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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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 류시화의 「구월의 이틀」중에서


  나의 이틀은 언제였을까? 내 인생의 이틀은 지났을까? 아직도 오지 않은 것일까? 사람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듯이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배경을 선택할 수 없다. 따라서 온전하게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인생을 산다고 볼 수 없다. 운명론적 세계관을 가진 건 아니지만 어쩌지 못하는 운명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생은 ‘선택’이 뿐이라는 오만함을 가진 사람은 행복할까? 인간은 운명을 타고 태어나기 때문에 그것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행복할까? 환경과 유전의 관계를 놓고 벌이는 지루한 논쟁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들 인생에 대한 모호함 때문이다. 과연 어디서 어디까지 노력과 선택으로 변화 가능한 것인 인생일까? 또 찰나에 불과한 인생에서 ‘구월의 이틀’은 언제였을까? 언제 찾아올 것인가?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은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책 없는 질문이 떠오르게 한다. 어떤 부모를 만나 어떤 지역에서 자랐는가에 따라 인간의 의식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 의식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고 또한 그 변화를 촉발한 사건이나 사람 혹은 계기를 고민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대한민국처럼 좁은 땅에서도 남과 북으로 갈리고 동과 서로 나뉜다. 지역적으로 특색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에 우열이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우열이 있다.

  이 소설은 두 세계의 분열과 통합 과정을 꼼꼼하게 고찰하고 있다. 정과 반 그리고 합으로 변화해가는 세계의 변증법적 결합 방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주인공 금과 은은 정이며 반이고 합이며 그 합은 또다시 정이 되고 반이 되며 합이 될 것이다. 그들이 성장한 환경과 사회적 배경은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는 역사적,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다. 광주의 시민운동가 출신 청와대 보좌관 아들 금. 부산의 실패한 사업가 아들 은.

  소설은 각자 다른 사정 때문에 광주와 부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는 두 집안을 연결시킨다. 고속도로 휴게소 커피 자판기 앞에서 처음 마주치는 금과 은. 질긴 운명처럼 혹은 계속되는 우연으로 같은 대학에 입학했고 교양 과목 시간에 처음 서로를 인식하게 된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이들의 대학생활은 동아리 선택 문제, 여자 문제, 진로 문제로 고민한다.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비서관이 된 시민 운동가 출신, 금의 아버지는 자살을 선택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어머니 봉양을 대가로 큰 형 집에서 외제차를 굴리며 생활하던 아버지는 가정부와 바람이 났다가 가족을 본 후 쓰러진다. 아버지 세대의 몰락은 지위와 사회적 위치와 무관하게 다음 세대에게 눈을 돌리게 한다. 은의 작은 아버지는 뉴라이트 교수다. 올드 라이트를 소개받은 은은 새로운 대학생 우파 조직에 가담하게 되고 금과 은은 우정을 넘어 사랑을 나눈다. 늙은 올드라이트 퇴직 교수와 몸을 섞는 은의 모습은 동성애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넘어 실제 모델을 떠오르게 한다.

‘삶의 어느 한 때를 가리켜 인생이라고 할 뿐, 일평생이 인생은 아니다.’ - P. 133

  소설의 제목은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을 의미한다. 삶의 어느 한 때를 가리켜 인생이라고 한다면 나의 인생은 언제였을까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상념에 빠진다. 내 존재를 규정할 수 있는 의식을 결정했던 이틀은 언제였을까? 소설의 주인공 금과 은은 도대체 어느 순간, 어느 이틀을 만나게 된 것일까. 소설을 읽어나가다가 그 순간을 만나게 되면 고개를 끄덕여 자신의 삶을 돌아보거나 다가올 순간을 준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연한 만남, 현실의 필연적 관계를 넘어 한 인간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이념적 지향이나 인식의 틀을 형성하는 계기를 보여준다. 지독한 현실에 대한 반어와 풍자로 읽히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한숨과 냉소로 읽히기도 한다. ‘작가후기’에서 장정일은

그런 뜻에서 내가 가장 공들였던 인물인 은에게는 앞으로 많은 기대를 해도 좋다. 어떤 면에서는 야비하기도 하고 이중인격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은에게는 다른 인물에게는 없는 자기개발의 특성과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반성 능력이 있다. - P. 336

라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자기개발의 특성과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반성 능력을 나는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건강한 보수, 진정한 우파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올드라이트나 뉴라이트가 아닌 새로운 기대화 희망을 걸어볼 만한 인물을 상상한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상적 좌파만큼 어려운 이상적 우파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이분법적 시각으로 사회를 보는 것은 위험하다. 두 주인공을 통해 이 소설은 두 개의 대척점에 놓인 사람들을 그려놓고 있다. 금의 아버지나 거북 선생은 이제 금과 은으로 화하여 어떤 미래를 보여줄 것 같기는 하지만 궁금하지는 않다. 작가의 의도처럼 금과 은이 하나로 통합되거나 새로운 자각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하는 모델은 상상하기 어렵다. 허생의 ‘섬’이나 홍길동의 ‘율도국’ 만큼이나 부질없다.

  10년 만에 나온 장정일의 소설에서 읽어낸 것은 금과 은이 함께 들은 문학 강의 첫 시간(아마도 작가의 강의 경험 그대로일 것인 그것)이 주는 울림이 전부다. 본문에 나와있듯 ‘좋은 책이란, 나한테 절실한 책’이다. 깊은 성찰의 결과이거나 뚜렷한 지향점이 보이지 않아 내겐 혼란스럽게 좌충우돌하는 치기 어린 19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인공에게도 작가에게도 기대와 희망을 꿈꾸지는 않는다.


091209-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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