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 몸은 어디에서 왔을까? 중요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질문이긴 하다. 생명 탄생의 기원은 아직도 신비로운 영역에 속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은 종교와 과학의 대립으로 21세기에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하는 프랙탈 구조처럼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고 10개월 만에 한 인간이 태어나는 과정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이렇게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몸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질적 존재이다.

  그렇다면 생각은 어떤가? 만져지지도 보이지도 않지만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정신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판단 능력, 사람을 대하는 태도, 사회를 보는 눈, 인생의 목표와 가치, 행복의 조건 등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생각해 보자. 내 생각은 과연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을까?

  사람이 태어나면서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과 취향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판단하는 근거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다. 가정에서 부모에게, 또래집단에서 친구에게, 학교에서 선후배나 선생에게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고 영향을 받는다. 그렇게 조금씩 형성된 사고의 틀은 내 생각의 좌표가 된다. 시나브로 만들어진 내 영혼의 주인은 누구인지 돌아보아야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홍세화의 『생각의 좌표』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이후 우리 사회를 외부자(?)의 시선으로, 누구보다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는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에 따르면, 사람은 이성적 동물, 합리적 동물이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 P. 16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분야가 바로 합리적이지 못한 인간의 생각이다. 철학은 물론이고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 등 각 학문 분야에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인간을 모델로 그들의 행동을 예측하고 사고의 패턴을 연구해왔다. 하지만 택시 운전을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 심지어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조차도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에 투표하지 않는다. 살 가능성이 95%라는 말에는 수술 동의서에 흔쾌히 서명하지만 100중에 5명이 죽는 수술이라고 말하면 그럴 수는 없다고 버티는 것이 불합리한 인간의 판단 능력이다. 생각의 오류를 지적해도 같은 패턴으로 실수하고 합리적이지 못한 판단을 내리면서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홍세화는 이 책에서 생각의 오류가 아니라 생각의 ‘좌표’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디를 보고 걷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동일한 조건에서 출발해도 과정과 결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저자의 경험과 폭넓은 인문학적 지식이 바탕이 되어 매우 설득력있게 전달된다.

  에세이는 종횡무진 자유로운 글쓰기의 전형으로 알고 있지만 매우 어려운 글쓰기 방법이다. 짧은 글로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명료하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홍세화는 짧은 문장과 막힘없는 논리의 흐름으로 이야기하지만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과격하고 흥분된 상태에서 어떤 말을 하든지 상대는 내용 이전에 형식에 반감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가장 좋은 설득의 방법은 편안하고 쉬운 말로 마음을 흔드는 것이다. 편안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는 저자의 글쓰기는 읽는 사람의 생각을 조금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한 사람의 생각을 단 번에 뒤집는 것은 과격한 구호나 과장된 수사일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의 생각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것은 깊은 울림과 작은 공감에서 시작된다.

  3개의 분야로 나뉘어져 있지만 편의상 구분일 뿐 하나의 흐름으로 쭉 읽어나가거나 마음에 드는 제목의 글을 시간이 날 때마다 읽어도 좋은 책이다. ‘내 생각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1부가 가장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네 가지 경로를 제시한다. ‘1) 폭넓은 독서 2) 열린 자세의 토론 3) 직접 견문 4) 성찰’이 그것이다.  이것은 물론 감성의 영역이 아니라 이성의 영역을 말한다. 인간의 생각을 만들어 가는 데 왜 책이 가장 중요한지 스페인 작가의 말을 인용하고 있으니 함께 읽어보자.

“사람은 그때까지 읽은 책이다”라는 말이 있다. 스페인의 한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의 눈과 귀가 보고 들을 수 있는 세계는 지극히 좁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감옥에 하나의 창이 나 있다. 놀랍게도 이 창은 모든 세계와 만나게 해준다. 바로 책이라는 이름의 창이다.” - P. 24

  모든 세계와 만나보지 않은 사람의 좁은 시야와 생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는 경우가 많다. 내 생각만 옳고 다른 사람은 틀리다는 생각이 가장 위험하다. 내 생각도 틀릴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세계를 바라보는 책이라는 이름의 창이 필요하다. 덧붙여 열린 자세의 토론과 직접 견문, 성찰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내가 보는 신문, 내가 읽은 책이 내 생각을 어떻게 바꿨는지 생각해보자. 보지도 않고 읽지도 않고 비난하는 태도를 가진 적은 없는지 눈과 귀를 닫고 오로지 내 이야기만 한 적은 없는지 반성해 보자.

 이런 반성적 사고에 출발하면 삶의 방향과 목적이 달라지고 사회를 보는 눈이 새로워질 수 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돌아볼 수 있고, 이념의 대립이 아닌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토론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대화와 소통의 전제 조건은 상대방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그리고 성찰해 보자. 나는 누구인가, 내 생각은 어디에서 왔는가, 내 생각의 주인은 누구이며,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떠한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자기 성숙을 모색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개인으로서 내세울 장점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속한 집단인 국가, 민족, 종교, 지역, 혈연, 출신 학교를 내세운다. - P. 131

  다른 어떤 문장보다도 아프게 다가온다. 자기 성숙을 모색하는 2010년을 위해 우리 모두 ‘생각의 좌표’를 점검해 보는 건 어떨까? 기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중립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라면 저자의 말대로 ‘회색의 물신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면 저자의 이 말을 기억하며 지금-여기 서 있는 나의 좌표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연대’해야 한다.

인간 역사에 진보가 있었다면 그것은 정의, 상식, 공익, 진실이 힘을 획득해 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의, 상식, 공익, 진실을 추구하는 건강한 시민이라면 의지로 서로의 힘을 결집시켜야 하며 힘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마땅하다. 이것을 우리는 ‘연대’라고 부른다. - P. 185


10010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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