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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ㅣ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친구 - 오래두고 사귄 벗. 영화 <친구>에서 준석과 동수처럼 적이 될 수도 있는 사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친구는 추억의 섬에서 언제든 불러낼 수 있는 기억의 창고 같은 존재다. 이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림자처럼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관계가 친구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보다 시간을 견디고 오래 곁에 있는 벗에게 말할 수 없는 신뢰를 갖는다. 허물없는 친구 두엇만 있으면 그렇게 사람이 그립지 않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깊이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관계가 바로 친구다.
그러나 가끔은 친구와 싸우기도 하고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친구는 더욱 그렇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도 달라지고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적어지면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자주 만날 수 있고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친구라야 오래오래 우정을 만들어갈 수 있다. 혹자는 동성에 대한 사랑이 우정이라고 말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우정은 사랑보다 넓고도 깊은 감정이다. 하지만 사소한 감정의 대립, 시기와 질투로 친구 관계도 깨질 수 있다. 그래서 그 모든 상처들을 견뎌내고 오래 사귄 벗을 친구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2008년 청소년 소설 분야에서 돌풍을 몰고 온 『완득이』의 작가 김려령. 새 소설 『우아한 거짓말』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았다. 가볍고 즐거운 시트콤 같은 『완득이』의 성공 요인은 경쾌함이었다. 이상적인 담임 ‘동주’의 인간적인 면과 복합적 사회 문제의 결정체 ‘완득이’의 만남은 웃음과 감동의 비빔밥이었다.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 갖추어야 하는 요소를 적절하게 갖춘 소설이라는 말이다. 그에 비해 『우아한 거짓말』은 조금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왕따 문제를 다룬 소설들은 아주 많다. 이 소설도 왕따라는 소재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먼저 한 부모 가정의 자매 중 동생이 자살하고 그 자살의 원일을 찾아가는 과정은 새로울 것이 없는 방법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을 찾는 것이 소설의 미덕은 아니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사례 중심의 소설은 감동도 크지 않고 사회적 의제도 던지지 못한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지만 대체로 화목한 가족이기 때문에 언니의 무관심이 자살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결국 자살의 가장 큰 원인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 오면서 친해진 화연이다. 집단적이고 직접적인 따돌림이 아니라 화연의 은근한 놀림과 주변 아이들의 동조와 방관. 어느 또래 집단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쉽게 넘어갈 수는 없지만 성적도 우수하고 자기 생각도 분명하지만 ‘착한’ 아이가 자살할 정도로 심각했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하고 작은 일로도 사람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인 천지는 언니 만지와의 관계나 화연, 미라와의 관계만으로 우울증에 시달렸고 자살을 하게 되었다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넓은 의미에서 이 소설은 성장 소설보다 심리소설로 볼 수도 있다. 전학 후에 절친한 친구에게 당한 모멸감의 누적과 심리적 고통, 우울증으로 인한 불안 등이 자살의 원인이었다면 학교 폭력이나 왕따 문제를 다룬 청소년 소설이 아니라 청소년기의 심리적 갈등과 그 원인을 탐구하는 소설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느 쪽이든 작가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어 독자들은 마음이 불편하다. 주인공 천지의 심리가 직접 서술되고 엄마와 언지 만지, 옆집 아저씨 오대오(별명), 화연과 그의 부모, 미라와 미란 자매 그리고 아버지 곽만호와의 관계가 그물처럼 얽혀있다. 인물들 사이의 관계는 철저하게 천지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모든 것이 천지의 자살 원인을 밝히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소설 첫머리에서 죽음을 던져 놓은 작가의 모험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수렴적인 방식으로 모든 인물들의 심리와 사건들이 하나로 모아지기 때문이다.
외면하고 싶은 진실 앞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누가 죽었는지 어떻게, 왜 죽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천지의 언니 만지는 화연에게 화해와 용서의 손길을 내민다. 천지의 죽음을 통해 진실이 무엇인지 가려내는 것보다 어쩌면 살아남은 사람들의 상처와 앞으로의 삶에 무게를 둔 것 같기도 하다. 그 의도야 무엇이든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그 관계에서 생긴 고통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을 보듬고 시간에 맡겨 모른 척 가슴에 묻어두기도 하는 것이 생의 진실은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그저 우리 아이들의 미래의 희망이라는 판에 박힌 찬사만 늘어 놓는다. 왜 그들이 우리의 미래인지 그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는 것 같지는 않다. 내 아이의 미래만 중요한 부모와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은 오늘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반성해 보자. 한 아이의 자살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은 작가는 결국 ‘우아한 거짓말’이 아니라 소박한 진실을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 불편한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은 바로 우리 아이들의 현재와 우리 교육의 미래를 성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읽혔다. 가족의 울타리 너머 조금만 더 넓게 그리고 멀리 내다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 아이를 바라보던 눈을 들어 주변의 아이들을 돌아보자. 그러면 내 아이의 진실이 보일지도 모른다.
091223-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