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빨강 창비청소년문학 27
박성우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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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연두

난 연우다 좋아 초록이 아닌 연두
우물물에 설렁설렁 씻어 아삭 씹는
풋풋한 오이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옷깃에 쓱쓱 닦아 아사삭 깨물어 먹는
시큼한 풋사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한 연두
풋자두와 풋살구의 시큼시큼 풋풋한 연두,
난 연두가 좋아 아직은 풋내가 나는 연두
연초록 그늘을 쫙쫙 펴는 버드나무의 연두
기지개를 쭉쭉 켜는 느티나무의 연두
난 연우가 좋아 초록이 아닌 연두
누가 뭐래도 푸릇푸릇 초록으로 가는 연두
빈집 감나무의 떫은 연두
강변 미루나무의 시시껄렁한 연두
난 연두가 좋아 늘 내 곁에 두고 싶은 연두,
연두색 형광펜 연두색 가방 연두색 팬티
연두색 티셔츠 연두색 커튼 연두색 베갯잇
난 연두가 좋아 연두색 타월로 박박 밀면
내 막막한 꿈도 연둣빛이 될 것 같은 연두
시시콜콜, 마냥, 즐거워하는 철부지 같은 연두
몸 안에 날개가 들어 있다는 것도 까마득 모른 채
배추 잎을 신나게 갉아 먹는 연두 애벌레 같은, 연두
아직 많은 것이 지나간 어른이 아니어서 좋은 연두
난 연두가 좋아 아직은 초록이 아닌 연두


  보기 드문 ‘청소년시집’이 나왔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책을 받아 들고 한참이나 뒤적였다. 최근 청소년 문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출판사마다 청소년 대상 소설이 활발하게 출판되고 있다. 아동 작가와 기성 작가가 청소년 출판 시장에 뛰어들어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만큼 수요가 있고 시장이 형성되어 간다는 말이다. 반가운 일이다. 어린이 문학과 성인 문학의 중간쯤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했던 청소년문학이 자리를 잡아 간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 문학은 곧 청소년 소설로 인식된다. 다양한 갈래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 꾸준히 창작되고 독자들의 관심과 호응이 필요하다. 특히 시의 경우는 청소년 대상 시가 거의 창작되지 않는다. 그래서 박성우의 청소년시집 『난 빨강』은 기념비적인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중앙일간지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은 2009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저작 및 출판 지원사업에 청소년 시가 당선되면서 청소년문학을 시작했다고 한다.

  명확한 시기를 구분할 수 없는 청소년은 어린이와 성인 사이의 미성숙한 인격체를 이르는 말이다. 성인에 가까운 육체적 성숙에 비해 자아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스무살 언저리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 중, 고등학생이 여기에 해당한다. 박성우 시인은 대한민국 청소년이 겪어야 하는 생활 속의 이야기를 세심한 관찰을 통해 발랄하게 표현한다. 채 여물지 않은, 초록이 되지 못한 ‘연두’가 그들의 특징을 시각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아직은, 초록이 아닌 연두.

심부름

누나는 고 삼이다
반에서 일이 등 하는 고 삼이다

그런 누나가 뜬금없이
만두가 먹고 싶다고 해서,
뒤에서 오 등 정도 하는 내가
밤늦게 만두 심부름을 갔다

너무 늦어서 이 골목 저 골목
문 닫지 않은 만두 집을 찾아 헤매다가
큰 사거리 근처까지 나가서 겨우 샀다

만두가 식을까 봐 뛰어서 집으로 갔다

심부름 가서 딴짓하다 늦게 왔다고
엄마한테 잔소리를 잔뜩 들었다

난 뒤에서 오 등이니까,
말대꾸할 힘도 없어서 그냥 잤다


  학교에서 가정에서 청소년들은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의 고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세대이다. 수능으로 대표되는 성적표가 그들의 정체성이다. 고3이 된 공부 잘하는 누나를 위해 만두를 사러 간 동생의 심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이 시는 일상에서 느끼는 청소년들의 심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른들의 시각이 아니라 그들의 처지와 시각에서 바라보면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똑같은 시기를 거쳤으면서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을 향해 아이들은 오늘도 소리없는 아우성을 지른다.

  특히 입시에 대한 스트레스와 수능 결과로 패배감을 맛본 채 스무 살을 시작해야 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안타깝다. 한줄세우기, 승자독식 사회는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의 잘못된 경쟁 구도로 만들어진 기형적 사회 구조를 반영한다. 인간사회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지만 스무살이 되기 전에, 성적만으로 인생의 대부분이 결정되는 사회는 공정하지 못하다. ‘공부기계’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대책은 없는 걸까? 참고 견디라는 말로만 그들을 위로할 수는 없다.

공부 기계

알람 시계가 울린다

고등학교 이 학년인
공부 기계가 깜빡깜빡 켜진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졸린 공부 기계는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간다

공부 기계는 기계답게
기계처럼 이어지는 수업을 기계처럼 듣는다

쉬는 시간엔 충전을 위해
책상에 엎드려 잠시 꺼진다

보충수업을 기계처럼 듣고
학원수업을 기계처럼 듣고
공부 기계는 기계처럼 집으로 간다

늦은 밤 돌아온 공부 기계는
종일 가둥한 기계를 점검하다,

고장 난 기계처럼 껌뻑껌뻑 꺼진다


  모두가 똑 같은 일상을 견뎌내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 공부기계가 하니라 행복한 삶을 꿈꾸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서로 다른 특기와 적성을 살려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가? 21세기가 되어도 대입제도와 교육정책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 오래가지 못할 것 같은 혹독한 경쟁구도는 굳건하다. 이제 그 경쟁이 공정하지도 못한 게임으로 변질되고 있다. 신음하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공부기계가 아니라 ‘난 빨강’이라고 외치는 청소년들의 꿈과 열정에 주목해 보자. 발랄하고 적극적인 아이들,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다양한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학교, 즐겁고 밝은 웃음으로 가득한 가정이 미래의 청소년들에게 가장 중요하다. 3월이 되면 새로운 학년,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 새롭게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묻고 싶다. 넌 빨강이 되고 싶은지.

난 빨강

난 빨강이 끌려 새빨간 빨강이 끌려
발랑 까지고 싶게 하는 발랄한 빨강
누가 뭐라든 신경 쓰지 않고 튀는 빨강
빨강 립스틱 빨강 바지 빨강 구두
그냥 빨간 말고 발라당 까진 빨강이 끌려
빼지도 않고 앞뒤 재지도 않는 빨강
빨빨대며 쏘다니는 철딱서니 같아서 끌려
그 어디로든 뛰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빨강
난 빨강이 끌려, 새빨간 빨강이 끌려
해종일 천방지축 쏘다니는 말썽쟁이, 같은 빨강
빨랑 나도 빨강이 되고 싶어 빨랑
빨랑, 빨강이 되어 싸돌아다니고 싶어
빨빨 싸돌아다니다가 어느새 나도
빨강이 될 거야 새빨간 빨강,
빨강 치마 슈퍼우먼이 될 거야
빨강 팬티 슈퍼맨이 될 거야
빨강 구름 빨강 바다 빨강 빌딩숲 만들러 날아다닐 거야
새빨간 거짓말 같은 빨강,
막대사탕처럼 달달하게 빨리는 빨강,
혀를 내밀면 혓바닥이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을 것 같은 달콤한 빨강
빨-강, 하고 말만 해도
세상이 온통 빨개질 것 같은 끈적끈적한 빨강


  박성우의 시는 청소년들이 겪는 거의 모든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내용과 소재면에서 그들의 생활과 밀착되어 있다. 학교와 가정 그리고 사회에서 겪게 되는 성적, 가족, 이성친구, 사춘기, 컴퓨터, 노래방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가감없이 그려진다. 시가 아니라 마치 시트콤을 보는 것처럼 재밌고 즐거운 감동을 주는 청소년시집이다.

  다소 딱딱하고 무거울 수 있는 소재를 경쾌하고 즐겁게 엮어내는 솜씨가 뛰어나다. 청소년들은 시가 어렵지 않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어른들은 그들의 생각과 고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수 있는 시집이다. 이 책을 통해 청소년시집이 활성화되고 보다 많은 시인들이 그들의 고민과 생각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국어 선생님

내가 가진 책들은
어떤 페이지를 펴보아도
온통 국어 선생님 얼굴만 보여준다
책 속에서 아른아른, 또렷하게 나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준다

찰싹, 내가 내 뺨을 치며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국어 선생님은 책 속에서 잠깐 사라진다

그러다가는 금세 또 또렷하게 나타나는
내 사랑 국어 선생님은,
내가 펼치는 모든 교과서와 참고서에서 나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고는
나를 등 뒤에서 꼭 껴안아 준다

찰싹, 정신을 바짝 차리려
찰싹찰싹, 내가 내 뺨을 때리고는
얼얼해진 뺨을 가만히 어루만지다 책을 들면

어느내 나는 또, 국어 선생님과 검푸른 바닷가에 있다

말똥말똥 멀뚱멀뚱 내려온 뭇별들과
찰바당찰바당 바다를 거니는 달이 있는 바닷가,
모래밭에 나란히 앉은 내 사랑 국어 선생님이
간질간질 달콤한 귓속말을 해온다 나도 사랑해,

책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100307-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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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yur 2010-03-09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간만에 통쾌, 상쾌한 시편들을 마주 대하니
문학의 힘이 느껴집니다. 나이를 떠나서 공감할 수 있는 편편들이었습니다.
박성우 시인께 감사드립니다.^^
작가란 인간의 마음을 건드리는 마술사라는 생각이 드네요.


sceptic 2010-03-28 22:53   좋아요 0 | URL
저도 즐겁게 아주 잘 읽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잘 짚어내서 공감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