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지한다 - 불통의 시대, 소통의 길을 찾다
정관용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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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컵에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와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네’. 어렸을 때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누군가에게 들었던 문장이다. 이 문장은 여전히 사용된다. 두 문장은 동일한 현상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반 ‘밖에’와 반 ‘이나’는 주관적 판단이다. 객관적으로 반이 남아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이 전개된다.

  ‘밖에’는 불안하고 초조하다. 부정적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비판적인 관점에서 미래를 준비해야 하며 물이 없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물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고민도 하고, 물이 줄어들지 않도록 절약하고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해 생각도 해야 한다.

  ‘이나’는 여유있고 행복하다.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라고 배웠다. 하지만 다양하고 폭넓은 사고가 부족하고 단순하고 좁은 시야를 갖기 쉽다. 대책없이 낙천적인 태도가 가져올 위험은 부정적 사고보다 훨씬 심각하다. 치밀하고 정교한 계획없이 남은 물을 과신하다보면 정작 필요한 순간에 물을 사용하지 못하고 낭패를 당할 수가 있기 때문에 보다 신중하고 거시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밖에’와 ‘이나’가 만나 토론을 나눈다고 가정해 보면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흔히 TV를 통해서 지켜보는 토론 프로그램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담고 있는 정관용의 『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지한다』는 우리 사회의 대화와 토론 문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로 일해온 저자는 참 할말이 많은 듯하다. 손석희라는 스타급 진행자에 가려 그 인지도나 인기 면에서 조금 떨어지지만 그의 중립적인 진행자의 자세와 진행 솜씨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 책에는 손석희의 추천사가 붙어있다. ‘자아갈등을 넘어 소통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곧 나올지 모를 손석희의 토론 책도 기대한다.

  실제 가정이나 직장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전제, 내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가정은 얼마나 어려운가. 열린 마음이란 바로 이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사회에서 2차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최소한 ‘똘레랑스’는 필요하다.

  똘레랑스는 대립하는 주장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주장을 위해 서로 격렬하게 논쟁한 후 도저히 상대의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지면 별수 없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논쟁으로 풀리지 않는 상대방의 확고한 의견이나 생각을 굳이 바꾸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똘레랑스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관용이다. - 하승우,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39페이지
 
  ‘토론’이란 하나의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주장을 펼치면서 합의를 이루거나 공통의 이해 기반을 넓혀 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하주 간단한 정의지만 토론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러나 ‘합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공통의 이해 기반을 넓혀가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절감하고 있다. 특히 정치인들의 토론은 지켜보는 사람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칠 우려가 있다.

  귀를 막고 자신이 준비해 온 이야기만 하는 토론자, 상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실수를 찾는데 혈안이 돼있는 시청자 그 누구도 ‘합의’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매체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시청률과 형평성에 목을 맨 토론 프로그램을 잊어야 진정한 토론이 시작된다. 그래서 저자는 방송토론을 잊으라고 주문한다. 왜 대한민국은 불통 공화국이 되었는지 짚어보고 적대적 공존관계에 빠진 한국 정치와 언론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소통하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관용이 제시하는 대안들이 바로 이 책의 핵심이 될 것 같다. ‘회색지대’에서 미래를 찾자는 사례 한 가지라도 고민하며 들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여러 가지 방법론은 우리의 척박한 토론 문화에서 필요한 도구들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소통의 구조 안에서 그리고 인간관계의 틀 속에서 고민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조금 더 넓고 깊게 들여다보려는 인식의 힘보다 조금 더 많이 낮게 가슴을 열어야 한다. 공정한 말과 열린 가슴이 아니라면 토론은 시작부터 불가능하다. 소통의 벽을 넘는 곳에서 사회의 발전은 시작된다고 믿는다. 볼테르의 말처럼 제발 이제는 최소한 ‘말할 권리’ 만이라도 갖고 살고 싶다. 어쩌면 소통과 토론은 그 다음의 문제다. 1차적인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주변을 돌아보자. 아니, 그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또한 얼마나 많은가.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 볼테르(1694~1778)


0912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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