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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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 오래두고 사귄 벗. 영화 <친구>에서 준석과 동수처럼 적이 될 수도 있는 사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친구는 추억의 섬에서 언제든 불러낼 수 있는 기억의 창고 같은 존재다.  이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림자처럼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관계가 친구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보다 시간을 견디고 오래 곁에 있는 벗에게 말할 수 없는 신뢰를 갖는다. 허물없는 친구 두엇만 있으면 그렇게 사람이 그립지 않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깊이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관계가 바로 친구다.

  그러나 가끔은 친구와 싸우기도 하고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친구는 더욱 그렇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도 달라지고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적어지면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자주 만날 수 있고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친구라야 오래오래 우정을 만들어갈 수 있다. 혹자는 동성에 대한 사랑이 우정이라고 말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우정은 사랑보다 넓고도 깊은 감정이다. 하지만 사소한 감정의 대립, 시기와 질투로 친구 관계도 깨질 수 있다. 그래서 그 모든 상처들을 견뎌내고 오래 사귄 벗을 친구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2008년 청소년 소설 분야에서 돌풍을 몰고 온 『완득이』의 작가 김려령. 새 소설 『우아한 거짓말』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았다. 가볍고 즐거운 시트콤 같은 『완득이』의 성공 요인은 경쾌함이었다. 이상적인 담임 ‘동주’의 인간적인 면과 복합적 사회 문제의 결정체 ‘완득이’의 만남은 웃음과 감동의 비빔밥이었다.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 갖추어야 하는 요소를 적절하게 갖춘 소설이라는 말이다. 그에 비해 『우아한 거짓말』은 조금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왕따 문제를 다룬 소설들은 아주 많다. 이 소설도 왕따라는 소재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먼저 한 부모 가정의 자매 중 동생이 자살하고 그 자살의 원일을 찾아가는 과정은 새로울 것이 없는 방법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을 찾는 것이 소설의 미덕은 아니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사례 중심의 소설은 감동도 크지 않고 사회적 의제도 던지지 못한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지만 대체로 화목한 가족이기 때문에 언니의 무관심이 자살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결국 자살의 가장 큰 원인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 오면서 친해진 화연이다. 집단적이고 직접적인 따돌림이 아니라 화연의 은근한 놀림과 주변 아이들의 동조와 방관. 어느 또래 집단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쉽게 넘어갈 수는 없지만 성적도 우수하고 자기 생각도 분명하지만 ‘착한’ 아이가 자살할 정도로 심각했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하고 작은 일로도 사람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인 천지는 언니 만지와의 관계나 화연, 미라와의 관계만으로 우울증에 시달렸고 자살을 하게 되었다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넓은 의미에서 이 소설은 성장 소설보다 심리소설로 볼 수도 있다. 전학 후에 절친한 친구에게 당한 모멸감의 누적과 심리적 고통, 우울증으로 인한 불안 등이 자살의 원인이었다면 학교 폭력이나 왕따 문제를 다룬 청소년 소설이 아니라 청소년기의 심리적 갈등과 그 원인을 탐구하는 소설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느 쪽이든 작가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어 독자들은 마음이 불편하다. 주인공 천지의 심리가 직접 서술되고 엄마와 언지 만지, 옆집 아저씨 오대오(별명), 화연과 그의 부모, 미라와 미란 자매 그리고 아버지 곽만호와의 관계가 그물처럼 얽혀있다. 인물들 사이의 관계는 철저하게 천지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모든 것이 천지의 자살 원인을 밝히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소설 첫머리에서 죽음을 던져 놓은 작가의 모험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수렴적인 방식으로 모든 인물들의 심리와 사건들이 하나로 모아지기 때문이다.

  외면하고 싶은 진실 앞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누가 죽었는지 어떻게, 왜 죽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천지의 언니 만지는 화연에게 화해와 용서의 손길을 내민다. 천지의 죽음을 통해 진실이 무엇인지 가려내는 것보다 어쩌면 살아남은 사람들의 상처와 앞으로의 삶에 무게를 둔 것 같기도 하다. 그 의도야 무엇이든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그 관계에서 생긴 고통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을 보듬고 시간에 맡겨 모른 척 가슴에 묻어두기도 하는 것이 생의 진실은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그저 우리 아이들의 미래의 희망이라는 판에 박힌 찬사만 늘어 놓는다. 왜 그들이 우리의 미래인지 그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는 것 같지는 않다. 내 아이의 미래만 중요한 부모와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은 오늘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반성해 보자. 한 아이의 자살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은 작가는 결국 ‘우아한 거짓말’이 아니라 소박한 진실을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 불편한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은 바로 우리 아이들의 현재와 우리 교육의 미래를 성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읽혔다. 가족의 울타리 너머 조금만 더 넓게 그리고 멀리 내다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 아이를 바라보던 눈을 들어 주변의 아이들을 돌아보자. 그러면 내 아이의 진실이 보일지도 모른다.


09122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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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지한다 - 불통의 시대, 소통의 길을 찾다
정관용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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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컵에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와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네’. 어렸을 때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누군가에게 들었던 문장이다. 이 문장은 여전히 사용된다. 두 문장은 동일한 현상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반 ‘밖에’와 반 ‘이나’는 주관적 판단이다. 객관적으로 반이 남아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이 전개된다.

  ‘밖에’는 불안하고 초조하다. 부정적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비판적인 관점에서 미래를 준비해야 하며 물이 없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물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고민도 하고, 물이 줄어들지 않도록 절약하고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해 생각도 해야 한다.

  ‘이나’는 여유있고 행복하다.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라고 배웠다. 하지만 다양하고 폭넓은 사고가 부족하고 단순하고 좁은 시야를 갖기 쉽다. 대책없이 낙천적인 태도가 가져올 위험은 부정적 사고보다 훨씬 심각하다. 치밀하고 정교한 계획없이 남은 물을 과신하다보면 정작 필요한 순간에 물을 사용하지 못하고 낭패를 당할 수가 있기 때문에 보다 신중하고 거시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밖에’와 ‘이나’가 만나 토론을 나눈다고 가정해 보면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흔히 TV를 통해서 지켜보는 토론 프로그램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담고 있는 정관용의 『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지한다』는 우리 사회의 대화와 토론 문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로 일해온 저자는 참 할말이 많은 듯하다. 손석희라는 스타급 진행자에 가려 그 인지도나 인기 면에서 조금 떨어지지만 그의 중립적인 진행자의 자세와 진행 솜씨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 책에는 손석희의 추천사가 붙어있다. ‘자아갈등을 넘어 소통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곧 나올지 모를 손석희의 토론 책도 기대한다.

  실제 가정이나 직장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전제, 내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가정은 얼마나 어려운가. 열린 마음이란 바로 이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사회에서 2차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최소한 ‘똘레랑스’는 필요하다.

  똘레랑스는 대립하는 주장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주장을 위해 서로 격렬하게 논쟁한 후 도저히 상대의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지면 별수 없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논쟁으로 풀리지 않는 상대방의 확고한 의견이나 생각을 굳이 바꾸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똘레랑스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관용이다. - 하승우,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39페이지
 
  ‘토론’이란 하나의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주장을 펼치면서 합의를 이루거나 공통의 이해 기반을 넓혀 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하주 간단한 정의지만 토론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러나 ‘합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공통의 이해 기반을 넓혀가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절감하고 있다. 특히 정치인들의 토론은 지켜보는 사람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칠 우려가 있다.

  귀를 막고 자신이 준비해 온 이야기만 하는 토론자, 상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실수를 찾는데 혈안이 돼있는 시청자 그 누구도 ‘합의’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매체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시청률과 형평성에 목을 맨 토론 프로그램을 잊어야 진정한 토론이 시작된다. 그래서 저자는 방송토론을 잊으라고 주문한다. 왜 대한민국은 불통 공화국이 되었는지 짚어보고 적대적 공존관계에 빠진 한국 정치와 언론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소통하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관용이 제시하는 대안들이 바로 이 책의 핵심이 될 것 같다. ‘회색지대’에서 미래를 찾자는 사례 한 가지라도 고민하며 들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여러 가지 방법론은 우리의 척박한 토론 문화에서 필요한 도구들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소통의 구조 안에서 그리고 인간관계의 틀 속에서 고민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조금 더 넓고 깊게 들여다보려는 인식의 힘보다 조금 더 많이 낮게 가슴을 열어야 한다. 공정한 말과 열린 가슴이 아니라면 토론은 시작부터 불가능하다. 소통의 벽을 넘는 곳에서 사회의 발전은 시작된다고 믿는다. 볼테르의 말처럼 제발 이제는 최소한 ‘말할 권리’ 만이라도 갖고 살고 싶다. 어쩌면 소통과 토론은 그 다음의 문제다. 1차적인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주변을 돌아보자. 아니, 그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또한 얼마나 많은가.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 볼테르(1694~1778)


0912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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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성장의 유혹 - 글로벌 식품의약기업의 두 얼굴
스탠 콕스 지음, 추선영 옮김 / 난장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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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자동차 타지 않기를 실천해 옮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년에 세운 유일한 계획 중 하나는 자전거 많이 이용하기다. 직장이 자전거로 출퇴근하기 적당한 거리에 있는데도 자동차를 포기하지 못하는 건 순전히 게으름 탓이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이반 일리히의 말을 실천하려는 게 2010년의 계획이다. ‘책읽기는 실천이다, 지식은 실천이다’라고 외치면서도 지키지 못한 것들을 이제는 행동에 옮겨야 한다.

  스탠 콕스의 <녹색성장의 유혹>을 읽으면서 인간답게 살 권리에 대해 생각했다. 둘 이상이 모여 사는 모든 사회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권력 관계와 기득권에 관한 단상을 적어볼까 하다가 살아 있는 동안 건강하게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엉뚱한 생각의 흐름이지만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선택’ 문제라고 생각했다. 자연의 위대함에 비춰보면 정말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오만함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만일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높아진 에너지 효율성은 경제 확장에 기여해서 결국 더 많은 에너지 소비나 더 많은 탄소 배출로 이어진다는 제본스 패러독스Jevons Paradox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사례로 기록될 것입니다. 사실상 이러한 시도는 구시대적이고 무모한 산업 확장을 녹색 페인트와 첨단 기술로 포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한국의 독자들에게

  과연 이것은 이념의 문제일까? ‘저탄소, 녹색성장’을 주창한 이명박 대통령의 녹색 거품에 대한 저자의 경고는 단호하다. 바이오 연료, 태양전지, 원자력 에너지, ‘친환경’ 자동차, LED 전구를 아우르는 정부 주도의 계획들은 과연 제본스 패러독스를 극복할 수 있을까? ‘녹색성장’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녹색과 성장은 합쳐질 수 없는 바탕을 갖고 있다. 다만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항변할 수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한 채 눈감고 머리만 낙엽에 처박은 꿩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환경과 생태 문제는 이념과 무관한 듯 무관하지 않다.

  성장과 개발론자들이 ‘녹색’으로 포장하는 위장 전술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4대강 사업의 본질, 세종시 논란의 핵심은 자연이냐 인간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자. 이기적 욕망을 부정할 순 없지만 지역 이기주의와 국가 대계 그리고 환경과 개발 사이의 위험한 줄타기는 오늘도 계속된다. 결국 적당한 타협과 포기로 귀결될 것이 뻔하다.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위로와 자책도 쏟아질 것이다. 조금 더 멀리 내다보자. 환경 자체가 이념이 되어야 한다. 제본스 패러독스를 기억하자.

  ‘글로벌 식품의약기업의 두 얼굴’이라는 부제는 낯설지 않다. 전 지구적 양아치적 행태에 대해 모르는 바 아니고 오로지 자본과 성장의 논리로 저개발국에 가하는 폭력(?) 수준의 기업 행태를 하루, 이틀 접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다만 이런 현실이 어떻게 지속 가능하며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고민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만이라고 널리 알리고 싶어졌다.

  공정무역이나 공정거래 커피, 공정 여행에 관한 인식이 점차 싹트고 있는 현실에서 병원산업이나 제약회사의 탐욕과 두 얼굴에 대해 직시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의사들의 기득권과 제약회의의 약 팔기 권법 그리고 끊임없이 환자를 생산하고 불안 마케팅을 통해 병원과 약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 현대인들의 관계는 암울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질병 부풀리기와 환자와 의사를 상대로 한 영업 전략을 통해 글로벌 식품의약기업의 생태를 고발한다.

  전체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주제는 하나로 모아진다.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결국 건강한 우리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스스로 반성할 필요가 있다. 하루의 생활을 돌아보자. ‘환경’을 보존하고 지키려는 노력까지는 아니어도 더 많이 파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론 이 문제가 개인의 도덕에 의존할 문제는 아니다.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선진국이 나서지 않는다면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미국과 중국은 전세게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40%를 내뿜고 있다. 건강한 지구인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문제로 귀결된 것이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다가 이유진(녹색연합 기후에너지 국장)의 칼럼 ‘지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일주일’이 목에 걸렸다.

  사회적 의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쁜 생활인의 입장에서 보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곧 내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내 삶을 좌우할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자각해야만 한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완고한 현실의 벽이 조금씩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인식하는 순간 이미 변화는 시작된다고 믿는다. 그것을 외면하고 개인적 이익을 계산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조금 만 더 생각해보면 그것이 결국 커다란 손해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녹색은 성장과 한 이불을 덮을 수 없다. 아무리 유혹해도 녹색은 성장을 사랑할 수 없는 슬픈 운명이다.


09121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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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교실 혁명 핀란드 교육 시리즈 1
후쿠타 세이지 지음, 박재원.윤지은 옮김 / 비아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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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선택의 십계

-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얼마 전 이웃 블로거를 만나 즐겁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통과 교감은 오래 된 친구를 찾은 것처럼 유쾌한 일이었다. 그가 다닌 학교의 ‘직업선택의 십계’의 내용은 널리 알려져 있어 새삼스럽지 않지만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종교적 신념이나 특별한 삶을 선택한 사람이 아니면 이런 직업선택의 기준을 참고할 리 없다. 물론, 선언적 의미가 강하겠지만 지나온 내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조금 부끄러웠다. 나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무엇을 배웠으며 어떻게 살았을까 때때로 돌아보지만,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다웠노라고 미화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100년이 넘은 서울의 평범한 사립 고등학교를 졸업한 내가 그가 생각하는 교육과 삶과 세상의 가치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책이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얄팍한 지식 나부랭이를 배우러 가는 곳이 학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완고한 대한민국의 학교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박재원과 윤지은이 번역하고 비상교육 공부연구소장 박재원이 해설을 붙여놓은 후쿠타 세이지의 <핀란드 교실혁명>을 읽었다. 읽는 동안 가슴이 답답했다. 견고한 현실의 벽 때문이었다. 눈물이 날 뻔 했다. 수많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울했다. 나의 미래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외치고 싶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이윤창출과 무한 경쟁의 논리를 벗어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교육제도는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은 인정했으면 좋겠다. 이념의 문제도 정치적 논리도 이기적 욕망도 이 기본적인 상식을 벗어날 수는 없다. 내 자식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태도와 고등학교 성적이 평생을 좌우하는 사회와 직업선택의 첫째 조건이 ‘돈’이어야 하는 미래에서 우리의 꿈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지난달에 수능이 끝나고 지난주에 성적표를 받아든 아이들의 얼굴은 복잡해 보인다. 새학기가 되면 대학 이름과 합격생 수를 적어 현수막을 내건다. 서울대에 합격한 학생들은 특별히 학과와 이름까지 적어 따로 교문 위에 걸어둔다. 정든 교정을 떠나는 아이들,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 그리고 부모들에게 학교는 패배감과 두려움을 선물한다. 이름이 내걸리지 못한 모든 아이들은 좌절감을 맛본 채 스무 살의 봄을 맞이해야 하는 것일까?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에게는 단 하나의 목표만을 강요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현실이다. 무한 경쟁 체제인 대한민국의 교육은 1% 승리자를 위해 모든 시스템이 가동된다. 똑같은 머리, 똑같은 교복, 똑같은 공부, 똑같은 목표, 똑같은 생활, 똑같은 꿈!

시험을 향해 짜여진 교육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인지에 대해 규칙을 정해버리기 때문에 교육의 본래 목적인 능력향상을 제한하는 시스템으로 변질되어버린다. - P. 22

“핀란드의 학교는 잘못하는 아이들을 끌어가긴 하지만 잘하는 아이들은 그냥 둡니다. 왜냐하면 잘하니까요.”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자율적으로 배우도록 키우면 아이들은 교사나 어른을 뛰어넘어 뻗어나간다. - P. 54

우수한 학생들을 따로 모아놓고 가르쳐야만 제대로 수월성 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오히려 득보다 실이 많다는 판단에 주목해야 한다. - P. 55

다른 학생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수월성 교육이 아니라 동반 성장하는 수월성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핀란드 방식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 - P. 55


  진보적 교육 운동가의 해설이었다면 그러려니 하고 책을 집어 던져도 좋다. 하지만 사교육의 첨병에 서 있는 박재원의 문제제기와 후쿠타 세이지의 핀란드 교실 관찰은 우리에게 뼈아픈 반성의 시간을 제공한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면서 현실이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해서는 안된다. OECD회원국의 학력을 알아보기 위한 PISA의 통계를 보면 객관적 자료를 통해 각국의 학력과 핀란드 교육의 우수성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일본 교육의 문제를 지적하고 교훈을 얻기 위해 이 책을 썼겠지만 우리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수월성 교육 문제의 핵심에 놓인 특목고와 외고 사태, 교원평가의 본질과 방법, 대학입시 제도와 대학교육의 문제 그리고 교육을 통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해 대한민국 모든 국민은 교육 전문가다. 저자가 핀란드 교육 현장을 통해 얻은 것과 해설을 쓴 사교육의 첨단에 서 있는 박재원의 단상을 통해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를 다시 한 번 돌아보자.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교육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충분히 꿈을 펼칠 수 있는 능력과 바른 인성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수능 성적표 앞에서 눈물 흘리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할 말이 없어진다. 혁명이 주는 어감이 싫다면 혁신을 사용하라. 교육혁신은 교실혁명으로부터 시작된다. 핀란드의 모든 시스템을 받아들이자는 맹목적인 추종이 아니라 우리 교육의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면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09121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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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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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 류시화의 「구월의 이틀」중에서


  나의 이틀은 언제였을까? 내 인생의 이틀은 지났을까? 아직도 오지 않은 것일까? 사람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듯이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배경을 선택할 수 없다. 따라서 온전하게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인생을 산다고 볼 수 없다. 운명론적 세계관을 가진 건 아니지만 어쩌지 못하는 운명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생은 ‘선택’이 뿐이라는 오만함을 가진 사람은 행복할까? 인간은 운명을 타고 태어나기 때문에 그것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행복할까? 환경과 유전의 관계를 놓고 벌이는 지루한 논쟁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들 인생에 대한 모호함 때문이다. 과연 어디서 어디까지 노력과 선택으로 변화 가능한 것인 인생일까? 또 찰나에 불과한 인생에서 ‘구월의 이틀’은 언제였을까? 언제 찾아올 것인가?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은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책 없는 질문이 떠오르게 한다. 어떤 부모를 만나 어떤 지역에서 자랐는가에 따라 인간의 의식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 의식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고 또한 그 변화를 촉발한 사건이나 사람 혹은 계기를 고민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대한민국처럼 좁은 땅에서도 남과 북으로 갈리고 동과 서로 나뉜다. 지역적으로 특색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에 우열이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우열이 있다.

  이 소설은 두 세계의 분열과 통합 과정을 꼼꼼하게 고찰하고 있다. 정과 반 그리고 합으로 변화해가는 세계의 변증법적 결합 방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주인공 금과 은은 정이며 반이고 합이며 그 합은 또다시 정이 되고 반이 되며 합이 될 것이다. 그들이 성장한 환경과 사회적 배경은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는 역사적,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다. 광주의 시민운동가 출신 청와대 보좌관 아들 금. 부산의 실패한 사업가 아들 은.

  소설은 각자 다른 사정 때문에 광주와 부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는 두 집안을 연결시킨다. 고속도로 휴게소 커피 자판기 앞에서 처음 마주치는 금과 은. 질긴 운명처럼 혹은 계속되는 우연으로 같은 대학에 입학했고 교양 과목 시간에 처음 서로를 인식하게 된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이들의 대학생활은 동아리 선택 문제, 여자 문제, 진로 문제로 고민한다.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비서관이 된 시민 운동가 출신, 금의 아버지는 자살을 선택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어머니 봉양을 대가로 큰 형 집에서 외제차를 굴리며 생활하던 아버지는 가정부와 바람이 났다가 가족을 본 후 쓰러진다. 아버지 세대의 몰락은 지위와 사회적 위치와 무관하게 다음 세대에게 눈을 돌리게 한다. 은의 작은 아버지는 뉴라이트 교수다. 올드 라이트를 소개받은 은은 새로운 대학생 우파 조직에 가담하게 되고 금과 은은 우정을 넘어 사랑을 나눈다. 늙은 올드라이트 퇴직 교수와 몸을 섞는 은의 모습은 동성애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넘어 실제 모델을 떠오르게 한다.

‘삶의 어느 한 때를 가리켜 인생이라고 할 뿐, 일평생이 인생은 아니다.’ - P. 133

  소설의 제목은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을 의미한다. 삶의 어느 한 때를 가리켜 인생이라고 한다면 나의 인생은 언제였을까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상념에 빠진다. 내 존재를 규정할 수 있는 의식을 결정했던 이틀은 언제였을까? 소설의 주인공 금과 은은 도대체 어느 순간, 어느 이틀을 만나게 된 것일까. 소설을 읽어나가다가 그 순간을 만나게 되면 고개를 끄덕여 자신의 삶을 돌아보거나 다가올 순간을 준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연한 만남, 현실의 필연적 관계를 넘어 한 인간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이념적 지향이나 인식의 틀을 형성하는 계기를 보여준다. 지독한 현실에 대한 반어와 풍자로 읽히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한숨과 냉소로 읽히기도 한다. ‘작가후기’에서 장정일은

그런 뜻에서 내가 가장 공들였던 인물인 은에게는 앞으로 많은 기대를 해도 좋다. 어떤 면에서는 야비하기도 하고 이중인격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은에게는 다른 인물에게는 없는 자기개발의 특성과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반성 능력이 있다. - P. 336

라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자기개발의 특성과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반성 능력을 나는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건강한 보수, 진정한 우파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올드라이트나 뉴라이트가 아닌 새로운 기대화 희망을 걸어볼 만한 인물을 상상한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상적 좌파만큼 어려운 이상적 우파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이분법적 시각으로 사회를 보는 것은 위험하다. 두 주인공을 통해 이 소설은 두 개의 대척점에 놓인 사람들을 그려놓고 있다. 금의 아버지나 거북 선생은 이제 금과 은으로 화하여 어떤 미래를 보여줄 것 같기는 하지만 궁금하지는 않다. 작가의 의도처럼 금과 은이 하나로 통합되거나 새로운 자각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하는 모델은 상상하기 어렵다. 허생의 ‘섬’이나 홍길동의 ‘율도국’ 만큼이나 부질없다.

  10년 만에 나온 장정일의 소설에서 읽어낸 것은 금과 은이 함께 들은 문학 강의 첫 시간(아마도 작가의 강의 경험 그대로일 것인 그것)이 주는 울림이 전부다. 본문에 나와있듯 ‘좋은 책이란, 나한테 절실한 책’이다. 깊은 성찰의 결과이거나 뚜렷한 지향점이 보이지 않아 내겐 혼란스럽게 좌충우돌하는 치기 어린 19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인공에게도 작가에게도 기대와 희망을 꿈꾸지는 않는다.


091209-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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