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엘레나 - 2010년 제41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김인숙 지음 / 창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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痛入骨髓.

  고통이 뼈에 스민다는 한 마디가 진한 여운으로 남는다. 김인숙의 소설집 『안녕, 엘레나』에 수록된 단편 ‘조동옥, 파비안느’를 읽다가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과 유사한 기분을 느꼈다. 이 단편은 엉뚱하게도 고려시대 수령옹주가 공녀로 바쳐지면서 어머니가 감당해야 했던 고통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사랑과 고통은 투명한 기름종이처럼 서로 스미고 겹친다. 한 몸으로 뒤엉켜 지독한 사랑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낳는다.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 이별을 걱정하듯이.

  브라질로 이민 간 어머니 조동옥 아니 파비안느는 주인공의 딸을 데려가 키우다 멀리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다. 동생이면서 딸인 아이는 포르투갈어로 주인공에게 긴 편지를 보낸다. 16년의 세월을 그 편지와 함께 묻는 것이 통입골수.

  모든 사랑의 밑바탕에는 두근거림과 떨림보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 이상의 충만감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벅찬 감동을 전해주는 파도소리이다. 한없이 밀려왔다가 사라지고 아쉬움을 남기고 사라지지만 어느새 또 다시 발을 적시는 바닷물과 같다.

  아마 모든 소설은 젖은 발로 모래사장을 걸으며 발가락 사이로 비집고 올라오는 모래 알갱이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털어버리기엔 그 불편한 감각들이 살아있는 듯하고 그냥 걷기에는 발다닥이 따끔거린다. 현실에서 부딪칠 것 같은 이야기들이 소설이 되기도 하고 소설같은 현실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비현실적인 일들을 통해 상상력이 고갈되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는 수많은 엘레나가 있다. 수많은 철수와 영희가 있는 것처럼. 표제작이 된 ‘안녕, 엘레나’는 원양어선을 탄 이름모를 아버지의 엘레나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세상의 모든 엘레나를 사진으로 보내오는 친구를 통해 존재의 근원을 묻고 있는 이야기다. 김인숙의 소설은 시간 앞에 초라해지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엇갈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의 불가해함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지 모른다.

  가족으로 만난 인간 관계는 천형이다. ‘숨-악몽’, ‘어느 찬란한 오후’, ‘조동옥, 파비안느’는 모두 가족 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로테스크한 괴기 영화처럼 음습하고 환한 대낮에 피를 흘리는 장면이 슬로모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때때로 우리의 인생은 난잡하기만 하다. 가족으로 묶여 덩어리로 살아야 하는 피곤함과 끊을 수 없는 사슬에 질질 끌려다녀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존재 이유를 느끼게 해 줄 수도 있는 게 가족이지만 평생 악몽같은 관계일 수도 있는게 가족이기도 하다.

  단편 ‘그날’은 역사적 인물 이완용을 세상 밖으로 불러낸다. 그가 당연히 가지고 있었을 인간적 고뇌와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를 역사적 관점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 풍경을 통해 확인시켜 준다. 단순히 그에게 면죄부를 주거나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자는 신선한 발상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 속에서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지 궁금해졌다. 말하고 싶으나 말 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 입을 달아주는 것이 소설가의 의무라면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와 이야기 속에서 헤매야 할 것이다.

  ‘현기증’과 ‘산너머 남촌에는’도 크게 가족과 무관하지는 않다. 기러기 아빠로 사는 비행기 조종사의 현기증과 열두 남매를 낳아 길러야했던 어머니의 시선은 대체로 냉정하고 차가운 금속성의 말들을 쏟아낸다. 애틋하고 다감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서걱이며 불협화음을 내는 관계 속에서 오히려 우리는 편안함과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책의 말미에 붙어있는 해설에서,

김인숙이 그려낸 인물들은 모두 혀가 있으나 입술이 없는 존재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말하지 않는 존재로 그려진다. - P. 207, 정여울의 해설 ‘입술이 없는 존재의 상처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중에서

 라고 말하는 정여울의 표현은 표현은 정확해 보인다.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말하지 않는 존재’가 김인숙의 소설에만 등장할까?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 내가, 그런 존재가 아닐까?


09112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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