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귀신 죽이기
박홍규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신화는 인간들의 꿈과 환상이 빚어낸 배설물이다. 자연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미래가 불안했던 시절에 사람들은 믿고 싶은 이야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고통스런 현실을 견뎌내거나 종교적 믿음을 위한 상징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모든 부족 혹은 민족에게 신화는 자부심과 긍지를 만들어 주었고 후손들에게 경외감과 존경심을 갖게 해주었다. 실제 가능성을 생각해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신화의 세계는 여전히 환상적인 모험의 세계이며 먼 과거에 대한 꿈의 세계라고 믿는다.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 로마 신화』를 처음 읽었던 건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삽화 한 장 없이 빽빽한 글씨로 채워진 책장을 넘기며 처음 듣는 신들의 긴 이름과 거의 콩가루 집안인 족보를 머릿속에 그려가며 읽자니 장난이 아니었다.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이 있다면 이 책은 후자에 해당된다고 믿었다. 어렴풋한 흐름만 이해하고 몇몇 장면만 기억에 남는다. 이후 단편적인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다시 만난 것은 그림을 통해서이다. 중세, 르네상스, 고전주의에 이르는 유럽의 예술은 신화의 시대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물론 시대를 뛰어넘는 파격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신화와 종교는 서양 예술의 근간을 이루었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알지 못하고 유럽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새롭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관심을 가져오게 했으며 대중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만화 그리스 로마 신화』에 열광하는 초등학생이 부럽기도 했다. 불황을 모르는 학습만화 시장은 쉽고 재미있게 접근하고 읽을 거리가 많지 않았던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했다.

  상식과 교양의 이름으로 맹목적으로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를 알아야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은 없다. 그림에 담겨있는 수많은 알레고리가 마치 수수께끼처럼 풀릴 때의 신기함 정도로 시작된 관심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것들이 필요에 의해 읽혀졌다. 하지만 한 번도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태도로 왜 ‘그리스, 로마 신화’여야만 하는가에 대한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박홍규의 『그리스 귀신 죽이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뒤집고 비틀어보기를 시도한다.

이제 우리 민주주의에 필요한 사람은 그런 영웅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아니라 착하고 성실할 줄 아는 진정한 보통사람들, 즉 신화 밖의 평범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그리스 신화를 읽지 않아도 좋지만 꼭 그것을 읽는 경우에는 비판적으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 P. 72

  개인적으로 박홍규의 저작들을 통해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오리엔탈리즘』, 『학교없는 사회』,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와 같은 번역서는 물론이고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 『예술, 정치를 만나다』, 『아나키즘 이야기』,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등 그의 인문학적 저작들은 새로운 시각과 비판적 관점, 깊이와 넓이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책들이었다. 이번 책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반성 없이 ‘교양과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접근하는 신들의 행태에 대해 저자는 일침을 가한다.

  그리스 신화는 끊임없이 반인륜적 폭력의 권력투쟁 과정을 보여준다. 적대, 경쟁, 전쟁, 정복, 침략, 복수, 음모, 계략, 살인, 절도, 사기, 약취, 유괴, 강간, 간통, 차별 등 온갖 범죄와 부도덕의 결정판으로 볼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접근하게 해서는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는 충격적인 내용이 많다는 데에는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지적대로 그리스의 귀신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저자는 삼층 차별구조로 그리스 신화 전체를 다시 들여다본다. 신과 영웅에 대비되는 괴물과 인간, 지배자와 남성의 반대편에 서 있는 피지배자와 여성, 서양의 주변에 머물러 있는 비서양이 그것이다. 이렇게 뚜렷한 차별적 구조를 가진 신화는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으로 볼 수는 없다. 신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성성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 신화가 가지고 있는 다른 신화와의 차별점에 대한 이야기다. 부분적으로 각 민족의 신화는 현재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신화를 비판적이고 냉정한 시선으로 분석하고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생각보다 심각할 수 있다.

지배민족=그리스=서양=중심=문명=미와 선=정상
…신과 영웅=왕과 귀족 및 장군=주인=미와 선=정상
…남신-남자영웅-남자인간=정신 지성 문명=공적 정치세계=국가

피지배민족=비非 그리스 =비非 서양=주변=야만=추와 악=비정상
…괴물과 인간=노예 및 외국인=주변=추와 악=비정상
…여신-여성인간=육체 감성 자연=사적 가정세계=사회

이러한 도식화는 세계사를 서양사 중심으로 설정하고, 비서양사를 서양의 비서양 지배사로 날조하게 한다. 그래서 그 이름이 세계사이지만 아직까지도 비서양은 서양과 관련되는 경우에만 그 객체나 타자로 등장하고, 세계사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서양일 뿐이지 비서양이 아니다. - P. 274


  저자의 관점에 대한 다양한 논란과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 자체에 대한 비판과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밖에 없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을 전제하지 않은 맹목적 수용은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로 들린다.

  낯설게 바라보고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하는 인식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 읽어볼 만한 책이다.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느냐의 문제로 언제나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조차 가지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09112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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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30 16: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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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3 2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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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3 02: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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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3 21: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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