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원작에 들러붙은 아우라는 예술이 아직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던 시절의 흔적이다. 근, 현대 미술에서 종교적 숭배가치는 사라지고 미술관에서 전시가치만 갖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이를 한탄했지만 벤야민은 아우라의 파괴를 긍정했다. 종교 가치에서 전시가치로 변하는 것은 진보적 현상이라는 해석이다.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미술작품의 ‘아우라’를 통해 정면으로 충돌한다.

  미술관에 전시회를 보러가는 행위는 종교적 순례와 유사하다. 인터넷을 통해 어디에서나 선명한  FULL-HD LCD 모니터를 통해 미술품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특별한 전시 공간을 찾아가는 것은 원작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다. 기술복제 시대는 복제품을 예술 수용의 주체를 대중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원작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는 관객을 압도한다.

  그러나 사진과 영화는 대중들을 예술 수용의 주체로 그리고 예술 행위의 주체로 한 단계 끌어올렸다. 언제어디서나 주눅들지 않고 즐기고 감상하며 수용자에서 창조자로 변신이 가능하다. 누구나 사진을 찍고 보고 즐긴다. 더구나 인터넷은 이제 미술 전시의 공간까지도 변화를 가져온다. 예술 자체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물론 감상과 수용 그리고 창작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는 혁명적 변화를 경험했으며 그 변화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원작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한다. 중세와 르네상스 그리고 고전주의와 바로크를 거쳐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 명멸했던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들 중에 영혼의 울림을 주는 원작과 대면하는 경험을 해 본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나는 마그리트, 다비드, 샤갈, 르누아르, 마티스 등 많은 화가들의 원작을 보러 다녔지만 ‘영혼의 울림’을 경험한 적은 거의 없다. 원작의 아우라에 압도당한 경험은 있지만 깊은 울림을 느끼지 못한 것은 순전히 가슴이 아닌 머리로 이해한 후의 감상태도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라루스 서양미술사를 시대별로 읽었지만 수많은 전문가들의 미술과 예술에 대한 이론을 이해했지만 감상은 별개의 것이다. 이제는 여유 있는 마음과 배경지식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산책하듯 그림을 감상할 기회를 갖고 싶다. 그것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미술관을 찾아가는 원작에 대한 확인 작업과 구별되어야 한다. 진중권의 <교수대 위의 까치>는 내게 이런 생각들을 떠올렸다.

  “나의 영혼에 울림을 준 그림은 마치 원래 한 몸이었으나 세상에 태어나면서 둘로 쪼개져야 했던 자신의 반쪽과 같았다.”라는 진중권의 한 마디 때문에 책을 읽기도 전에 생각은 날개를 달아버렸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는 사진의 의미에 두 개의 충위가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는 ‘스투디움(Studium)’으로,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일반적’ 해석의 틀에 따라 읽어내는 의미다. 우리는 특정한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이 뭘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하곤 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그런 일반적 해석과 관계없이, 때로는 그것을 전복하면서 보는 이의 가슴과 머리를 찌르는 효과이다. 오직 보는 이 혼자만이 느끼는 이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효과를 바르트는 ‘푼크툼(punctum)’이라 부른다. - 프롤로그 ‘푼크툼’으로서 그림

  사실 이 책은 조이한과 진중권이 함께 쓴 『천천히 그림읽기』와 비슷한 책으로 짐작했다.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진중권의 ‘푼크툼’을 빌려보려는 독자들에게 적합한 책이다. 이 책은 두 가지 측면에서 값진 경험을 하게 한다. 첫 번째는 새로운 그림 정보다. 익숙하거나 이미 알고 있는 그림도 몇 개 포함되어 있지만 처음 접하는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크다.

  두 번째는 다양한 해석의 즐거움이다. 진중권도 인용했듯이 수잔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모든 해석에 반대한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보편적 구속력이 있는 정답으로 작품을 감싸버리면 하나의 고정된 의미로 규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작품의 의미를 자유롭게 풀어주자는 것이다. 특히 문학의 해석은 혼합주의 양상을 띠기 때문에 서로 상이한 해석과 해석들 사이의 모순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이 책의 가장 빛나는 부분으로 읽혀야 한다. 발랄한 진중권의 번뜩이는 재치가 아니라면 이 책을 읽을 이유가 없다. 결국 이 책은 그림에 대한 ‘해석’의 발견에 초점을 두고 읽어야 하겠다.

  <주의 얼굴에 침을 뱉은 자>부터 <고야의 개>까지 열 두 개의 그림은 정교한 알레고리를 통해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개별적 작품들의 해석이지만 한 권의 책으로 모여 즐거운 성찬이 된 듯한 느낌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원본을 감상하고 싶은 갈증만 높아졌다. 우연히 마주친 그림에서, 익숙했던 그림들 사이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무엇에 비할까. 여유 있고 풍요로운 삶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의 사물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애정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편안한 신발과 간편한 복장으로 아무도 없는 미술관을 어슬렁거리고 싶은 밤이다.


091023-0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