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서 춤추다 - 서울-베를린, 언어의 집을 부수고 떠난 유랑자들
서경식 & 타와다 요오꼬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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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는 위험하다. 흔희 회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지점이 경계에 해당한다. 경계는 불분명하고 불안하다. 소속감을 느낄 수 없고 그렇다고 경계 밖도 아니다. 이 경계를 바꾸어 생각하면 이쪽과 저쪽 모두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이 가진 뉘앙스와 이미지는 늘 적색 신호를 보내는 듯하다.

  사람은 누구나 소속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 있어야 마음이 편하고 어느 집단에 소속되어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집단의 정체성에 차이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 모순된 간격을 메우거나 거부한다. 소속을 바꾸거나 집단의 성격을 바꾸거나!

  문제는 자신의 선택과 노력이 가능한 일인가 그렇지 않은 일인가에 달려 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질적인 집단에 속해 있는 개인을 상상해 보라. 재일동포 서경석은 바로 이러한 자신의 정체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다. 디아스포라 서경석의 글은 어느 한국인 못지  않게 유려하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다보면 경계를 넘어 또 다른 사유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서경석의 전작을 한 권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경계에서 춤추다』라는 제목이 슬프게 느껴졌을 것이다. ‘춤’은 기쁨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인의 다른 말인 경계인 서경석이 춤을 춘다고 했으니 그 함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반어적인 의미로 들리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역설적으로 서경석은 경계를 즐기며 진짜 ‘자유’의 춤을 추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이 책은 일본의 여류 소설가 타와다 요오꼬와 나눈 편지를 묶은 것이다. 집, 이름, 여행, 놀이, 빛, 목소리, 번역, 순교, 고향, 동물 등 일상에서 접하게 되는 열 가지 주제를 가지고 서로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독자들은 두 사람의 은밀한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는 재미를 맛본다. 공개를 전제로 쓰인 편지지만 사색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들이 드러나는 것은 편지라는 형식의 힘이 커 보인다.

  편지는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쓴 글이기 때문에 받는 사람에게 모든 초점이 맞춰진다.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염두에 두기도 하지만 일단 받는 사람의 입장에 맞추게 된다. 서울의 서경석과 베를린의 타와다 요오꼬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동일한 사물과 사건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따로 또 같이 고민하고 소통하는 모습은 인종과 국가의 벽을 넘어 공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내밀한 언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있어 무림 고수들이 내공을 겨루듯 한치의 양보없이 팽팽하게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글쓰기는 형식과 무관하지 않다. 자유롭게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편지 형식은 독자들에게도 편안하고 즐겁게 대화를 엿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베를린에서 타와다 요오꼬는 이방인이고 서울에서 서경식은 경계인이다. 일본인이 베를린에서 사는 것과 한국인이 서울에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일 수 있지만 오히려 서경석에게 서울은 더 낯설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가족사를 굳이 알지 못하더라도 서경식에게 ‘고향’은 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화두가 된다.

저 자신이, 루쉰처럼 어떤 시점에서 명확히 고향을 잃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재일조선인 2세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고향을 잃어버린 존재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제가 어릴 때부터 루쉰의 『고향』에 마음이 끌렸던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먼 거리’를 알아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 P. 204

  서경석은 찬찬히 생각해 보아도 돌아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결국 돌아가고 싶은 곳, 돌아가야할 장소 따위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에게 돌아갈 고향은 있는 것일까? 세월이 흐르고 모든 것은 사라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먼 거리’만 확인하는 과정이 인생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이라고 외치고 싶은 게 사람의 욕심이다.

  경계에서 보면 일본이든 한국이든 혹은 독일이든 낯선 땅이 아니라 어느 곳이든 돌아가야할 장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 경계로부터 자유롭게 춤을 추어 보자. 경계를 넘나들며 신나게 뒤섞고 흔들어보자. 우리는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지만 영원히 혼자일지도 모른다. 서경석과 타와다 요오꼬는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거나 공간만 이동한 경계인은 아닐까? 내 몸이 놓인 자리가 아니라 삶의 자리와 방식이 문제이듯이…….


100319-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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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사이프러스에서 사계절 1318 문고 56
박채란 지음 / 사계절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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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마. 사랑이 제일 중요한거야. 작은 민들레 홀씨 하나에게도, 수백년을 살아낸 메타세콰이아 나무에게도, 그리고 너희들에게도, 똑같이 사랑이 가장 중요해. 
사랑이란, 너희가 선택한 바로 그 삶 안에서 살아 있으려는 마음이니까. - P. 263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웁다는 말 한 마디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말을 백 번쯤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그리움은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이다. 그립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은 눈을 감은 채 그리움의 부피를 가늠하는 일이고 그 무게에 눌려 숨조차 쉬기 버거운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사랑이 없는 삶은 누구에게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말이다. 첫사랑은 말하자면 우리가 비로소 성인이 되기 위한 관문과 같은 것이다. 대부분 과거의 일일 터이니 ‘첫사랑’을 떠 올려 보자. 아득한 열기와 혼돈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끝없는 자책과 후회가 밀려온다면 지독한 첫사랑의 아픔을 간직한 사람이다. 서툴고 모라자서 아름다웠던 순간을 추억하며 늙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모두 비겁한 것만은 아니다. 청소년기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그 혼란을 ‘사랑’과 함께 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박채란의 『목요일, 사이프러스에서』는 네 가지 사랑이 등장한다. 이성에 대한 사랑(새롬)은 물론이고 가족에 대한 사랑(태정과 선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새롬과 선주)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하빈과 선주)이 그것이다. 사랑의 종류를 나눌 수 있을지 의문스럽지만 그 대상을 나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열 여덟, 고등학교 2학년인 여학생들 사이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 소설은 엉킨 실타래처럼 사건의 실마리가 쉽게 풀리지 않는다.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을만큼 치밀하게 계산된 전개 과정은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사춘기 소녀들의 관심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거창한 꿈을 꾸기도 하지만 대부분 소박하고 사소한 일들이다. 이성에 눈을 뜨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새롬), 부모님의 이혼으로 헤어진 아버지를 그리워하기도 하고(태정), 자살한 언니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엄마 때문에 괴로워 하기도(선주) 한다. 백혈병에 걸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하빈) 아이의 입장에서 새롬과 태정 그리고 선주의 고통은 어떻게 보였을지 짐작이 간다.

  사랑은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하빈의 전언이 이 소설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삶은 숙명처럼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은 우리의 선택이었다. 부모와 환경을 탓하기도 하지만, 실제 그것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만 우리의 삶은 우리의 ‘선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작가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아이들에게 다양한 사랑의 의미를 보여준다.

  먼저 새롬이를 살펴보자. 사랑하는 오빠에게 버림받은 완벽한 외모의 소유자. 못생긴 손이 콤플렉스지만 오빠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별의 아픔보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더 견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정이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를 잃는다. 영원히 떠나버리려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분노가 뒤섞인 마음이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선주는 남부럽지 않은 사회경제적 조건을 갖춘 환경이지만 억압적인 부모 때문에 자살한 언니를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고통받는다. 세 명의 아이들은 하빈이라고 하는 아주 특별한 아이를 만난다. 또래 아이들보다 두 살이나 많은 하빈이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소설의 후반부에 그 이유가 그럴듯하게 설명되지만 오히려 독자들은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믿고 싶을 것이다.

  작가는 하빈이의 입을 빌어 사랑의 의미와 중요성을 말한다. 식물에 대한 사전적 지식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준다. 식물이 가지고 있는, 아니 자연의 신비가 품고 있는 진리를 인간은 얼마나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되묻고 있는 듯하다. 스스로 세상에 파견된 안전요원이라고 말하는 하빈이는 쉬운 인생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코끼리가 아카시아를 돕는 방식을 통해 세 명의 아이들의 고민을 해결해 준다. 어쩌면 세 명의 아이들은 하빈이를 통해 스스로의 문제를 발견하고 자신을 치유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하빈이는 ‘거울’의 역할을 한 것이다. 사람들은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가끔 살아있으려는 마음을 의심한다.

  이 책의 제목이 된 ‘사이프러스’는 네 명의 아이들에게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세상을 배우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식물로 둘러쌓인 옥상 정원에서 아이들은 가슴에 응어리진 모든 의문을 풀어내고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착한 사람이 모두 바보가 아니라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깨우치기도 하고 가족의 소중함을 확인하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10대 소녀들의 혼란스럽고 불안한 심리 상태를 읽어내고 표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소설이 감동적인 이유는 현실을 문제를 읽어내는 섬세함과 대안을 제시하는 상상력이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적 상상력을 포기하지 않은 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심각한 문제들을 밀도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특히 이 모든 소동과 혼란의 중심에 ‘자살’이라는 쉽지 않은 소재를 끌어들여 그 심각성과 중요성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원인을 제시하고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다소 억지스런 면이 없지 않지만 사회과학 분야의 책이 아니기 때문에 문학적 형상화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다만 하빈이의 생활기록부를 담임의 책상에서 확인하거나 전학 온 학교의 담임을 불러내는 일 등 현실감을 떨어뜨리는 몇 가지 요소가 아쉬웠다.  

  청소년들의 자살은 대입제도 등 사회구조적 문제, 부모들의 양육태도, 주변 환경 등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앞으로 많은 작가들이 좀 더 깊은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주제이다. 무겁고 심각한 소재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작가뿐만 아니라 기성세대 모두가 짊어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청소년 문제는 바로 우리들의 현재이며 미래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 아이들은 안녕하신가?


100314-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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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 여자로 살고 싶은, 하지만 남자라 불리는 열일곱 청춘의 이야기
줄리 앤 피터스 지음, 정소연 옮김 / 궁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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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면서 동성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 적이 있다. 이성과 논리, 말과 글로 표현된 성적(性的) 소수자에 대한 생각과 시각적 이미지로 확인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처럼 낯설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생소함을 아름다운 자연 속에 배치함으로써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대자연 속에 펼쳐지는 두 남자의 사랑은 아름답지만 깊은 슬픔을 토해 냈고, 히스레저의 사망으로 영화에 대한 기억은 더욱 비극적으로 남아있다.

  사람들은 흔히 동성애 혹은 트랜스젠더를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보다 지독한 성적(性的) 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전통적인 동양 사회에서는 더욱 심하다. 이 금기에 대한 도전과 사회적 저항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여전히 뜨거운 감자처럼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그들을 이 사회 안에서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 논리와 이성에 앞서 심정적으로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그 편견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자로 살고 싶지만 남자로 태어난 아이는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준다. 그 이름은 『루나』. 밝게 빛나는 태양이 되지 못하고 어둠이 내린 뒤 달빛이 되어야 하는 비극적 운명을 암시하는 듯한 적절한 이름이다. 작가 줄리 앤 피터스는 커밍 아웃한 레즈비언이다. 작가의 직접 체험에서 길어 온 사유의 깊이는 독자들을 충분히 매료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본격적인 자아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어 성인들에게도 많은 고민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그들은 비정상일까? 정상이란 또 무엇일까?

  작가는 태어날 때부터 남자의 몸이었던 불행한 여자 아이의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준다. 남자 아이가 여성적 성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여자 아이가 남자의 몸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어려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야기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편견의 벽과 마주한다.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집단적 성향과 관습의 벽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다는 단순함, 그것은 그럴 것이라는 편견, 예전에도 그랬다는 안일함 앞에서 우리는 좌절할 때가 있다. 더구나 동성애도 아니고 트랜스젠더의 문제는 우리의 가치관과 전통적인 인간 존재에 대한 믿음을 해체한다. 도대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

  어떤 기호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본능과 욕망, 유전적 질서의 힘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혼란스런 마음을 갖고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어렴풋이 그들(트랜스젠더에 대한 거리두기와 가치 판단 미루기를 위한 3인칭)의 존재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가족과 사회 안에서 기대되는 성역할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문화적 관습으로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옳고 그름을 떠나 하나의 질서 속에서 이해하는 거대한 사회적 편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얼마나 다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소설이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트렌스젠더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남자 주인공의 여동생 레이건이 이 소설의 서술자이다. 오빠 리엄과 언니 루나는 같은 사람이다. 한 사람 안에 두 개의 자아를 곁에서 매일 지켜보아야 하는 동생 레이건의 시선은 부모 혹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다르다. 밤마다 잠을 설치며 루나가 되는 오빠의 모습을 지켜보며 리엄은 가짜이고 루나가 진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레이건의 고통은 루나만큼 심각하다. 그래서 이 소설은 관찰자 시점이 아니라 루나와 레이건 두 명이 모두 주인공인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리엄은 현실 속에서 거의 완벽한 남자로 등장한다. 잘생긴 외모와 우수한 학업 성적으로 여학생들에게 늘 인기가 많고 학교에서 인정받는 학생이다. 열 일곱 청춘으로 부족한 것이 없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대와 어머니의 외면 속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는 루나는 리엄의 진짜 모습이다. 아무리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고 해도 루나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더더욱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동생의 도움을 받아 여장을 하고 쇼핑을 하러 나가는 장면은 읽는 사람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사람들의 시선은 마치 독자에게 던져진 편견에 대한 비난처럼 느껴진다. 결국, 리엄은 수술을 결정하고 집을 떠난다. 여동생과 이별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지만 이 소설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특별한 소재와 인상적인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에 의해 서술된 소설이 아니라 한번쯤 우리 모두가 성찰해 보아야 할 문제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소설이다. 나의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관심과 애정을 갖고 그들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들의 의무가 아닐까? 내가 가진 특별한 성격과 취향처럼 선택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좌절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자.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까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주변의 소수자들을 위한 작은 관심 그리고 편견 없이 그들을 대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해할 수 있으나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태도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까. (性的) 소수자 이외에도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배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당연한 의무가 아닐까 싶다. 정확하고 섬세한 표현, 탁월한 심리 묘사, 담담한 문체가 이끌어 낸 아름다운 소설 한 권을 누구에게 권해볼까.


1003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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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빨강 창비청소년문학 27
박성우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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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연두

난 연우다 좋아 초록이 아닌 연두
우물물에 설렁설렁 씻어 아삭 씹는
풋풋한 오이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옷깃에 쓱쓱 닦아 아사삭 깨물어 먹는
시큼한 풋사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한 연두
풋자두와 풋살구의 시큼시큼 풋풋한 연두,
난 연두가 좋아 아직은 풋내가 나는 연두
연초록 그늘을 쫙쫙 펴는 버드나무의 연두
기지개를 쭉쭉 켜는 느티나무의 연두
난 연우가 좋아 초록이 아닌 연두
누가 뭐래도 푸릇푸릇 초록으로 가는 연두
빈집 감나무의 떫은 연두
강변 미루나무의 시시껄렁한 연두
난 연두가 좋아 늘 내 곁에 두고 싶은 연두,
연두색 형광펜 연두색 가방 연두색 팬티
연두색 티셔츠 연두색 커튼 연두색 베갯잇
난 연두가 좋아 연두색 타월로 박박 밀면
내 막막한 꿈도 연둣빛이 될 것 같은 연두
시시콜콜, 마냥, 즐거워하는 철부지 같은 연두
몸 안에 날개가 들어 있다는 것도 까마득 모른 채
배추 잎을 신나게 갉아 먹는 연두 애벌레 같은, 연두
아직 많은 것이 지나간 어른이 아니어서 좋은 연두
난 연두가 좋아 아직은 초록이 아닌 연두


  보기 드문 ‘청소년시집’이 나왔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책을 받아 들고 한참이나 뒤적였다. 최근 청소년 문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출판사마다 청소년 대상 소설이 활발하게 출판되고 있다. 아동 작가와 기성 작가가 청소년 출판 시장에 뛰어들어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만큼 수요가 있고 시장이 형성되어 간다는 말이다. 반가운 일이다. 어린이 문학과 성인 문학의 중간쯤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했던 청소년문학이 자리를 잡아 간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 문학은 곧 청소년 소설로 인식된다. 다양한 갈래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 꾸준히 창작되고 독자들의 관심과 호응이 필요하다. 특히 시의 경우는 청소년 대상 시가 거의 창작되지 않는다. 그래서 박성우의 청소년시집 『난 빨강』은 기념비적인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중앙일간지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은 2009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저작 및 출판 지원사업에 청소년 시가 당선되면서 청소년문학을 시작했다고 한다.

  명확한 시기를 구분할 수 없는 청소년은 어린이와 성인 사이의 미성숙한 인격체를 이르는 말이다. 성인에 가까운 육체적 성숙에 비해 자아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스무살 언저리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 중, 고등학생이 여기에 해당한다. 박성우 시인은 대한민국 청소년이 겪어야 하는 생활 속의 이야기를 세심한 관찰을 통해 발랄하게 표현한다. 채 여물지 않은, 초록이 되지 못한 ‘연두’가 그들의 특징을 시각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아직은, 초록이 아닌 연두.

심부름

누나는 고 삼이다
반에서 일이 등 하는 고 삼이다

그런 누나가 뜬금없이
만두가 먹고 싶다고 해서,
뒤에서 오 등 정도 하는 내가
밤늦게 만두 심부름을 갔다

너무 늦어서 이 골목 저 골목
문 닫지 않은 만두 집을 찾아 헤매다가
큰 사거리 근처까지 나가서 겨우 샀다

만두가 식을까 봐 뛰어서 집으로 갔다

심부름 가서 딴짓하다 늦게 왔다고
엄마한테 잔소리를 잔뜩 들었다

난 뒤에서 오 등이니까,
말대꾸할 힘도 없어서 그냥 잤다


  학교에서 가정에서 청소년들은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의 고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세대이다. 수능으로 대표되는 성적표가 그들의 정체성이다. 고3이 된 공부 잘하는 누나를 위해 만두를 사러 간 동생의 심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이 시는 일상에서 느끼는 청소년들의 심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른들의 시각이 아니라 그들의 처지와 시각에서 바라보면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똑같은 시기를 거쳤으면서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을 향해 아이들은 오늘도 소리없는 아우성을 지른다.

  특히 입시에 대한 스트레스와 수능 결과로 패배감을 맛본 채 스무 살을 시작해야 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안타깝다. 한줄세우기, 승자독식 사회는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의 잘못된 경쟁 구도로 만들어진 기형적 사회 구조를 반영한다. 인간사회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지만 스무살이 되기 전에, 성적만으로 인생의 대부분이 결정되는 사회는 공정하지 못하다. ‘공부기계’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대책은 없는 걸까? 참고 견디라는 말로만 그들을 위로할 수는 없다.

공부 기계

알람 시계가 울린다

고등학교 이 학년인
공부 기계가 깜빡깜빡 켜진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졸린 공부 기계는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간다

공부 기계는 기계답게
기계처럼 이어지는 수업을 기계처럼 듣는다

쉬는 시간엔 충전을 위해
책상에 엎드려 잠시 꺼진다

보충수업을 기계처럼 듣고
학원수업을 기계처럼 듣고
공부 기계는 기계처럼 집으로 간다

늦은 밤 돌아온 공부 기계는
종일 가둥한 기계를 점검하다,

고장 난 기계처럼 껌뻑껌뻑 꺼진다


  모두가 똑 같은 일상을 견뎌내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 공부기계가 하니라 행복한 삶을 꿈꾸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서로 다른 특기와 적성을 살려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가? 21세기가 되어도 대입제도와 교육정책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 오래가지 못할 것 같은 혹독한 경쟁구도는 굳건하다. 이제 그 경쟁이 공정하지도 못한 게임으로 변질되고 있다. 신음하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공부기계가 아니라 ‘난 빨강’이라고 외치는 청소년들의 꿈과 열정에 주목해 보자. 발랄하고 적극적인 아이들,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다양한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학교, 즐겁고 밝은 웃음으로 가득한 가정이 미래의 청소년들에게 가장 중요하다. 3월이 되면 새로운 학년,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 새롭게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묻고 싶다. 넌 빨강이 되고 싶은지.

난 빨강

난 빨강이 끌려 새빨간 빨강이 끌려
발랑 까지고 싶게 하는 발랄한 빨강
누가 뭐라든 신경 쓰지 않고 튀는 빨강
빨강 립스틱 빨강 바지 빨강 구두
그냥 빨간 말고 발라당 까진 빨강이 끌려
빼지도 않고 앞뒤 재지도 않는 빨강
빨빨대며 쏘다니는 철딱서니 같아서 끌려
그 어디로든 뛰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빨강
난 빨강이 끌려, 새빨간 빨강이 끌려
해종일 천방지축 쏘다니는 말썽쟁이, 같은 빨강
빨랑 나도 빨강이 되고 싶어 빨랑
빨랑, 빨강이 되어 싸돌아다니고 싶어
빨빨 싸돌아다니다가 어느새 나도
빨강이 될 거야 새빨간 빨강,
빨강 치마 슈퍼우먼이 될 거야
빨강 팬티 슈퍼맨이 될 거야
빨강 구름 빨강 바다 빨강 빌딩숲 만들러 날아다닐 거야
새빨간 거짓말 같은 빨강,
막대사탕처럼 달달하게 빨리는 빨강,
혀를 내밀면 혓바닥이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을 것 같은 달콤한 빨강
빨-강, 하고 말만 해도
세상이 온통 빨개질 것 같은 끈적끈적한 빨강


  박성우의 시는 청소년들이 겪는 거의 모든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내용과 소재면에서 그들의 생활과 밀착되어 있다. 학교와 가정 그리고 사회에서 겪게 되는 성적, 가족, 이성친구, 사춘기, 컴퓨터, 노래방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가감없이 그려진다. 시가 아니라 마치 시트콤을 보는 것처럼 재밌고 즐거운 감동을 주는 청소년시집이다.

  다소 딱딱하고 무거울 수 있는 소재를 경쾌하고 즐겁게 엮어내는 솜씨가 뛰어나다. 청소년들은 시가 어렵지 않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어른들은 그들의 생각과 고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수 있는 시집이다. 이 책을 통해 청소년시집이 활성화되고 보다 많은 시인들이 그들의 고민과 생각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국어 선생님

내가 가진 책들은
어떤 페이지를 펴보아도
온통 국어 선생님 얼굴만 보여준다
책 속에서 아른아른, 또렷하게 나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준다

찰싹, 내가 내 뺨을 치며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국어 선생님은 책 속에서 잠깐 사라진다

그러다가는 금세 또 또렷하게 나타나는
내 사랑 국어 선생님은,
내가 펼치는 모든 교과서와 참고서에서 나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고는
나를 등 뒤에서 꼭 껴안아 준다

찰싹, 정신을 바짝 차리려
찰싹찰싹, 내가 내 뺨을 때리고는
얼얼해진 뺨을 가만히 어루만지다 책을 들면

어느내 나는 또, 국어 선생님과 검푸른 바닷가에 있다

말똥말똥 멀뚱멀뚱 내려온 뭇별들과
찰바당찰바당 바다를 거니는 달이 있는 바닷가,
모래밭에 나란히 앉은 내 사랑 국어 선생님이
간질간질 달콤한 귓속말을 해온다 나도 사랑해,

책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100307-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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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yur 2010-03-09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간만에 통쾌, 상쾌한 시편들을 마주 대하니
문학의 힘이 느껴집니다. 나이를 떠나서 공감할 수 있는 편편들이었습니다.
박성우 시인께 감사드립니다.^^
작가란 인간의 마음을 건드리는 마술사라는 생각이 드네요.


sceptic 2010-03-28 22:53   좋아요 0 | URL
저도 즐겁게 아주 잘 읽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잘 짚어내서 공감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내가 살던 용산 평화 발자국 2
김성희 외 지음 / 보리 / 2010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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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농부의 졸라맨 허리에도
제 온몸을 팔아 한 몫의 인간이고자
고개 쳐들면 꺾이고 마는 노동자에게도

그 허리에 재물 올려 도둑놈도 얼씬 못하게
가시철망 두룬 재벌의 담벼락에도
그들돠 한패되어 시시때때 벌이는 쇼
고관대작들의 평화통일 축제에도 있다.
있다. 있다. 어디에도 있다. 아아아...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은 아냐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은 아냐

- 안치환, 5집 Desire


  깊은 밤에 만화책을 읽다가 눈가에 눈물이 맺혀 천장을 오래 보아야 했다. 하종강은 ‘부채감’ 때문에 노동운동에 투신했다는데 우리는 그 ‘부채감’ 조차 느끼지 못한 채 이 시대를 건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역사는 무어라고 기록할 지 자못 궁금하다. 먼 훗날 2009년 1월 20일 용산 참사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총리와 서울 시장의 형식적인 사과와 대책 협의가 이루어지고 1년 만에 장례를 치르는 동안 다섯 명의 철거민은 구천을 떠돌았다. 누구와 왜 싸웠는지 모른다. 그들은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죽었다.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모호하다.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중형을 선고 받았다. 과연 용산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여섯 명의 만화가가 그린 『내가 살던 용산』은 용산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숨을 거둔 다섯 명의 혼을 위로하는 듯하다. 그들은 왜, 어떻게 그곳에 있었으며 그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끔찍한 뉴스로 생각하기 쉽다. 사건의 진실에는 관심이 없고 현상과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는 세태는 하루 이틀도 아니지만 그마저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언론의 행태는 참사보다 끔찍하다. 도대체 용산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상림(72세), 양회성(58세), 이성수(51세), 한대성(54세), 윤용헌(49세).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들이 그곳에 가는 과정은 신산스런 삶을 살아가던 순박한 우리 이웃들의 생활을 그대로 보여준다. 돈이 없어 어려운 생활을 꾸렸던 사람들, 장사가 잘 되다가 보증금에 대출금까지 건질 수 없게 된 사람들, 혼자 힘으로 견디기 어려워 힘을 나누던 사람들……. 죽을 정도로 잘못을 한 사람들일까? 경찰 특공대가 투입되어 진압할 정도로 위험한 폭도들이었을까? 왜 살기위해 국가권력이나 자본과 싸워야 하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자.

  이 책을 쓴 만화가들은 용산 망루에서 숨을 거둔 유가족과 철거민을 직접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다. 꺼내고 싶지 않은 상처를 드러내야 하는 가족들과 그것을 그리고 써야 하는 만화가들의 만남이 아프게 느껴진다. 한 컷 한 컷 정성스럽게 만화를 보다가 글보다 감동적인 그림을 만나기도 했고 그림의 감동을 뛰어넘는 대사를 만나기도 했다.

  행간을 뛰어넘는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책읽기의 즐거움이라면 컷과 컷 사이의 빈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워나가는 것이 만화의 즐거움이다. 김수박의 ‘철거민’, 유승하의 ‘잃어버린 고향’, 신성식의 ‘던질 수 없는 공’, 김성희의 레아호프, 그들이 만든 희망, 앙꼬의 ‘상현이의 편지’, 김홍모의 ‘망루’ 와 용산 참사일지로 구성된 『내가 살던 용산』은 전국민 필독서로 권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21세기가 되었지만 30여년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현실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괴감. GNP가 높아지고 빛의 속도로 과학기술이 발달했지만 우리 현실은 아니 가난한 이웃과 없는 사람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함께 어깨 겯고 웃음과 행복을 나눌 수는 없는 것일까?

  앙꼬의 ‘상현이의 편지’는 고(故) 이성수씨의 아들 입장에서 서술된다. 다른 만화보다 특히 긴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부모와 이 시대를 어떻게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들에게 남겨진 상처와 아픔을 누가 보듬어 줄 것인가. 한 시대를 공유한다는 것은 시대의 아픔과 구성원의 고통을 함께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관심과 따뜻한 정성이다. 진실을 알고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용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철거민이 그랬던 것처럼.


100305-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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