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와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내 책읽기의 등대였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과정과 방법을 배운 책이었다. 깊이와 넓이를 아우르는, 진지한 사유와 성찰이 밑바탕이 되는 책읽기의 세계는 내가 만난 어떤 세상보다도 매혹적이었으며 아름다웠다.

  세상에는 책읽기의 고수가 많다. 하지만, 양과 질적인 측면에서 골고루 책읽기에 성공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인다. 책읽기에서 ‘성공’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고, 그 목적과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단순히 한 분야의 책 읽기 고수는 책읽기 고수라 하지 않고 그냥 해당 분야의 학자나 연구자 혹은 전문가라고 한다. 정확한 개념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정의한다.

  기본적으로 인문학에 바탕과 뿌리를 두지 않은 책읽기는 사상누각과 같다. 모든 문제는 결국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인간의 삶과 사상의 흐름, 사회의 변화 과정을 인식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면 무릇 책읽기는 그저 고급한 취미와 젠체하기 좋은 겉멋에 불과하다. 그래서 특히 젊은 시절의 책읽기는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형성하며 나와 타인의 관계를 조망하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책읽기 고수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성인이 되기 전 이미 책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유영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책과 무관한 분야는 없다. 안철수와 박경철 같은 유명인을 비롯하여 체 게바라와 같은 혁명가에 이르기까지 활동 분야를 전문분야와 활동 분야를 막론하고 책은 모든 영감의 원천이며 행동의 출발이고 사상의 은사라고 할 수 있다.

  나이 오십쯤 되어 내 인생의 책을 정리하고 싶은 욕망이 나에게도 생길지 모르겠지만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를 읽는 내내 말할 수 없는 공감과 감동의 물결이 밀려왔다. 지식소매상을 자처하는 사람답다. 겨우 열네 권을 추렸지만 그의 책읽기와 글쓰기 내공은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하고 정교한 그물처럼 짜여있다. 한 사람의 내밀한 영혼의 지도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뼛속까지 드러내는 일이다. 작가의 구석구석을 탐욕스럽게 샅샅이 훑어내는 나의 시선이 오히려 섬뜩하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까지 다시 읽어내면서 유시민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의 ‘청춘’이 궁금한 게 아니라 지나온 시간과 흘러간 세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인간이 지켜야할 진정한 가치와 고전의 눈부신 문장들을 함께 읽어보고 싶었다. 수많은 책에 관한 책 중에서도 『청춘의 독서』가 빛을 발하는 이유는 바로 냉정하고 합리적인 이성과 날카로운 비판정신 그리고 따뜻한 감성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이제 갓 세상에 나가 길을 찾는 딸에게’ 바쳐진 이 책은 험한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딸에게 들려주는 아버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면바지 차림으로 국회에 서서 양복쟁이 국회의원들에게 신고식을 당하던 유시민의 어색한 표정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를 조금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그가 이제 오십이 넘었고 그의 딸은 스무살이 되었다. 그렇게 옳은 말을 말을 그렇게 싸가지 없게 할 수 있는 그의 소신에 박수를 보냈지만 정치적 행보와 색깔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유시민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가 교차한다. 하지만 스물 여섯에 감옥에서 쓴 ‘항소이유서’를 읽으면서 그의 글을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영희 선생은 말한다. 진실,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 지식인은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산다. 선생의 글을 다시 읽으니 선생이 내게 묻는다.
너는 지식인이냐. 너는 무엇으로 사느냐. 너는 권력과 자본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떳떳한 사람이었느냐. - P. 48


지적 활동 중단 선언을 하신 리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다시 읽고 스스로 던진 질문이 아프게 와 닿는다. 평범한 생활인인 내가 가져야하는 부담과 고민만큼만 다른 사람도 가질 수 없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오래된 청춘의 지도를 들여다보는 작가 옆에서 그 지도를 함께 들여다보는 즐거움으로 며칠을 보냈다. 고마울 따름이다.

  읽었던 책은 다시 읽고 미처 읽지 못했던 몇 권의 책은 당장 읽고 싶어졌다. 책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들을 얼마나 귀 기울여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나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직장을 다녀도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과 삶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삶이 되기를 희망한다. 시간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보수주의는 사회의 부유하고 명망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기 때문에 영예로운 장식적 가치를 얻는다. 이것이 더 심화되면 우리의 관념 속에서는 보수적 견해를 고수하는 것은 당연히 존경받아야 할 대상으로 평가된다. (……) 보수주의는 상층계급의 특징이기 때문에 품위가 있는 반면, 혁신은 하층계급의 현상이기 때문에 저속(vulgar)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사회적 혁신을 외면하게 만드는 그 본능적 반발과 비난의 가장 단순한 요소는 사물의 본질적 비속성(vulgarity)에 대한 관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혁신자(innovator)가 대변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그가 치유하려는 악이 시간적 ․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거나 개인적으로 접촉할 가능성이 없을 때 이런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 혁신자는 교제하기에는 불쾌한 인물이며 무릇 그와 접촉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혁신은 나쁜 것(bad form)이다. - P. 244(『유한계급론』, 179쪽)

  읽지 않은 책 중에 가장 읽어 싶어진 책 중의 하나다. 보수와 진보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를 이렇게 적확하게 짚어낼 수 있을까 싶다. ‘혁신자는 교제하기에는 불쾌한 인물이며 무릇 그와 접촉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뼈아픈 지적이지만 ‘혁신은 나쁜 것’이라는 말은 지루한 세상에 던지는 불타는 구두같은 말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풍자가 지나치면 눈물을 자아낸다.

  혁명 전사도 투사도 아닌 내가 이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가슴 밑바닥부터 아려왔다. 지치고 힘들 때, 포기하고 싶을 때, 나약해지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두고두고 생각해 볼 책이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시대를 견딜 힘조차 내겐 없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가끔 두렵고 외로운 밤이 찾아온다.

“역사와 사회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어떤 자동적인 또는 불가피한 진행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계속적 발전에 대한 믿음”(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중에서)이라고. 이 믿음만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그의 격려를 받아들여야 할까? - P. 312


09120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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