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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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복’이란 말이 내게 만들어준 이미지는 청마 유치환의 「행복」이라는 시의 첫 구절이다. 통영여중에서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진 청마. 딸 하나를 둔 채, 스물 한 살에 청상이 된 이영도를 사랑하게 된 청마. 그는 철벽같은 현실 앞에 좌절했을까? 건널 수 없는 강 같은 그리움에 행복했을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니라’는 기막힌 아이러니는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는 정호승의 「또 기다리는 편지」조차 청마의 「행복」에 대한 변주로 들린다. 우리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해가지고 을씨년스런 겨울 하늘과 아파트 지붕의 경계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들의 날개짓을 바라보는 이 푸른 시간이 어쩌면 내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루시드 폴의 ‘날개’를 들으며 밝음과 어둠의 경계를 내다볼 수 있는 이 작은 평화 외에 무엇이 필요할까?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은 ‘행복이 당신 곁을 떠난 이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 플라톤은 ‘고통이 없는 상태’라는 최소한의 조건을 제시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은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것일 게다. 탁월성을 획득하는 데 아주 불구이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종류의 배움과 노력을 통해 행복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작은 배움과 노력으로 성취할 수 것이 ‘행복’이라고 말했다.

  70년 전에 러셀은 ‘경쟁, 권태, 자극, 피로, 질투, 피해망상, 죄의식, 여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행복이 우리의 곁을 떠난다고 이야기한다. 그에 비해 ‘열정, 사랑, 일, 폭넓은 관심, 노력’ 등이 우리를 행복으로 안내한다고 말한다. 어찌보면 단순하고 간단한 행복론이다. 그러나 러셀의 이야기는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뻔한 관점으로 말할 수 있는 깊이와 넓이를 뛰어넘는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종교적인 계명에 순종하거나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서는 행복할 수 없는 자명한 진리에 도달한다. 자신의 욕구와 관심에서 벗어나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불행의 원인을 ‘세상’에서 찾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나의 생존을 지탱해주고 나에게 행복의 기회를 제공하는 외부세계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통한 교류 없이는 행복한 삶은 불가능하다.

  당신은 행복한가? 우리는 한 번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운 적도 없고 훈련을 받은 적도 없다. 평생 우리를 지켜줄 행복에 대한 관점을 만들고 가치관을 세우는 일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네모난 틀에 갇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경쟁에서 이긴다고 해서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가 바로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다.

  러셀은 이 책에서 어려운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수다스런 말로 행복해지는 법을 달콤하게 말하지도 않는다. 깊은 자기 성찰과 세상에 대한 통찰로부터 길어 올린 사색의 결과는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전해준다.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한 인생이다. 진정한 기쁨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만 깃들기 때문이다. - P. 75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과로라고 하지만, 실제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과로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걱정이나 불안이다. - P. 82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을 완전히 인식하면서 느끼는 행복이야말로 진정한 충족감을 주는 행복이다. - P. 119


  문장 하나하나가 벽에 붙여두고 음미할 만한 금언처럼 읽히는 책이다. 수학자이며 철학자로 행동하는 지성으로 진보적인 지식인으로 세상의 모순과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냉철하게 인식했던 20세기의 가장 명민한 인간이었던 러셀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이성과 감성을 갖춘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타인과의 관계, 세상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나에게 러셀이 전해주는 불행의 원인과 행복의 조건은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한다. 하루에 3천 단어 이상을 사용해서 매일 글을 썼다는 러셀의 글은 깊고 아름답다. 나를 돌아보고 삶을 반성하게 하는 『행복의 정복』은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책으로 손색이 없다. 깊은 겨울, 한 해를 돌아보고 다가올 새해를 맞이하면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닐까 싶다.

올바른 기분 전환 방법은 사고 작용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거나 적어도 현재의 불행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다. - P. 246


09120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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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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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와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내 책읽기의 등대였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과정과 방법을 배운 책이었다. 깊이와 넓이를 아우르는, 진지한 사유와 성찰이 밑바탕이 되는 책읽기의 세계는 내가 만난 어떤 세상보다도 매혹적이었으며 아름다웠다.

  세상에는 책읽기의 고수가 많다. 하지만, 양과 질적인 측면에서 골고루 책읽기에 성공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인다. 책읽기에서 ‘성공’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고, 그 목적과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단순히 한 분야의 책 읽기 고수는 책읽기 고수라 하지 않고 그냥 해당 분야의 학자나 연구자 혹은 전문가라고 한다. 정확한 개념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정의한다.

  기본적으로 인문학에 바탕과 뿌리를 두지 않은 책읽기는 사상누각과 같다. 모든 문제는 결국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인간의 삶과 사상의 흐름, 사회의 변화 과정을 인식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면 무릇 책읽기는 그저 고급한 취미와 젠체하기 좋은 겉멋에 불과하다. 그래서 특히 젊은 시절의 책읽기는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형성하며 나와 타인의 관계를 조망하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책읽기 고수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성인이 되기 전 이미 책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유영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책과 무관한 분야는 없다. 안철수와 박경철 같은 유명인을 비롯하여 체 게바라와 같은 혁명가에 이르기까지 활동 분야를 전문분야와 활동 분야를 막론하고 책은 모든 영감의 원천이며 행동의 출발이고 사상의 은사라고 할 수 있다.

  나이 오십쯤 되어 내 인생의 책을 정리하고 싶은 욕망이 나에게도 생길지 모르겠지만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를 읽는 내내 말할 수 없는 공감과 감동의 물결이 밀려왔다. 지식소매상을 자처하는 사람답다. 겨우 열네 권을 추렸지만 그의 책읽기와 글쓰기 내공은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하고 정교한 그물처럼 짜여있다. 한 사람의 내밀한 영혼의 지도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뼛속까지 드러내는 일이다. 작가의 구석구석을 탐욕스럽게 샅샅이 훑어내는 나의 시선이 오히려 섬뜩하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까지 다시 읽어내면서 유시민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의 ‘청춘’이 궁금한 게 아니라 지나온 시간과 흘러간 세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인간이 지켜야할 진정한 가치와 고전의 눈부신 문장들을 함께 읽어보고 싶었다. 수많은 책에 관한 책 중에서도 『청춘의 독서』가 빛을 발하는 이유는 바로 냉정하고 합리적인 이성과 날카로운 비판정신 그리고 따뜻한 감성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이제 갓 세상에 나가 길을 찾는 딸에게’ 바쳐진 이 책은 험한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딸에게 들려주는 아버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면바지 차림으로 국회에 서서 양복쟁이 국회의원들에게 신고식을 당하던 유시민의 어색한 표정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를 조금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그가 이제 오십이 넘었고 그의 딸은 스무살이 되었다. 그렇게 옳은 말을 말을 그렇게 싸가지 없게 할 수 있는 그의 소신에 박수를 보냈지만 정치적 행보와 색깔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유시민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가 교차한다. 하지만 스물 여섯에 감옥에서 쓴 ‘항소이유서’를 읽으면서 그의 글을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영희 선생은 말한다. 진실,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 지식인은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산다. 선생의 글을 다시 읽으니 선생이 내게 묻는다.
너는 지식인이냐. 너는 무엇으로 사느냐. 너는 권력과 자본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떳떳한 사람이었느냐. - P. 48


지적 활동 중단 선언을 하신 리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다시 읽고 스스로 던진 질문이 아프게 와 닿는다. 평범한 생활인인 내가 가져야하는 부담과 고민만큼만 다른 사람도 가질 수 없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오래된 청춘의 지도를 들여다보는 작가 옆에서 그 지도를 함께 들여다보는 즐거움으로 며칠을 보냈다. 고마울 따름이다.

  읽었던 책은 다시 읽고 미처 읽지 못했던 몇 권의 책은 당장 읽고 싶어졌다. 책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들을 얼마나 귀 기울여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나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직장을 다녀도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과 삶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삶이 되기를 희망한다. 시간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보수주의는 사회의 부유하고 명망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기 때문에 영예로운 장식적 가치를 얻는다. 이것이 더 심화되면 우리의 관념 속에서는 보수적 견해를 고수하는 것은 당연히 존경받아야 할 대상으로 평가된다. (……) 보수주의는 상층계급의 특징이기 때문에 품위가 있는 반면, 혁신은 하층계급의 현상이기 때문에 저속(vulgar)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사회적 혁신을 외면하게 만드는 그 본능적 반발과 비난의 가장 단순한 요소는 사물의 본질적 비속성(vulgarity)에 대한 관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혁신자(innovator)가 대변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그가 치유하려는 악이 시간적 ․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거나 개인적으로 접촉할 가능성이 없을 때 이런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 혁신자는 교제하기에는 불쾌한 인물이며 무릇 그와 접촉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혁신은 나쁜 것(bad form)이다. - P. 244(『유한계급론』, 179쪽)

  읽지 않은 책 중에 가장 읽어 싶어진 책 중의 하나다. 보수와 진보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를 이렇게 적확하게 짚어낼 수 있을까 싶다. ‘혁신자는 교제하기에는 불쾌한 인물이며 무릇 그와 접촉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뼈아픈 지적이지만 ‘혁신은 나쁜 것’이라는 말은 지루한 세상에 던지는 불타는 구두같은 말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풍자가 지나치면 눈물을 자아낸다.

  혁명 전사도 투사도 아닌 내가 이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가슴 밑바닥부터 아려왔다. 지치고 힘들 때, 포기하고 싶을 때, 나약해지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두고두고 생각해 볼 책이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시대를 견딜 힘조차 내겐 없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가끔 두렵고 외로운 밤이 찾아온다.

“역사와 사회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어떤 자동적인 또는 불가피한 진행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계속적 발전에 대한 믿음”(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중에서)이라고. 이 믿음만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그의 격려를 받아들여야 할까? - P. 312


09120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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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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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유동이 바로 모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절대로 한곳에 머물지 않는…… 물 속에서도 공기 속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그래서, 살아 있는 생물은 보통 모래 속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것입니다…… - P. 32

  자연은 영원히 예술의 고향이다.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감정으로 자연을 바라보기도 하고 자연이 주는 경건함을 표현하는 예술은 어쩌면 수없이 반복되는 과거일 뿐이다. 내가 알고 있는 대상에 대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반적인 편견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특별한 혜안을 갖고 있지 않다면 산도 바다, 하늘과 강, 나무와 꽃도 피상적인 모습으로만 우리에게 인식된다.

  모래의 생명이 유동이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유목적 특성을 가진 모래는 언제나 자유롭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위대한 문학은 정신이 번쩍들게 하는 각성을 준다. 그런 면에서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는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사춘기에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까뮈의 『이방인』만큼 특이하고 인상적이다. 번역서가 가지고 있는 한계, 문장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릴 만큼 단숨에 책장이 넘어갔다. 이 책을 소개해 준 겨울님께 감사한다.(세상에 얼마나 많은 좋은 책이 있는 줄도 모르고 죽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안타까운 일인데 책을 권해주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바닷가 사구의 한 마을로 곤충채집을 하러갔던 한 사내. 그는 모래 속에 사는 여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신세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영원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사내의 실종. 도대체 그는 모래로 된 굴 속 같은 집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낼 수 있는지 상상해보자. 모래로 뒤덮여 있는 곳에서 혼자 살고 있는 서른 남짓의 여인. 하룻밤을 신세 지게 된 남자가 다음 날 그녀는 전라의 몸으로 얼굴에 수건을 덮고 잠들어 있다. 기이한 광경일 수밖에 없다. 남자도 곧 익숙해지고 그 이유도 알게 된다. 살기 위해 모래를 퍼올리고 또 그렇게 생존하는 일상을 터득하게 되는 주인공.

  하지만 주인공은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고 실제로 마을 밖으로 탈출할 뻔 한다.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같은 게 있다면 인생에서 발버둥쳐 봐야 소용없는 노릇이다. 숙명은 믿지 않지만 자신의 한계와 상황은 믿는다. 인연도 우연일 뿐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이 되기도 하며 한 곳에 머물지 않는 모래가 가장 자유롭게 떠돌고 싶은 영혼을 가둘 수 있다는 아이러니! 이 소설의 기이함은 등장인물들의 태도가 아니라 모래의 속성같은 인간들의 관계에 있는지도 모른다.

모래  암석 파편의 집합체. 때로 자철광, 주석, 그리고 간혹 사금을 포함하고 있다. 직경 1/16~2mm.

  본문에 적혀있는 가장 객관적이고 사전적인 모래의 정의가 오히려 생경하다. 작가는 이 모래의 힘과 흐름을 모래의 기본적인 속성과 정직함을 따라간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사막이 끈적하게 피부에 달라붙는 땀방울과 한여름의 뜨거운 모래와 쉴새 없이 그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입안에서 서걱이며 씹히는 모래알갱이의 참을 수 없는 이물감처럼 낯설고 공포스런 주인공의 변신이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 잠자보다 우울해 보였다.

  이 소설의 매력은 모래와 여자 그리고 평범한 일상을 벗어난 교사인 남자의 관계에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모래를 받아들이고 모래에 순응하며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여자, 타의에 의해 여자와 동거하게 된 남자의 몸부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서 두 사람의 태도는 사뭇 진지하다. 모래는 여자에게 생활이며 고통이고 숙명이자 삶이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구속이며 죽음이고 욕망이자 소멸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려 했든 나는 맨 처음 까뮈가 떠올랐다. 앞서 말한 대로 『이방인』, 『시찌프스의 신화』의 강렬함이 생각났다. 하지만, 책장을 덮고 책 뒤표지를 보고 웃고 말았다. 그런 생각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던 듯. 영화로 만들었다는데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뒤적거려보거나 찾아봐야겠다.

어쩌면,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야말로, 힘의 절대적인 표현이 아닐까……. - P. 36

  절대적인 힘은 어떤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는 통찰력 있는 문장이 눈에 들어온 것은 최근의 상황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지켜내는 힘과 의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가치에 대한 판단 기준이 아니라 행동과 신념에 대한 기준은 스스로 지켜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아니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내게 그런 역량까지 주어지진 않은 모양이다.

  모래 구덩이에서 세상에서 가졌던 직업에 대한 소회를 밝히는 장면이 나온다. 교사였던 주인공이 선생들에 대해 평가해 놓은 장면이다. 매우 인상깊다. 그리고 적확하다.

실제로 선생들만큼 질투의 화신에게 매달리는 존재도 드물다……. 학생들은 해마다 강물처럼 자기들을 타고 흘러가는데, 선생들만 그 흐름의 밑바닥 깊이 박혀 있는 돌멩이처럼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타인에게 얘기하는 것이기는 해도 스스로 꿈꾸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기를 쓰레기 같은 존재라 여기고 고독한 자학 취미에 빠지든지 아니면 타인의 일탈을 고발하는, 의심 많은 도덕군자가 된다. 자유로운 행동을 공경하는 나머지 자유로운 행동을 증오하지 않을 수 없다……. - P. 78

  스스로 꿈꾸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한 군데 뿌리박힌 돌멩이는 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럴 바엔 차라리 직업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선생이란 직업이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선생이 모래의 남자가 되어 원초적인 삶을 살게 되었을 때, 말과 행동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구경하는 즐거움은 다분히 가학적이다.


0912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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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09-12-02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는 그의 작품이 너무 궁굼해졌었는데요. 유감스럽게도 읽을 수 있는 책이 많지는 않더군요.<타인의 얼굴>도 아주 재미있었어요.

sceptic 2009-12-08 20:07   좋아요 0 | URL
권해주신 책도 읽어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그리스 귀신 죽이기
박홍규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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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는 인간들의 꿈과 환상이 빚어낸 배설물이다. 자연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미래가 불안했던 시절에 사람들은 믿고 싶은 이야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고통스런 현실을 견뎌내거나 종교적 믿음을 위한 상징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모든 부족 혹은 민족에게 신화는 자부심과 긍지를 만들어 주었고 후손들에게 경외감과 존경심을 갖게 해주었다. 실제 가능성을 생각해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신화의 세계는 여전히 환상적인 모험의 세계이며 먼 과거에 대한 꿈의 세계라고 믿는다.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 로마 신화』를 처음 읽었던 건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삽화 한 장 없이 빽빽한 글씨로 채워진 책장을 넘기며 처음 듣는 신들의 긴 이름과 거의 콩가루 집안인 족보를 머릿속에 그려가며 읽자니 장난이 아니었다.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이 있다면 이 책은 후자에 해당된다고 믿었다. 어렴풋한 흐름만 이해하고 몇몇 장면만 기억에 남는다. 이후 단편적인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다시 만난 것은 그림을 통해서이다. 중세, 르네상스, 고전주의에 이르는 유럽의 예술은 신화의 시대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물론 시대를 뛰어넘는 파격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신화와 종교는 서양 예술의 근간을 이루었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알지 못하고 유럽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새롭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관심을 가져오게 했으며 대중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만화 그리스 로마 신화』에 열광하는 초등학생이 부럽기도 했다. 불황을 모르는 학습만화 시장은 쉽고 재미있게 접근하고 읽을 거리가 많지 않았던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했다.

  상식과 교양의 이름으로 맹목적으로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를 알아야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은 없다. 그림에 담겨있는 수많은 알레고리가 마치 수수께끼처럼 풀릴 때의 신기함 정도로 시작된 관심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것들이 필요에 의해 읽혀졌다. 하지만 한 번도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태도로 왜 ‘그리스, 로마 신화’여야만 하는가에 대한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박홍규의 『그리스 귀신 죽이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뒤집고 비틀어보기를 시도한다.

이제 우리 민주주의에 필요한 사람은 그런 영웅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아니라 착하고 성실할 줄 아는 진정한 보통사람들, 즉 신화 밖의 평범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그리스 신화를 읽지 않아도 좋지만 꼭 그것을 읽는 경우에는 비판적으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 P. 72

  개인적으로 박홍규의 저작들을 통해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오리엔탈리즘』, 『학교없는 사회』,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와 같은 번역서는 물론이고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 『예술, 정치를 만나다』, 『아나키즘 이야기』,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등 그의 인문학적 저작들은 새로운 시각과 비판적 관점, 깊이와 넓이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책들이었다. 이번 책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반성 없이 ‘교양과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접근하는 신들의 행태에 대해 저자는 일침을 가한다.

  그리스 신화는 끊임없이 반인륜적 폭력의 권력투쟁 과정을 보여준다. 적대, 경쟁, 전쟁, 정복, 침략, 복수, 음모, 계략, 살인, 절도, 사기, 약취, 유괴, 강간, 간통, 차별 등 온갖 범죄와 부도덕의 결정판으로 볼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접근하게 해서는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는 충격적인 내용이 많다는 데에는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지적대로 그리스의 귀신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저자는 삼층 차별구조로 그리스 신화 전체를 다시 들여다본다. 신과 영웅에 대비되는 괴물과 인간, 지배자와 남성의 반대편에 서 있는 피지배자와 여성, 서양의 주변에 머물러 있는 비서양이 그것이다. 이렇게 뚜렷한 차별적 구조를 가진 신화는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으로 볼 수는 없다. 신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성성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 신화가 가지고 있는 다른 신화와의 차별점에 대한 이야기다. 부분적으로 각 민족의 신화는 현재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신화를 비판적이고 냉정한 시선으로 분석하고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생각보다 심각할 수 있다.

지배민족=그리스=서양=중심=문명=미와 선=정상
…신과 영웅=왕과 귀족 및 장군=주인=미와 선=정상
…남신-남자영웅-남자인간=정신 지성 문명=공적 정치세계=국가

피지배민족=비非 그리스 =비非 서양=주변=야만=추와 악=비정상
…괴물과 인간=노예 및 외국인=주변=추와 악=비정상
…여신-여성인간=육체 감성 자연=사적 가정세계=사회

이러한 도식화는 세계사를 서양사 중심으로 설정하고, 비서양사를 서양의 비서양 지배사로 날조하게 한다. 그래서 그 이름이 세계사이지만 아직까지도 비서양은 서양과 관련되는 경우에만 그 객체나 타자로 등장하고, 세계사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서양일 뿐이지 비서양이 아니다. - P. 274


  저자의 관점에 대한 다양한 논란과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 자체에 대한 비판과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밖에 없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을 전제하지 않은 맹목적 수용은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로 들린다.

  낯설게 바라보고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하는 인식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 읽어볼 만한 책이다.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느냐의 문제로 언제나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조차 가지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09112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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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30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03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03 0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03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녕, 엘레나 - 2010년 제41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김인숙 지음 / 창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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痛入骨髓.

  고통이 뼈에 스민다는 한 마디가 진한 여운으로 남는다. 김인숙의 소설집 『안녕, 엘레나』에 수록된 단편 ‘조동옥, 파비안느’를 읽다가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과 유사한 기분을 느꼈다. 이 단편은 엉뚱하게도 고려시대 수령옹주가 공녀로 바쳐지면서 어머니가 감당해야 했던 고통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사랑과 고통은 투명한 기름종이처럼 서로 스미고 겹친다. 한 몸으로 뒤엉켜 지독한 사랑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낳는다.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 이별을 걱정하듯이.

  브라질로 이민 간 어머니 조동옥 아니 파비안느는 주인공의 딸을 데려가 키우다 멀리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다. 동생이면서 딸인 아이는 포르투갈어로 주인공에게 긴 편지를 보낸다. 16년의 세월을 그 편지와 함께 묻는 것이 통입골수.

  모든 사랑의 밑바탕에는 두근거림과 떨림보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 이상의 충만감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벅찬 감동을 전해주는 파도소리이다. 한없이 밀려왔다가 사라지고 아쉬움을 남기고 사라지지만 어느새 또 다시 발을 적시는 바닷물과 같다.

  아마 모든 소설은 젖은 발로 모래사장을 걸으며 발가락 사이로 비집고 올라오는 모래 알갱이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털어버리기엔 그 불편한 감각들이 살아있는 듯하고 그냥 걷기에는 발다닥이 따끔거린다. 현실에서 부딪칠 것 같은 이야기들이 소설이 되기도 하고 소설같은 현실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비현실적인 일들을 통해 상상력이 고갈되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는 수많은 엘레나가 있다. 수많은 철수와 영희가 있는 것처럼. 표제작이 된 ‘안녕, 엘레나’는 원양어선을 탄 이름모를 아버지의 엘레나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세상의 모든 엘레나를 사진으로 보내오는 친구를 통해 존재의 근원을 묻고 있는 이야기다. 김인숙의 소설은 시간 앞에 초라해지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엇갈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의 불가해함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지 모른다.

  가족으로 만난 인간 관계는 천형이다. ‘숨-악몽’, ‘어느 찬란한 오후’, ‘조동옥, 파비안느’는 모두 가족 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로테스크한 괴기 영화처럼 음습하고 환한 대낮에 피를 흘리는 장면이 슬로모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때때로 우리의 인생은 난잡하기만 하다. 가족으로 묶여 덩어리로 살아야 하는 피곤함과 끊을 수 없는 사슬에 질질 끌려다녀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존재 이유를 느끼게 해 줄 수도 있는 게 가족이지만 평생 악몽같은 관계일 수도 있는게 가족이기도 하다.

  단편 ‘그날’은 역사적 인물 이완용을 세상 밖으로 불러낸다. 그가 당연히 가지고 있었을 인간적 고뇌와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를 역사적 관점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 풍경을 통해 확인시켜 준다. 단순히 그에게 면죄부를 주거나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자는 신선한 발상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 속에서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지 궁금해졌다. 말하고 싶으나 말 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 입을 달아주는 것이 소설가의 의무라면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와 이야기 속에서 헤매야 할 것이다.

  ‘현기증’과 ‘산너머 남촌에는’도 크게 가족과 무관하지는 않다. 기러기 아빠로 사는 비행기 조종사의 현기증과 열두 남매를 낳아 길러야했던 어머니의 시선은 대체로 냉정하고 차가운 금속성의 말들을 쏟아낸다. 애틋하고 다감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서걱이며 불협화음을 내는 관계 속에서 오히려 우리는 편안함과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책의 말미에 붙어있는 해설에서,

김인숙이 그려낸 인물들은 모두 혀가 있으나 입술이 없는 존재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말하지 않는 존재로 그려진다. - P. 207, 정여울의 해설 ‘입술이 없는 존재의 상처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중에서

 라고 말하는 정여울의 표현은 표현은 정확해 보인다.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말하지 않는 존재’가 김인숙의 소설에만 등장할까?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 내가, 그런 존재가 아닐까?


09112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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