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어두운 저편 창비시선 308
남진우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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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내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함은
입속에 작은 촛불 하나 켜는 것과 같으니
입속에 녹아내리는 양초의 뜨거움을 견디며
그대에게 보이는 것과 같으니

아무리 속삭여도
불은 이윽고 꺼져가고
흘러내린 양초에 굳은 혀를 깨물며
나는 쓸쓸히 돌아선다

어두운 밤 그대 방을 밝히는 작은 촛불 하나
내 속삭임을 대신해 파닥일 뿐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의 시간을 가질 때 우리는 흔히 촛불을 켠다.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거울어 비추어볼 때도 촛불을 켠다. 사람들은 흔들리는 촛불에 자신을 투영하는 것이다. 내 속삭임을 대신해 파닥이는 촛불을 들여다보고 싶은 시간이다.

  남진우의 『사랑의 어두운 저편』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내밀한 고백이다. 수없이 말해왔지만 한 번도 말해 본 적이 없는 것같은 그 ‘사랑’에 대하여. 어떤 대상에 대한 몰입과 거리두기는 서로 모순된 듯 싶지만 팽팽한 긴장의 끈을 유지할 수 있다면 지속적인 영원한 사랑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서편 하늘을 물들인 저녁 하늘은 생의 이면을 반추케한다.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단한 길을 걷다가 잠시 쉬어야하는 나그네처럼 사람들에게 시는 한 모금의 약수처럼 생기와 탄력을 불어 넣는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현란한 영상을 잠시 차단한 채 내면의 울림에 귀 기울여보는 시간이 바로 시를 만나는 시간일 게다.



누런 먼지 날리는
사막 입구에서 문득
뒤돌아보며 너는 물었다
얼마만큼 걷고 걸으면 출구가 나올까

전갈 한 마리 소리없이 네 발뒤꿈치에 다가와
가만히 물고 지나갔다

사막 입구 쓰러진 네 몸 위로
둥근 달이 떠올랐다
멀리 출구에서 불어온 한줄기 바람이
네 귀에 뭐라고 속삭이고 지나갔다


  출구없는 생. 입구는 더더욱 찾을 수 없을만큼 걸어왔다. 문득 고개 들어 주위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외로움 너머에 고독의 진저리. 둥근 달이 너에게 뭐라고 속삭였든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한줄기 바람처럼 고즈넉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한 생은 찰나였음을 짐작하겠지.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2막 3장 Tableau Ⅲ. 액자속의 그림처럼 정지 화면들이 스치는 시간도 금방 올 것만 같다.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는 메모를 들여다 보는 시인의 심정을 헤아리는 순간이 오리라 믿는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날
낡은 수첩 한구석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읽게 되리라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랬던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그토록 사랑해서
너 없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너를 사랑한 것을 기필코 먼 옛날의 일로 보내며 보내버려야만 했던 그날이
나에게 있었던가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한사코 생각하는 내가
이토록 낯설게 마주한 너를
나는 다만 떠올릴 수 없어서
낡은 수첩 한구석에 밀어넣은 그 말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줄을 긋고 이렇게 새로 적어넣는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런 나를 한번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런 순간이 온다면 한 번도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는 자기 부정이 지독한 역설로 들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언제나 먼 곳의 그리움을 가슴에 담고 그대 가까이! 손 닿을 수 없는 너의 몸을 향한 열망과 안타까움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생은 그렇게 아쉬움과 한숨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으며 하루하루를 감사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사라진 너를 찾아 몸을 돌리지 않겠다.

그대에게 가까이

너의 몸은
내 손으로는 가닿을 수 없다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이렇게 미소짓고 있는 너를
나는 만질 수도 껴안을 수도 없다

점점 푸르러지는 달빛 한가운데
너는 서서 내게 말한다 나는 추워…… 너무 추운 곳에 있어
바람 한점 없는 고요 속에서
너의 옷자락은 쉴새없이 펄럭이고
한 걸음 너를 향해 옆으로 돌린 채
너는 더욱 아득한 거리로 멀어져갈 뿐
서리처럼 네 몸에 차갑게 입혀진 달빛을
나는 걷어낼 수가 없다

나는 추워…… 너무 추운 곳에 있어,라고 속삭이는
네 입가에 가느다란 피가 흐르고
약속처럼 멀리서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무성한 달빛을 헤치고 나는 마침내
네 곁에 다가선다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감싸고
두 팔을 벌려 너를 가슴에 가둔다
내 팔에 감겨들었다가
달빛과 함께 부서져 손가락 사이로
덧없이 흘러내리는 네 얼굴 네 가슴

지상에서 가장 추운 곳
너무 추워 하얀 입김조차 얼어붙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나란히 쓰러져 눕는다
점점 푸르러지는 달빛 저편
물무늬로 아른대는 너의 미소를 떠올리며
나는 사라진 너를 찾아 몸을 돌린다



0912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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