예를 얻은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다. 한 평생 책을 좋아하며 책 속에 묻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이야기다. 저자는 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고 그들이 아껴둔 책들을 사진으로 담아냈다. 주로 헌책방에서 정보를 얻고 알음알음으로 소개받아 찾아낸 사람들이지만 이 사람들을 통해 아날로그 시대 책의 운명과 책에 대한 마지막 사랑을 확인하는 것 같아 슬픈 감동을 느꼈다.

  스물 여덟명의 책쟁이들은 직업도 나이도 성별도 다양하지만 책에 미쳤다는 단 하나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만화 마니아부터 동두천의 시인부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소개되었지만 내 눈길을 끌었던 사람은 단연 『전작주의자의 꿈』 조희봉씨. 화천에 내려가 아버지가 운영하던 우체국을 물려받아 상서우체국장이 된 조희봉씨의 변신도 생활도 반가웠다. 농촌에 내려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하는 그의 삶이 이제 책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책쟁이들의 공통점 중 한 가지는 가족들의 눈치를 본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른 것에 미친 것보다 낫다는 위안을 삼으려 이들 곁을 지키는 가족들의 노고도 이해가 갔다. 읽고 난 후의 책은 단순하게 소유물에 대한 집착으로 껴안고 있는 것과 다르다. 얼마전 10여 년간 정기 구독했던 <현대문학> 세 박스를 집 밖으로 내놓았다. 책꽂이 이외의 공간은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2천권도 안 되는 책을 갖고도 이런 고민을 하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책들은 또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 안타깝다. 마니아들의 특징이라면 죽음 이후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들도 모두 그런지 모르겠다.

  이 책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책 고수들에게 배울 것은 단순하게 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나름의 비범한 독서 편력을 가지고 있다. 한 분야에 대해 혹은 다양한 분야에서 종횡무진 고수의 진가를 발휘하는 책 수집과 독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 할만큼 각별하다. 작가의 세세하게 인터뷰해내지 못한 것들이 많아 답답하기도 했지만 행간에서 보여지는 공력과 그들의 공간을 점령하고 있는 수많은 책들을 통해 독자들은 그들의 특별함과 비법을 짐작할 수 있다.

  책읽기에 관한 한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다. 다만 곁눈질과 앞서 간 사람들의 방법을 참고할 뿐이다. 책쟁이들의 서재를 통해 슬쩍슬쩍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져보는 재미와 그들의 생활이 묻어나는 모습을 몇 장의 사진을 통해 확인하는 일은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날이 저물고 밤이 깊어가면 모두들 책장을 펼쳐 들 시간이다.


09102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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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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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에 들러붙은 아우라는 예술이 아직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던 시절의 흔적이다. 근, 현대 미술에서 종교적 숭배가치는 사라지고 미술관에서 전시가치만 갖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이를 한탄했지만 벤야민은 아우라의 파괴를 긍정했다. 종교 가치에서 전시가치로 변하는 것은 진보적 현상이라는 해석이다.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미술작품의 ‘아우라’를 통해 정면으로 충돌한다.

  미술관에 전시회를 보러가는 행위는 종교적 순례와 유사하다. 인터넷을 통해 어디에서나 선명한  FULL-HD LCD 모니터를 통해 미술품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특별한 전시 공간을 찾아가는 것은 원작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다. 기술복제 시대는 복제품을 예술 수용의 주체를 대중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원작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는 관객을 압도한다.

  그러나 사진과 영화는 대중들을 예술 수용의 주체로 그리고 예술 행위의 주체로 한 단계 끌어올렸다. 언제어디서나 주눅들지 않고 즐기고 감상하며 수용자에서 창조자로 변신이 가능하다. 누구나 사진을 찍고 보고 즐긴다. 더구나 인터넷은 이제 미술 전시의 공간까지도 변화를 가져온다. 예술 자체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물론 감상과 수용 그리고 창작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는 혁명적 변화를 경험했으며 그 변화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원작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한다. 중세와 르네상스 그리고 고전주의와 바로크를 거쳐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 명멸했던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들 중에 영혼의 울림을 주는 원작과 대면하는 경험을 해 본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나는 마그리트, 다비드, 샤갈, 르누아르, 마티스 등 많은 화가들의 원작을 보러 다녔지만 ‘영혼의 울림’을 경험한 적은 거의 없다. 원작의 아우라에 압도당한 경험은 있지만 깊은 울림을 느끼지 못한 것은 순전히 가슴이 아닌 머리로 이해한 후의 감상태도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라루스 서양미술사를 시대별로 읽었지만 수많은 전문가들의 미술과 예술에 대한 이론을 이해했지만 감상은 별개의 것이다. 이제는 여유 있는 마음과 배경지식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산책하듯 그림을 감상할 기회를 갖고 싶다. 그것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미술관을 찾아가는 원작에 대한 확인 작업과 구별되어야 한다. 진중권의 <교수대 위의 까치>는 내게 이런 생각들을 떠올렸다.

  “나의 영혼에 울림을 준 그림은 마치 원래 한 몸이었으나 세상에 태어나면서 둘로 쪼개져야 했던 자신의 반쪽과 같았다.”라는 진중권의 한 마디 때문에 책을 읽기도 전에 생각은 날개를 달아버렸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는 사진의 의미에 두 개의 충위가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는 ‘스투디움(Studium)’으로,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일반적’ 해석의 틀에 따라 읽어내는 의미다. 우리는 특정한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이 뭘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하곤 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그런 일반적 해석과 관계없이, 때로는 그것을 전복하면서 보는 이의 가슴과 머리를 찌르는 효과이다. 오직 보는 이 혼자만이 느끼는 이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효과를 바르트는 ‘푼크툼(punctum)’이라 부른다. - 프롤로그 ‘푼크툼’으로서 그림

  사실 이 책은 조이한과 진중권이 함께 쓴 『천천히 그림읽기』와 비슷한 책으로 짐작했다.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진중권의 ‘푼크툼’을 빌려보려는 독자들에게 적합한 책이다. 이 책은 두 가지 측면에서 값진 경험을 하게 한다. 첫 번째는 새로운 그림 정보다. 익숙하거나 이미 알고 있는 그림도 몇 개 포함되어 있지만 처음 접하는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크다.

  두 번째는 다양한 해석의 즐거움이다. 진중권도 인용했듯이 수잔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모든 해석에 반대한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보편적 구속력이 있는 정답으로 작품을 감싸버리면 하나의 고정된 의미로 규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작품의 의미를 자유롭게 풀어주자는 것이다. 특히 문학의 해석은 혼합주의 양상을 띠기 때문에 서로 상이한 해석과 해석들 사이의 모순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이 책의 가장 빛나는 부분으로 읽혀야 한다. 발랄한 진중권의 번뜩이는 재치가 아니라면 이 책을 읽을 이유가 없다. 결국 이 책은 그림에 대한 ‘해석’의 발견에 초점을 두고 읽어야 하겠다.

  <주의 얼굴에 침을 뱉은 자>부터 <고야의 개>까지 열 두 개의 그림은 정교한 알레고리를 통해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개별적 작품들의 해석이지만 한 권의 책으로 모여 즐거운 성찬이 된 듯한 느낌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원본을 감상하고 싶은 갈증만 높아졌다. 우연히 마주친 그림에서, 익숙했던 그림들 사이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무엇에 비할까. 여유 있고 풍요로운 삶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의 사물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애정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편안한 신발과 간편한 복장으로 아무도 없는 미술관을 어슬렁거리고 싶은 밤이다.


091023-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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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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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은 내게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밤들을 떠올리게 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그 나라마저도 내게는 미칠 듯이 사랑스러웠으니까. 우린 연인이었다. 그 나라에서 케이케이가 왔다. -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중에서

  독자가 고민하지 않고 책을 사는 작가는 얼마나 행복한가. 또 얼마나 큰 부담일까. 김연수는 내게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쓴 많은 소설과 산문을 통해 나는 그가 천상 소설가라는 생각을 했다. 은희경이나 김영하처럼 번개를 맞은 것처럼 우연히(?) 소설가가 된 경우도 있겠지만 오랜 시간 습작과 준비를 거쳐 작가가 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김연수는 그 중간쯤 서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물론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작가가 되는 과정보다 독자들은 그의 작품만을 읽어낸다. 나이, 성별, 학력, 직업, 이력들이 작품 이해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철저하게 작가의 문장이 작가를 말해준다.

  나는 지금부터 나올 김연수의 소설이 더 궁금하다. 깊은 사유와 감각적인 인상, 꾸준한 인문학에 대한 독서를 통해 지적이면서도 섬세한 감수성의 세계를 보여준 그의 소설들은 그를 이상문학상 작가로 만들었고 수많은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나는 더 농익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다. 재능 없는 성실함처럼 답답한 일이 또 있을까? 게으른 천재의 잔재주도 짜증나기는 마찬가지다. 김연수는 그 중간쯤 서 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신작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청춘의 중간 결산쯤 되는 소설집이 아닐까 싶다. 9편의 단편을 모아서 묶어낸 이 책은 작가가 견지해온 슬픔을 기저에 두고 있다. 사랑과 슬픔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 작가의 천형이라면 김연수는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작가라고 볼 수 있다.

비록 형편없는 기억력 탓에 중간중간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빠진 것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인생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 장치와 같으니까. 모든 일에는 흔적이 남게 마련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최초의 톱니바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 ‘세계의 끝 여자친구’ 중에서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처럼 ‘세계의 끝 여자친구’, ‘당신들 모두 서른이 됐을 때’, ‘달로 간 코미디언’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랑처럼 진부한 것은 참을 수 없다는 말은 문학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문제다. 삶의 이야기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로 사랑을 택했을 뿐 김연수의 이야기를 연애 소설로 읽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랑의 슬픔을 끊임없이 설명하고 색다른 방식으로 수다를 떨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흔적이 남는다. 우리가 살아온 생의 이면에는 늘 깊은 생채기가 남고 켜켜이 세월의 흔적이 남겨진다. 김연수는 그 갈피와 무늬에 물을 부어 흐릿해지는 기억을 재생한다. 우리에게 과연 사랑은 무엇이고 그 사랑이 남긴 삶의 과정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전언이다. 나는 그렇게 김연수의 소설을 읽는다.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 ‘세계의 끝 여자친구’ 중에서

  그래서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로 산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생의 진실이 아니라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속성을 갖고 태어난다. 타인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것, 타인이 아는 것을 나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식의 방법과 태도에 대한 오만이다.

  ‘내겐 휴가가 필요해’라고 말하는 주인공은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듯하다. 바닷가 도서관에서 10년 동안 책을 읽었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바닷가에서 사체로 발견된 그는 현실 속에서 고문 경찰관이다. 하지만 존재의 근원도 세상의 진실도 어쩌면 책 속에서 찾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가 알아 낸 것을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책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만 일깨워 줄 뿐이다. 책읽기가 때때로 무의미한 노동이 아닐까 싶은 자괴감이 드는 것은 타인의 진실을 알 수 있다는 허망한 믿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작가가 무엇을 쓰려고 했든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혼자만의 환상을 만들고 사람과 사랑과 세상에 대한 또 다른 벽을 절감했다.

  내게도 청춘이 지나가버렸다. 불안한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진부한 것은 참을 수 없었던 청춘이.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진부한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불안한 것은 참지 못한다. 꿈은 없어도 돈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모든 ‘나’에게 어울리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난 불안한 것 참을 수 있어도 진부한 건 도저히 못 참아. 꿈과 돈 사이에서 갈등하는 청춘이라는 건 너무 진부해. 나한테는 정말 안 어울려.  -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중에서


091021-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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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2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1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8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대, 컨셉력에 목숨 걸어라 - 88만원 세대에게 전하는 한기호의 자기 생존 솔루션
한기호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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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나름의 기능을 가진다. 한 시대를 정리하고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은 몇 권의 책을 통해 얻을 수 없는 특별한 혜안이다. 재밌고 즐거운 책읽기, 예술적 감동을 얻는 책읽기, 지식과 정보를 얻는 책읽기, 배움을 위한 책읽기, 시간을 보내기 위한 책읽기, 정체성을 찾기 위한 책읽기 등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은 책을 읽는다. 하지만 책읽기를 통해 삶을 변화시키고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근본적으로 생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일이 책을 통해서 가능할까?

  중세의 봉건적 가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꿈꿔보기도 전에 제국주의에 유린당한 한반도는 해방이후 60여 년간 격동의 세월을 보냈다. 정치, 사회적으로는 물론 경제, 문화적으로도 급격한 변화가 이어졌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현재를 살펴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지식인의 책무일 것이다. 사르트르가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역설했듯이 스스로 변화의 주체와 민중들을 위한 안내자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권력을 이용하고 안일하게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이념을 넘어 자신의 책무를 방기하는 파렴치한 행위이다. 지식인의 범주와 역할에 다양한 논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기성세대 혹은 어른이라고 불리는 세대는 다음 세대를 위해 최소한의 역할을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한기호는 <20대, 컨셉력에 목숨 걸어라>를 통해 대한민국 20대의 현실을 정확히 짚어냈고 현실적 대안은 물론 미래 사회의 방향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우석훈의 <88만원 세대>는 우리 사회의 경제현실과 젊은이들의 삶에 대해 수많은 논쟁을 불러왔다. 이 책도 어떻게 경쟁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승자독식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자기계발서 틈바구니에서 20대의 손에 반드시 쥐어주고 싶은 책이다. 아니 그보다 곧 20대가 되는 10대에게 먼저 읽혀야 하는 책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트리나 포올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은 이 시대의 청소년들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한 마리 애벌레들은 모두 소중한 나비가 될 준비를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경쟁 속에 내몰려 있다. 일제고사와 수능 성적 공개는 누구를 위해 왜 필요한 것일까? 동물들의 생태계처럼 인간 사회에서도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원칙이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경쟁 논리로 풀어내는 것이 과연 합당하고 가능한가? 공정한 경쟁 체제는 차치하고라도 삶의 목적과 방향을 가늠하지도 못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동일한 교재와 학습 내용을 가지고 그들의 능력을 한줄로 세우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조금만 더 멀리 내다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누구든 금방 알 수 있는데도 아이들을 끝없이 국영수 경쟁체제로만 내모는 교육에는 희망이 없다.

  하워드 가드너는 다중지능 이론을 통해 인간의 지능과 능력을 다양하게 분석했다. 우리 인간은 다양한 흥미와 소질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동일한 잣대와 기준으로 모두를 재단하는 방법은 문제가 있고 하나를 위해 모두가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일은 공멸의 지름길이다.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공감하면서도 그대로 방치한다면 명백한 기성세대의 직무유기다. 결국 10대와 20대가 가장 피해자가 되고 희생자가 될 것이다. 한번뿐인 인생에서 그들이 가야할 길을 제시하고 미래 사회의 가치를 안내하는 것은 어른들의 당연한 책임이다.

  모든 애벌레는 나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교육은 불가능할까? 한기호는 그 대안으로 책읽기를 제시한다. 신자유주의 무한경쟁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그의 주장은 현실과 동떨어 보이지만 현실에 대한 적확한 분석과 날카로운 비판의식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주장의 근거를 갖추고 있다. 물론 그 바탕에는 종횡무진 분야를 가리지 않고 넘나드는 책읽기와 정확한 분석능력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출판계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무서울 정도의 독서력은 그의 혜안을 뒷받침한다. 다양한 분야의 책에서 인용하고 저자들의 이야기를 소화해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칼날처럼 예리하다. 그가 인용한 대부분의 책을 읽었기 때문에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슬프지는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20대의 비정규직화는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대학 입학에 동시에 어지간한 중산층 가정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등록금 부채가 시작된다. 85%라는 OECD 최고 대학진학률을 자랑하는 사회구조도 문제지만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없는 현실을 무한 경쟁체제로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두가 애벌레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한 마리 나비가 되기위해 자신의 ‘컨셉력’을 갖춰야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취업학원으로 전락한 대학에서는 앉아서 코풀기 위해 우수학생 유치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대학은 다양한 능력을 가진 학생들을 다양한 선발 방식을 통해 선발하고 그들을 제대로 교육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한기호는 이 책에서 대학 4년 동안 1주일에 한권씩 200권의 책을 읽으라고 주문한다. 인문학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분야의 교양을 통해 전문적인 분야에 대한 지식을 쌓고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컨셉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정형화된 취업 5종세트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자신의 스펙관리만 잘 한다고 해서 정규직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을 정확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말자.

  이 책은 세상을 읽고 분석하고, 생존의 솔루션을 찾고, 아름다운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컨셉력’을 갈고 닦으라고 주문한다. 그 중심에는 책읽기가 놓여 있다. 시대가 달라지고 세상이 변해도 근본적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책읽기다. 책만 읽으면 문제가 해결되겠냐는 반론은 차후의 문제다. 수능성적으로 평생이 좌우되고 승자독식의 경쟁체제와 경제적 능력만이 유일신이 된 세상에서 책읽기는 과연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다.

  역사를 통해 현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은 인터넷 검색만으로 얻을 수가 없다. 진지한 책읽기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혜안에서 비롯된다. 관계와 소통을 통해 미래 사회의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20대를 기대하려면 바로 지금 우리 주변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고민하는 힘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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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인 6색 인터뷰 특강 인터뷰 특강 시리즈 6
금태섭 외 지음, 오지혜 사회 / 한겨레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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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는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림 (화:畵)
재앙 (화:禍)
신발 (화:靴)
화 (化)
  변화
  합계의 옛말
화 (火)
  화요일의 준말
  불
  노여움
일본을 화(일본어: 和 와[*])라고 표현한다.

  위키백과에서 ‘화’를 찾아보았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웃고 또 화를 낸다. 나는 오늘 몇 번이나 화를 냈을까? 몇 번이나 웃었을까? 사람이 70까지 산다고 할 때 화내는 시간은 약 2년이라고 한다. 웃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하루에 열 번 웃으면 약 5분, 평생 88일 동안 웃는다고 한다. 석 달도 안된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우울한 통계가 아닐 수 없다.

  한겨레창간 15돌 기념 인터뷰 특강이 벌써 여섯 번째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인터뷰 특강을 듣지는 못하고 읽고 있다. 시대정신을 하나의 주제로 뽑아내고 그 주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인터뷰하는 형식의 특강은 내가 지금 여기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외면하고 싶고 부끄러운 현실일 수도 있지만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오히려 용기있는 행동이다. 올해의 주제는 ‘화’다. 얼마나 화나는 일이 많은가? 눈감고 귀닫고 생각하지 않고 살면 행복하게 살 수도 있다. 내게는 그런 바탕이 없는 것 같다. 작년 5월부터 뉴스조차 끊어버리고 TV를 보지 않고 살지만 신문과 인터넷 뉴스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 나이 들어가면서 세상을 알아가면서 절망과 분노는 점점 심해지기만 한다. 마음 편하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살수 없는 마음밭을 타고 태어난 것은 개인적으로 불행이다.

  공자는 『論語』 제 13편 자로(子路)
  자공이 묻기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한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직 부족하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싫어한다면 어떻습니까?”
  “아직 부족하다. 마을 사람들 중에 선한 사람이 좋아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이 싫어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불현 듯 생각나 먼지 묻은 논어를 꺼내 뒤적여 찾아낸 구절이다. 모든 사람에게 나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도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기막힌 가르침. 우리는 둥글게 둥글게를 외치지만 그 말은 적당한 타협과 비굴함을 은폐한 말이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개인적인 불이익의 감수를 의미한다.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새삼스럽게 공자님 말씀을 떠올리는 것은 대한민국 사람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화’를 내고 있는지 아니면 ‘화’를 참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첫 번째 주자인 진중권은 이제 대학 시간강사 자리에서 쫓겨났다. 3월에 특강을 할 때만 해도 교수라고 불리고 있으니 현실은 시시각각 ‘화’를 돋우고 있다. 윤도현과 김제동이 짤리고 이제는 손석희도 오락가락이다. 식물인간이 아니라 식물TV가 될 모양이다. 어떤 정권이든 언론을 길들이고 싶지 않겠나마는 각본 없는 코미디도 이만하면 수준급이다. 세상을 버리고 산속에 칩거했던 선인들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가는 것은 내 성격의 결함 탓이거나 아직도 현실에 적응하지 소아병적 태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중권은 ‘대중의 화’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그 화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짚어준다. 대중의 분노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인 분노가 필요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표출하여 공적인 분노의 힘을 보여줄 때가 온 것은 아닌가?

  정재승은 우리 뇌에서 ‘화’가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을 설명하고 『디케의 눈』을 통해 우리나라 사법제도의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했던 금태섭은 ‘사형제’를 분노의 법으로 규정하며 그 실태를 통찰한다.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를 통해 만나보았던 홍기빈은 ‘돈’이 불러오는 ‘화’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함께 고민한다.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의 안병수는 ‘화난 음식’에 대해 고발한다. 마지막 주자는 『건투를 빈다』의 김어준이다. 서민들의 화내기인 패러디와 풍자에 대해 말한다. 웃으면서 화내고 자기객관화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며 특강을 끝맺는다.

  여섯 명 모두 책으로 먼저 만났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더 좋았을 텐데 또다시 책으로 만나 아쉽기만 하다. 내년에는 어떤 주제로 특강이 이루어질지 궁금하다. 2009년을 하나의 주제어로 정리하면 내년의 주제는 무엇이 될 것인지. 화내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개인적인 차원의 화가 아니라 공적인 차원의 화가 될 때 문제다.

  개인적 차원의 고민과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화’가 훨씬 더 치명적일 수도 있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사회적 차원의 화는 대책이 있어도 실천하기 어렵고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인 경우는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후자의 경우가 건강을 해치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좋은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에게 매우 나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화내고 웃는 일이 더 많은 세상을 꿈꾸지 않는다면 오늘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091013-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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