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책쟁이들 - 대한민국 책 고수들의 비범한 독서 편력
임종업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바람이 불고 해가지는 것처럼 사소한 일들이 매일 반복된다. 하지만 그 사소한 자연의 질서보다 위대한 인간의 일은 무엇일까? 구름 따라 흘러가듯 인생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던 시대가 따로 존재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조금 더 여유 있고 한가롭게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대가 20세기 이후에는 없었으리라.

  가끔 책에 관한 책을 읽는다. 고수들의 독서 편력이나 글 쓰는 사람들의 노하우를 공개하는 책들을 읽다보면 세상에 책이 없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싶어진다. 우선 학교가 없어지고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를까? 사서들과 서점 직원들은 뭘 할까? 도서관과 서점은 뭘 팔아야할까? 가상 시나리오지만 책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본다.

  일요일 아침은 유일하게 저절로 눈을 뜰 때까지 잘 수 있는 날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침대에서 뒹굴며 12시까지는 책만 본다. 절대독서시간. 평소에 읽는 것도 모자라 절대 독서 시간을 정해 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정말 아무생각 없이 가장 편안한 자세로 책에 푹 빠져 있는 이 시간이 나는 가장 행복하다. 그 시간에 일을 해야 하는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등산을 하든, 산책을 하든, 공부를 하든, TV를 보든 사람들은 누구나 가장 행복한 일을 한다고 믿는다. 아무것도 안하고 매일 그렇게 살 수 있을 때까지 나는 가능하다면 일요일 오전의 편안한 책읽기 시간을 행복하게 즐기고 싶다.

  책에 관한 책이 눈에 띠면 여러 번 망설이다가 한 권씩 사서 읽는다. 임종업의 『한국의 책쟁이들』도 여러 번 망설이다 읽었다. 사실 어떤 특별함이 없기 때문이다. 책에 미친 사람들의 성향이나 방법은 정상인의 눈으로 보아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그건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어떤 분야의 매니아가 되면 상식 수준을 넘게 된다. 다만 그것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따라 우리의 평가는 조금 달라질 수 있겠다. 하지만 세인들의 평가와 무관하게 지극한 행복과 한 우물을 파는 즐거움을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확인하기는 힘든 일이다.

  한동안 토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북섹션이 들어왔다. 두고두고 일주일 내내 읽었는데 어느 날부터 사라졌다. 그 한 코너에 실린 글들과 빠졌든 글들을 모은 『한국의 책쟁이들』은 책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다. 제목 그대로다. 책밖에 모르는 미련퉁이들의 이야기다. 누구보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이 책을 읽는동안 부러움과 불편함이 동시대 밀려왔다. 그들의 이야기에 감탄하다가 비슷한 상황과 처지에 공감하기도 했다.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 권의 책으로 인생이 바뀌었거나 책 때문에 부와 명예를 얻은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다. 한 평생 책을 좋아하며 책 속에 묻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이야기다. 저자는 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고 그들이 아껴둔 책들을 사진으로 담아냈다. 주로 헌책방에서 정보를 얻고 알음알음으로 소개받아 찾아낸 사람들이지만 이 사람들을 통해 아날로그 시대 책의 운명과 책에 대한 마지막 사랑을 확인하는 것 같아 슬픈 감동을 느꼈다.

  스물 여덟명의 책쟁이들은 직업도 나이도 성별도 다양하지만 책에 미쳤다는 단 하나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만화 마니아부터 동두천의 시인부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소개되었지만 내 눈길을 끌었던 사람은 단연 『전작주의자의 꿈』 조희봉씨. 화천에 내려가 아버지가 운영하던 우체국을 물려받아 상서우체국장이 된 조희봉씨의 변신도 생활도 반가웠다. 농촌에 내려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하는 그의 삶이 이제 책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책쟁이들의 공통점 중 한 가지는 가족들의 눈치를 본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른 것에 미친 것보다 낫다는 위안을 삼으려 이들 곁을 지키는 가족들의 노고도 이해가 갔다. 읽고 난 후의 책은 단순하게 소유물에 대한 집착으로 껴안고 있는 것과 다르다. 얼마전 10여 년간 정기 구독했던 <현대문학> 세 박스를 집 밖으로 내놓았다. 책꽂이 이외의 공간은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2천권도 안 되는 책을 갖고도 이런 고민을 하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책들은 또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 안타깝다. 마니아들의 특징이라면 죽음 이후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들도 모두 그런지 모르겠다.

  이 책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책 고수들에게 배울 것은 단순하게 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나름의 비범한 독서 편력을 가지고 있다. 한 분야에 대해 혹은 다양한 분야에서 종횡무진 고수의 진가를 발휘하는 책 수집과 독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 할만큼 각별하다. 작가의 세세하게 인터뷰해내지 못한 것들이 많아 답답하기도 했지만 행간에서 보여지는 공력과 그들의 공간을 점령하고 있는 수많은 책들을 통해 독자들은 그들의 특별함과 비법을 짐작할 수 있다.

  책읽기에 관한 한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다. 다만 곁눈질과 앞서 간 사람들의 방법을 참고할 뿐이다. 책쟁이들의 서재를 통해 슬쩍슬쩍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져보는 재미와 그들의 생활이 묻어나는 모습을 몇 장의 사진을 통해 확인하는 일은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날이 저물고 밤이 깊어가면 모두들 책장을 펼쳐 들 시간이다.


09102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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