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릿 베어 카르페디엠 7
벤 마이켈슨 지음, 정미영 옮김 / 양철북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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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은, 진실을 거부하지 않으며, 억압했던 고통을 자기 안에서 느끼고, 몸이 감정적으로 알고 있는 과거를 정신적으로도 받아들여 더 이상 억압하지 말고 통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앨리스 밀러, 『폭력의 기억』중에서
 

기억과 망각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인간의 기억은 선택적이다. 사람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산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차츰 잊혀지고, 과거의 기억은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방향으로 다시 조정된다. 기억의 오류는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정신적 상처를 스스로 이겨내기 위한 자정 능력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몸으로 기억한 것은 잊지 못한다. 왜냐하면 몸은 고통 받고 치유하는 과정의 화학적 반응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시절의 경험은 성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아이들의 순수한 영혼은 그래서 상처받기도 쉽다.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 부모이다. 대부분의 경우 어머니는 안정과 사랑의 대상이지만 아들에게 아버지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대상이다. 이것은 ‘인간의 무의식적 충동과 자아 방어’를 말하는데,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도구로 유용하다. 하지현은 『관계의 재구성』에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동성 부모에게서 느끼는 질투와 저항의 관계로 표현했다. 그렇다면 아버지로부터 폭행 당한 아들의 영혼은 어떤 상태일까?

  벤 마이켈슨의 장편소설 『스피릿 베어touching spirt bear』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심리소설이다. 피터 드리스칼에게 끔찍한 폭행을 가한 주인공 콜 매슈는 평소에도 폭력 성향이 강한 15세 소년이다. 그는 감옥에 가지 않을 목적으로 인디언의 치유 방식인 ‘원형평결심사’를 통과하고 알래스카 남동부의 섬으로 떠난다.

  소설은 아버지가 콜을 폭행하는 장면, 알콜 중독으로 남편을 말리지 않는 어머니를 통해 15세 소년의 ‘무의식적 충동과 자아방어’ 기제를 설명하고 있다. 피터를 폭행한 것은 콜의 현재 모습이면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에 대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 이 소설은 콜을 통해 ‘아버지의 폭력 → 몸과 영혼의 상처 → 분노 → 타인과 세상에 대한 폭력’에 이르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콜은 아무도 없는 섬에서 어떻게 이 지독한 슬픔과 분노 그리고 타인의 상처까지 치유할 수 있을까?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는 위대한 자연의 힘

  외딴섬에 혼자 살게 된 콜은 틀링깃 인디언 에드윈 노인이 지어놓은 오두막을 불태우고 희고 거대한 ‘스피릿 베어’를 만난다. 콜은 스피릿 베어를 죽이기 위해 칼을 휘두르다가 온몸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극적으로 살아난 후, 보호관찰관 가비의 도움으로 다시 원형평결심사를 요청한다. 스피릿 베어를 통해 끔찍한 폭력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 콜은 진정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섬에 돌아온 콜은 스스로 불태운 오두막을 다시 짓고 찬 물에 몸을 담그고 돌을 들고 산에 올라가 언덕 아래로 ‘분노’를 굴려 보낸다. 마치 ‘시시포스의 신화’를 연상시키는 돌 굴리기는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콜은 외롭고 힘겨운 섬 생활을 통해 자신의 분노와 상처의 원인을 찾고 스스로 치유하게 된다. 작가는 주변 모든 사람과 갈등을 일으키던 콜을 자연과 대립하는 존재로 묘사한다. 그러나 위대한 자연 앞에서 모든 인간은 겸손해지는 법이다. 콜도 자연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작가는 상처의 원인을 ‘아버지의 폭행’으로 단순화시키지 않고 콜이 가진 내면의 슬픔과 분노로 보았다. 더 나아가 자연을 통해 겸손과 정직 그리고 용서를 배우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타인의 고통을 통한 상처의 극복, 그리고 성장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 견주는 것을 참지 못하는 법이다. -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중에서

  2차 피해자인 피터는 결국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다. 우여곡절 끝에 가해자인 콜이 사는 섬에 도착한 피터. 두 사람의 동거는 이 소설의 백미라고 볼 수 있다. 도덕적이고 뻔한 결론을 위한 수순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치유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된 콜과 점차 마음을 열게 된 피터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극복하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소설에서 ‘분노는 거부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라는 에드윈 영감의 말은 콜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준다. 분노가 사라지고 자신과 ‘타인의 고통’까지 이해하고 용서하는 두 소년의 모습은 다른 성장 소설과 구별되는 『스피릿 베어』만의 특징이다. 결국, 콜과 피터의 고통은 견줄 수 없는 것이며, 가해자를 처벌한다고 해서 피해자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가 전해진다. 작가는 타인의 고통을 통해 서로의 상처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두 소년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부유한 부모를 가졌지만 관심과 사랑이 부족한 콜은 청소년 문제의 핵심을 보여준다. 또한, 자연을 통해 콜이 상처를 치유하듯 인디언의 전통적 가치는 문명화된 미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연안에 살고 있다는 ‘스피릿 베어’를 통해 우리는 미니애폴리스에 살고 있는 콜의 삶을 반성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소 작위적인 설정이나 인과관계의 필연성 등 소설적 완성도의 부족은 콜의 진솔한 고백으로 상쇄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제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어요. 사람들은 두려워서 나쁜 짓을 하는 거예요. 가끔은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애쓰다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죠.” - P.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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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수난사 - 여자보다 강한 어머니들 이야기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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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보고싶어요 어려서부터 우리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하는 외식 몇 번 한 적이 없었고 일터에 나가신 어머니 집에 없으면 언제나 혼자서 끓여먹었던 라면 그러다 라면이 너무 지겨워서 맛있는것 좀 먹자고 대들었었어 그러자 어머님이 마지못해 꺼내신 숨겨두신 비상금으로 시켜주신 자장면 하나에 너무나 행복했었어 하지만 어머님은 왠지 드시질 않았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야이야~아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후회하~고 눈물도 흘리고~……’

21세기 아이들이 랩으로 소화한 god의 <어머님께>라는 노래의 일부다. <불효자는 웁니다>로 시작된 ‘어머니’에 관한 노래는 80년대에 산울림의 <어머니와 고등어>가 짧은 가사와 경쾌한 리듬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땅의 어머니들은 여전히  노래를 부르신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혼자 흥얼거리시던 ‘얼굴’이라는 가곡이 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그래서 내게 ‘어머니’의 노래는 ‘얼굴’이다. 지금도 가끔 궁금하지만 한 번도 여쭙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떠올린 ‘빛나던 눈동자’는 누구의 것인지.

  아버지와 전혀 다른 정서와 이미지로, 항상 눈물과 함께 등장하는 대한민국 모든 ‘어머니’는 오늘도 안녕하신지 모르겠다. 여자와 아주머니 구별되는 ‘어머니’의 이데올로기는 과연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궁금했다. 강준만의 『어머니 수난사』는 조선시대부터 2008년까지 역사적 관점에서 어머니의 역할과 사회적 의미를 고찰하고 있는 책이다.

  아들을 낳아야만 대접받는 사회에서 시작된 어머니의 수난은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거쳐 전쟁 미망인의 고통을 넘어 입시전쟁을 통해 인정 투쟁으로 계속되도 있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어머니’는 신성함의 탈을 쓰고 여성들의 굴레로 남아있다. 성역할의 올가미는 문화적인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근대 이후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급변했지만 가정에서 ‘어머니’의 상징성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이 책은 강준만 특유의 화법과 글쓰기 방식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후주(後註)가 34페이지 달할 만큼 본문 내용은 방대한 참고자료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철저한 고증과 각종 자료에서 인용한 글쓰기 방식은 시대별로 ‘어머니’의 위상과 의미를 밝히는 데 더없이 객관화된 방식이다. 공시적, 통시적 관점의 적절한 조화로 군더더기 없이 시대별로 깔끔하게 정리된 내용은 대한민국 여성들의 ‘수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여성의 역사라는 측면에서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잘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이전의 책에서도 저자가 사용한 이 방법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신문과 방송은 사실(fact)의 전달이 기본이지만 책은 이것과 조금 다르다고 본다. 저자의 해석과 분석보다 인용이 많은 책은 독자에게 저자 특유의 개성과 일관된 관점을 직접 체험하기 어렵게 한다. 발터 벤야민이 인용문만으로 책을 쓰고 싶다던 욕망을 실현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것은 책이 아니라 거대한 신문으로 읽힌다. 책과 신문의 ‘어머니’ 관련 기사들을 정교하게 편집해 놓은 느낌이다. 저자의 의도가 바로 이것이었다면 매우 성공적이지만 한 권의 책이 들려주는 커다란 울림은 부족하다. 맺는말에서 ‘아줌마 혐오와 어머니 신성화’를 넘어서 현실의 문제를 성찰하고 있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문학이 아닌 다음에야 현실적 대안과 문제들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다루고 사적 전개 과정이 도대체 어떤 영향과 결과로 이어졌는지 조금 떠 꼼꼼하게 짚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지나친 정보의 나열로 난삽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객관적 사실의 나열로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문제를 인식하도록 하는데 의미를 둘 수 있겠지만 인용된 책과 자료들이 당시 여성과 사회 현상에 대한 분석인 경우가 많이 2차적 해석이 아닌 단순한 정보의 나열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그래도 여전히 강준만의 저작은 읽을 만하다. 누가 이만한 노력과 정성을 쏟아 하나의 주제를 통해 꼼꼼하게 사적 전개 과정을 읽어낼 수 있겠는가. 그가 보여준 학문과 사회 현상에 대한 접근 방법과 언론에 대한 대응 방식은 그의 글을 신뢰할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힘이다. 색다른 글쓰기 방식에 대한 아쉬움보다 그의 노력과 성과가 훨씬 크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물과사상사의 ‘인사갈마들총서’ 시리즈가 보여준 재미와 믿음은 흰 화면에 한복을 입은 여인의 뒷모습을 내세운 어색하고 촌스런 표지가 오히려 순수한 진실을 보여주기에 적합하다. 화장을 하지 않은 어머니 얼굴의 주름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는가. 이 책을 통해 쌓여온 세월의 무게와 대한민국의 ‘어머니’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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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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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몸은 어디에서 왔을까? 중요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질문이긴 하다. 생명 탄생의 기원은 아직도 신비로운 영역에 속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은 종교와 과학의 대립으로 21세기에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하는 프랙탈 구조처럼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고 10개월 만에 한 인간이 태어나는 과정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이렇게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몸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질적 존재이다.

  그렇다면 생각은 어떤가? 만져지지도 보이지도 않지만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정신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판단 능력, 사람을 대하는 태도, 사회를 보는 눈, 인생의 목표와 가치, 행복의 조건 등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생각해 보자. 내 생각은 과연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을까?

  사람이 태어나면서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과 취향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판단하는 근거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다. 가정에서 부모에게, 또래집단에서 친구에게, 학교에서 선후배나 선생에게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고 영향을 받는다. 그렇게 조금씩 형성된 사고의 틀은 내 생각의 좌표가 된다. 시나브로 만들어진 내 영혼의 주인은 누구인지 돌아보아야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홍세화의 『생각의 좌표』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이후 우리 사회를 외부자(?)의 시선으로, 누구보다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는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에 따르면, 사람은 이성적 동물, 합리적 동물이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 P. 16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분야가 바로 합리적이지 못한 인간의 생각이다. 철학은 물론이고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 등 각 학문 분야에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인간을 모델로 그들의 행동을 예측하고 사고의 패턴을 연구해왔다. 하지만 택시 운전을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 심지어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조차도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에 투표하지 않는다. 살 가능성이 95%라는 말에는 수술 동의서에 흔쾌히 서명하지만 100중에 5명이 죽는 수술이라고 말하면 그럴 수는 없다고 버티는 것이 불합리한 인간의 판단 능력이다. 생각의 오류를 지적해도 같은 패턴으로 실수하고 합리적이지 못한 판단을 내리면서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홍세화는 이 책에서 생각의 오류가 아니라 생각의 ‘좌표’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디를 보고 걷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동일한 조건에서 출발해도 과정과 결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저자의 경험과 폭넓은 인문학적 지식이 바탕이 되어 매우 설득력있게 전달된다.

  에세이는 종횡무진 자유로운 글쓰기의 전형으로 알고 있지만 매우 어려운 글쓰기 방법이다. 짧은 글로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명료하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홍세화는 짧은 문장과 막힘없는 논리의 흐름으로 이야기하지만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과격하고 흥분된 상태에서 어떤 말을 하든지 상대는 내용 이전에 형식에 반감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가장 좋은 설득의 방법은 편안하고 쉬운 말로 마음을 흔드는 것이다. 편안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는 저자의 글쓰기는 읽는 사람의 생각을 조금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한 사람의 생각을 단 번에 뒤집는 것은 과격한 구호나 과장된 수사일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의 생각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것은 깊은 울림과 작은 공감에서 시작된다.

  3개의 분야로 나뉘어져 있지만 편의상 구분일 뿐 하나의 흐름으로 쭉 읽어나가거나 마음에 드는 제목의 글을 시간이 날 때마다 읽어도 좋은 책이다. ‘내 생각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1부가 가장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네 가지 경로를 제시한다. ‘1) 폭넓은 독서 2) 열린 자세의 토론 3) 직접 견문 4) 성찰’이 그것이다.  이것은 물론 감성의 영역이 아니라 이성의 영역을 말한다. 인간의 생각을 만들어 가는 데 왜 책이 가장 중요한지 스페인 작가의 말을 인용하고 있으니 함께 읽어보자.

“사람은 그때까지 읽은 책이다”라는 말이 있다. 스페인의 한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의 눈과 귀가 보고 들을 수 있는 세계는 지극히 좁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감옥에 하나의 창이 나 있다. 놀랍게도 이 창은 모든 세계와 만나게 해준다. 바로 책이라는 이름의 창이다.” - P. 24

  모든 세계와 만나보지 않은 사람의 좁은 시야와 생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는 경우가 많다. 내 생각만 옳고 다른 사람은 틀리다는 생각이 가장 위험하다. 내 생각도 틀릴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세계를 바라보는 책이라는 이름의 창이 필요하다. 덧붙여 열린 자세의 토론과 직접 견문, 성찰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내가 보는 신문, 내가 읽은 책이 내 생각을 어떻게 바꿨는지 생각해보자. 보지도 않고 읽지도 않고 비난하는 태도를 가진 적은 없는지 눈과 귀를 닫고 오로지 내 이야기만 한 적은 없는지 반성해 보자.

 이런 반성적 사고에 출발하면 삶의 방향과 목적이 달라지고 사회를 보는 눈이 새로워질 수 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돌아볼 수 있고, 이념의 대립이 아닌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토론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대화와 소통의 전제 조건은 상대방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그리고 성찰해 보자. 나는 누구인가, 내 생각은 어디에서 왔는가, 내 생각의 주인은 누구이며,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떠한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자기 성숙을 모색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개인으로서 내세울 장점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속한 집단인 국가, 민족, 종교, 지역, 혈연, 출신 학교를 내세운다. - P. 131

  다른 어떤 문장보다도 아프게 다가온다. 자기 성숙을 모색하는 2010년을 위해 우리 모두 ‘생각의 좌표’를 점검해 보는 건 어떨까? 기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중립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라면 저자의 말대로 ‘회색의 물신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면 저자의 이 말을 기억하며 지금-여기 서 있는 나의 좌표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연대’해야 한다.

인간 역사에 진보가 있었다면 그것은 정의, 상식, 공익, 진실이 힘을 획득해 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의, 상식, 공익, 진실을 추구하는 건강한 시민이라면 의지로 서로의 힘을 결집시켜야 하며 힘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마땅하다. 이것을 우리는 ‘연대’라고 부른다. - P.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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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어두운 저편 창비시선 308
남진우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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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내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함은
입속에 작은 촛불 하나 켜는 것과 같으니
입속에 녹아내리는 양초의 뜨거움을 견디며
그대에게 보이는 것과 같으니

아무리 속삭여도
불은 이윽고 꺼져가고
흘러내린 양초에 굳은 혀를 깨물며
나는 쓸쓸히 돌아선다

어두운 밤 그대 방을 밝히는 작은 촛불 하나
내 속삭임을 대신해 파닥일 뿐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의 시간을 가질 때 우리는 흔히 촛불을 켠다.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거울어 비추어볼 때도 촛불을 켠다. 사람들은 흔들리는 촛불에 자신을 투영하는 것이다. 내 속삭임을 대신해 파닥이는 촛불을 들여다보고 싶은 시간이다.

  남진우의 『사랑의 어두운 저편』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내밀한 고백이다. 수없이 말해왔지만 한 번도 말해 본 적이 없는 것같은 그 ‘사랑’에 대하여. 어떤 대상에 대한 몰입과 거리두기는 서로 모순된 듯 싶지만 팽팽한 긴장의 끈을 유지할 수 있다면 지속적인 영원한 사랑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서편 하늘을 물들인 저녁 하늘은 생의 이면을 반추케한다.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단한 길을 걷다가 잠시 쉬어야하는 나그네처럼 사람들에게 시는 한 모금의 약수처럼 생기와 탄력을 불어 넣는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현란한 영상을 잠시 차단한 채 내면의 울림에 귀 기울여보는 시간이 바로 시를 만나는 시간일 게다.



누런 먼지 날리는
사막 입구에서 문득
뒤돌아보며 너는 물었다
얼마만큼 걷고 걸으면 출구가 나올까

전갈 한 마리 소리없이 네 발뒤꿈치에 다가와
가만히 물고 지나갔다

사막 입구 쓰러진 네 몸 위로
둥근 달이 떠올랐다
멀리 출구에서 불어온 한줄기 바람이
네 귀에 뭐라고 속삭이고 지나갔다


  출구없는 생. 입구는 더더욱 찾을 수 없을만큼 걸어왔다. 문득 고개 들어 주위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외로움 너머에 고독의 진저리. 둥근 달이 너에게 뭐라고 속삭였든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한줄기 바람처럼 고즈넉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한 생은 찰나였음을 짐작하겠지.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2막 3장 Tableau Ⅲ. 액자속의 그림처럼 정지 화면들이 스치는 시간도 금방 올 것만 같다.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는 메모를 들여다 보는 시인의 심정을 헤아리는 순간이 오리라 믿는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날
낡은 수첩 한구석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읽게 되리라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랬던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그토록 사랑해서
너 없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너를 사랑한 것을 기필코 먼 옛날의 일로 보내며 보내버려야만 했던 그날이
나에게 있었던가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한사코 생각하는 내가
이토록 낯설게 마주한 너를
나는 다만 떠올릴 수 없어서
낡은 수첩 한구석에 밀어넣은 그 말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줄을 긋고 이렇게 새로 적어넣는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런 나를 한번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런 순간이 온다면 한 번도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는 자기 부정이 지독한 역설로 들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언제나 먼 곳의 그리움을 가슴에 담고 그대 가까이! 손 닿을 수 없는 너의 몸을 향한 열망과 안타까움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생은 그렇게 아쉬움과 한숨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으며 하루하루를 감사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사라진 너를 찾아 몸을 돌리지 않겠다.

그대에게 가까이

너의 몸은
내 손으로는 가닿을 수 없다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이렇게 미소짓고 있는 너를
나는 만질 수도 껴안을 수도 없다

점점 푸르러지는 달빛 한가운데
너는 서서 내게 말한다 나는 추워…… 너무 추운 곳에 있어
바람 한점 없는 고요 속에서
너의 옷자락은 쉴새없이 펄럭이고
한 걸음 너를 향해 옆으로 돌린 채
너는 더욱 아득한 거리로 멀어져갈 뿐
서리처럼 네 몸에 차갑게 입혀진 달빛을
나는 걷어낼 수가 없다

나는 추워…… 너무 추운 곳에 있어,라고 속삭이는
네 입가에 가느다란 피가 흐르고
약속처럼 멀리서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무성한 달빛을 헤치고 나는 마침내
네 곁에 다가선다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감싸고
두 팔을 벌려 너를 가슴에 가둔다
내 팔에 감겨들었다가
달빛과 함께 부서져 손가락 사이로
덧없이 흘러내리는 네 얼굴 네 가슴

지상에서 가장 추운 곳
너무 추워 하얀 입김조차 얼어붙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나란히 쓰러져 눕는다
점점 푸르러지는 달빛 저편
물무늬로 아른대는 너의 미소를 떠올리며
나는 사라진 너를 찾아 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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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기의 혁명 2 - 경제를 읽어야 정치가 보인다 신문 읽기의 혁명 2
손석춘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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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균형잡힌 지식인. 사람마다 꿈이 있고 희망이 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균형을 잃지 않는 통찰력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나로부터 시작해서 타자와 세계의 관계망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인과관계와 사회 현상에 대한 학습은 반드시 필요하다. 토대를 구축하고 나면 종횡무진 누빔과 가로지르기가 가능해질 것이다. 진정한 지식과 혜안은 하루 아침에 얻어지지 않으며 거시적인 관점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사람의 생각은 지극히 편협할 수밖에 없다고 전제하면 역지사지가 가능해지고 똘레랑스가 위력을 발휘한다. 모두 내 생각과 같을 수 없고 판단의 근거가 합리적이고 논리적일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가끔 벽에 부딪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닐 때가 있다. 책을 읽고 사람을 읽고 세상을 읽는 것은 우리 삶의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지난한 고통과 한숨, 좌절과 절망이 기다릴 때도 있고 벅찬 감동과 희망찬 미래를 만날 때도 있다. 그 길이 즐겁고 행복하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함께 걸어갈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믿음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세상을 읽는 중요한 도구 중 하나인 신문은 여전히 우리의 의식을 규정한다. 어느 신문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볼 것이냐가 문제다. 손석춘은 『신문 읽기의 혁명』1권에서 편집된 신문지면을 해체해서 재구성하라고 주문했다. 신문은 편집이다. 어떤 기사를 선택해서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신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문 기사의 내용은 편집 방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수많은 독자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이 책의 2권이 13년에 출간되었다. 1권의 핵심이 ‘편집’이었다면 2권의 중심에는 ‘경제’가 놓여있다. ‘경제를 읽어야 정치가 보인다’는 부제는 책 전체를 요약한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서 섹션별로 신문을 구성하는 방법이 보편적이지만 저자는 경제를 통해 정치를 읽어야 한다는 논리다. 경제가 수단이고 정치가 목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신문읽기를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2009년 12월 28일은 UAE에 47조원에 달하는 원전을 수출한 내용이 주요기사다. 하지만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사설은 서로 다른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본다. 조선일보 사설의 제목은 사설 ‘우리 기술과 정상 외교 기량이 만나 일군 47조 원전 수출’이지만, 한겨레는 ‘원전 수출이 달갑지만은 않은 이유’라는 제목의 사설을 싣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외교력과 경제적 효과에 초점을 맞춘 내용과 지속가능한 에너지로 볼 수 없는 원전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는 내용이 그것이다. 경제라는 잣대로 개발과 환경 문제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두 신문의 관점은 서로 다르다. 이에 대해 오마이 뉴스는 ‘불안한 한국형 원전, 위험까지 수출?’로 표현하고 있으며, 미디어 오늘은 각 진영의 논쟁을 ‘원전수주 반대한 한겨레 폐간하라’로 정리하고 있다.

  경제면을 넘어서야 경제가 보이고 광고를 읽어낼 수 있어야 본격적인 신문읽기가 시작된다. 정치와 경제는 우리 사회를 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다. 신문의 품격은 결국 ‘진실’의 문제로 귀결된다. 정치와 경제 논리로 정파적 신문 읽기를 유도할 수는 없다. 그 함정에 빠질 때 독자들은 바보가 되고 개인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을 혼돈하고 국가의 이익이 결국 누구의 이익인지 헛갈리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신문 깊이 읽기의 세 지층으로 세계화, 민중, 이해관계를 제시한다. 현실적인 신문읽기의 잣대를 들이댄 것이다. 오늘 신문은 내일의 역사가 된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뉴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어떤 기준으로 신문을 꼼꼼히 살펴야 할 것인가는 독자의 몫이다. 인터넷 신문의 약진, 신문재벌의 방송진출 등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으려면 스스로 학습하는 길밖에 없다. ‘카더라’ 통신에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주권시대의 신문 읽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책을 끝맺는다.

  우리 개개인이 누군가가 정해놓은 틀 속에서 평생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주체가 되어 자아를 더 풍요롭게 실현해가는 주권혁명 시대를 우리는 맞고 있다. 신문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평생학습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자신의 경제생활을 단순히 ‘취업’이나 ‘호구지책’으로 여길 게 아니라 정치생활과 연결 짓는 다리로 신문을 읽으며 새로운 사회의 주체로 자기를 창조적으로 형성해갈 때, 그때 신문 ‘읽기의 혁명’은 곧 ‘혁명 읽기’다. 그때 신문 읽기는 예술이다. - P. 280



09122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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