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커 (양장) - 제3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배미주 지음 / 창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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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중엽, 유럽연합과 미국 등이 강대국에 대항해 출범한 동아시아연합은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른 지구를 벗어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을 수 있을지 모색하기 시작했다. - P. 7

미래는 알 수 없는 법. 꿈꾸고 상상하고 의심하라.

  시험 전날, 학교에 불이 나거나 갑자기 휴교를 하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황당한 상상을 하며 혼자 웃곤 한다. 유리벽 안에 갇힌 사차원의 세계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일코(일반인 코스프레)’에 가담한다. 평범하게 웃고 떠들고 보조를 맞추며 들키지 않고 엉뚱한 상상과 공상을 즐긴다. 정도의 차이가 조금 있을 뿐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각자 현실에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사람들은 정말 현실세계만을 받아들이고 사는 걸까?

  영화 <매트릭스>를 보며 장자의 ‘나비’를 떠올린 관객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만큼이나 모호한 삶의 죽음의 경계. 초등학교 시절 밤에 잠들지 못하고 혼자서 고민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대로 잠이 들면 그대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밤이 되면 또다시 죽음의 세계로 넘어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한참이나 뒤척였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그때는 꽤나 심각했던 고민이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현실과 꿈의 세계를 혼동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구운몽’의 성진이 처럼 지금 잠시 양소유의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고 모든 욕망을 충족시킬 수는 없지만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그것이 꿈이 아닐까. 지구별로 잠시 여행을 온 우리들의 덧없는 삶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조금씩 그 이유가 다르다. 나는 무엇이 집착하고 있는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상, 황당한 공상이 얼마든지 즐겁게 펼쳐질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소설이다. SF, 미래소설, 공상과학 등으로 명명되는 이런 종류의 서사를 즐기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즐겼을 이야기가 우리 문학에서는 정통 소설의 주변에 머물며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무협지 혹은 환타지와 구별되는 영역을 구축하며 과학의 발전을 예견하기도 했고 미래의 삶을 추측하기도 하며 사람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주고 있는 분야지만 우리의 문학적 풍토에서는 설 자리가 많지 않았다.

  창비청소년문학상의 세 번째 소설로 선택된 배미주의 『싱커Syncher』는 『위저드 베이커리』와 유사하게 비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을 다루고 있지만 미래사회를 그린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문학적 상상력을 일궈낸 가상의 미래도시 ‘시안’은 지하세계에 건설된 유토피아이다. 수많은 영화에서 확대재생산하고 대부분 미래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 최근에 나온 『2058 제너시스』 - 이상사회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반영한다. 하지만 그곳은 완벽한 세상이 아니라 디스토피아에 대한 경고에 불과하다.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바라볼 수 있지만 보다 나은 세상은 ‘자연’스럽지 않은 곳이다. 자연에 대한 끝없는 도전과 지칠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이 초래할 미래는 굳이 소설이 아니어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완벽한 인공도시에서 ‘자연’에 접속(sync)한다. 게임을 테스트한다는 명목이지만 경험하지 못한 자연 즉, 동물의 감각을 가상현실에서 간접경험하게 되는 주인공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동시에 경험하며 세상을 낯설고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부정적 관점이 아니라 비판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지 않으면 우리는 바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믿고 보이는대로 판단한다. 이성적 판단력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리를 스스로 갖추지 않는다면 편협한 이기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작가는 청소년들에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상상력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자라고 있는지 의문이지만.

  하층계급에 속한 미마가 신분상승을 위한 유일한 수단인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스마트약’을 찾는 사건의 출발은 우리들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현실에 대한 의심과 상상력이 결여된 무조건적 복종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각개전투로 우리는 결코 행복한 미래도 즐거운 인생도 얻을 수 없다. 이 소설은 220여페이지의 짧은 분량에 수많은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 복잡하다. 새롭고 흥미진진한 스토리도 아니고 충분히 예측 가능한 전개와 결론이 아니어서 아쉽다. 극적 반전이나 깜짝 놀랄만한 클라이맥스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청소년들이 읽기에는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치명적이고 단순한 평가를 받을 우려가 있어 아쉽다.

  현재든 미래든 소설은 결국 인간의 문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싱커’를 하게 된 후로 미마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깨달았다. 아니, 모든 생물이 서로에게 외계였다. 지식은 결코 '이해'가 아니었다. - P. 71

그것은 특별한 자든 평범한 자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 - 이해받고 함께하고 싶은 욕망때문이었을 것이다 - P.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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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라이어 - 성공의 기회를 발견한 사람들
말콤 글래드웰 지음, 노정태 옮김, 최인철 감수 / 김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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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라이어
out · li · er/-,li(ə)r/명사
1. 본체에서 분리되거나 따로 분류되어 있는 물건.
2. 표본 중 다른 대상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통계적 관측치.


  차고 넘치는 자기계발서의 홍수 속에 살아야 하는 시대는 슬픔이다. 무한 경쟁, 승자독식시대를 살아야하는 신자유주의의 국민들은 한 순간도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배워야하고 자신의 상품 가치를 높여야만 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수많은 성공신화는 대중들에게 꿈이고 희망이다. 현실에서 벗어나 미래를 꿈꾸는 것은 보다 나은 풍요와 물질적 보상을 의미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자기계발서 알레르기가 있어 거의 손도 대지 않는 것도 일종의 편견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편견은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위무하며 살다가 가끔 좋은 책을 놓치기도 한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가 바로 그런 책이다. 책은 나름의 운명을 타고 태어난다고 하지만 이 책과의 만남이 특별하지는 않다. 우연히 얻게 된 책을 오래 두었다가 꺼내 읽었다. 성공하기 위한 노력, 자신을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려는 욕망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하지만 이 책은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이미 성공한 사람들의 특별함을 이야기하는 책도 아니고 천재성을 흉내 내자고 부추기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사람들의 생각의 오류를 짚어낸다. 성공한 사람들은 어떻게 성공했을까?

  모든 사람이 호기심을 가질만한 이야기로 이목을 집중시키고 그 이유를 색다른 방식으로 풀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이런 종류의 대중서가 갖추어야 할 덕목인 흥미, 간결한 문장, 공감, 새로움 등을 골고루 갖추고 있어 대박을 터트린 것이 아닐까 싶다. 성공에 대한 욕망과 성공에 숨어 있는 비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성공의 기준과 방향이 다르고 과정과 결과가 다를 뿐이다. 이 책에서는 빌게이츠와 비틀즈는 천재가 아니라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1만 시간’ 연습생 과정을 거친 사람임을 증명한다. 다만 1만 시간을 위한 환경과 기회 그리고 스스로의 노력은 기본이지만.

우리는 사람들에게 너무 성급하게 실패의 딱지를 붙인다. 또한 우리는 성공한 사람은 지나치게 추앙하는 반면, 실패한 이들은 가혹하게 내버린다. 성공하지 못한 이들에게 불리한 잣대를 들이댔으면서도 말이다. 우리는 누가 성공하고 누가 그렇지 못할지를 결정하는 우리의 역할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쉽게 간과해버린다(여기서 '우리'는 '사회'를 뜻한다) - P. 47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따뜻한 마음을 나눌 줄 알고 이웃을 생각하고 모두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이 진정한 성공을 거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1%도 안 되는 사람들의 삶은 흥미롭지도 부럽지도 않았다. 내가 그만한 그릇이 되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성공에 대한 신화와 끝없는 욕심이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신화를 양산하고 영웅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성공한 사람들은 그저 우연에 기댄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바로 이런 점을 누구보다도 좀 더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1부 ‘기회에’서 마태복음 효과를 통해 먼저 태어났을 뿐인 하키선수와 축구선수들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노력하지 않는 천재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평범한 진리 그리고 환경의 중요성이 저자가 주장하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 평범해서 당연한 이야기들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믿고 싶은 ‘신화’를 깨뜨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결국 ‘성공신화’는 모든 사람에게 맹목적인 꿈이어서도 안되고 실패한 사람들을 위한 자기 위안이어서도 안 된다. 성공은 여러 가지 기회와 문화적 유산이 결합된 지극히 우연한 결과물일 수도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으로 읽힌다.

  뒤집어 읽으면 성공하기 위해 몸부림치지 말지어다. 그래도 성공하고 싶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고 타고난 능력을 믿고 미친듯이 한 분야에 10년 정도의 노력을 쏟는 것이 기본이다. 여기에 적절한 문화적 유산이 결합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성공의 길은 보장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많은 돈을 벌고 권력을 얻고 명예를 쌓는 것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한다. 이 기준에 동의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지식이고 분석이다.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을 가르는 그 작은 차이는 결국 타고나는 것보다 후천적인 노력과 선택과 용기가 아닐까 싶어진다. 그래서 저자는 아웃라이어는 아웃라이어가 아니라는 역설로 이 책을 맺는다.

슈퍼스타 변호사와 수학 천재, 소프트웨어 기업가는 얼핏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에서 벗어난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역사와 공동체, 기회, 유산의 산물이다. 그들의 성공은 예외적인 것도 신비로운 것도 아니다. 그들의 성공은 물려받거나, 자신들이 성취했거나 혹은 순전히 운이 좋아 손에 넣게 된 장점 및 유산의 거미줄 위에 놓여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을 성공인으로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요소였다. 아웃라이어는 결국, 아웃라이어가 아닌 것이다. - P.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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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세상 - 위기의 시대를 좌우할 열쇳말
박성민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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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확실성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이것을 인간의 패배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반대라고 믿는다. - 일리야 프리고진, <확실성의 종말>

 ‘삶을 지배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행운Vitam regit fortuna, non sapientia’이라는 키케로의 말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행운은 우연의 다른 말이 아닐까?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모두 인과관계의 틀 속에서 해석이 가능하다면 삶은 정교한 퍼즐과 같아서 수학적 연산과 논리적 예측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물론 그렇지 않다. 세상은 불확실하고 삶은 불안하다. 우연과 행운에 기대어 사는 것이 인간이 숙명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예측 가능한, 안전한, 확실한 삶을 꿈꾼다.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는 어리석음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점점 더 불안하고 피곤하다.

  인간의 역사는 이와 같은 불확실성을 줄이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리야 프리고진의 말대로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확실성’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일지 모른다. 알 수 없는 미래, 불안한 확증은 어차피 모든 변화 가능성을 내포한 말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배원리가 모든 불확실성을 담고 있다. 인간은 그 불확실성에 끝없이 도전해 왔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쪽으로 문명은 발달해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삶이 예측 가능해진 것도 아니고 평화롭고 안정된 방향으로 진화해 온 것도 아니다. 세상은 변함없이 불안하며 예측할 수 없다.

  『불확실한 세상』은 현대 사회에 대한 진단이면서 과거와 미래 사회에 대한 해석이다. 열 명의 각 분야 전문가가 보여주는 ‘불확실성’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원인과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독자들에게 되묻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반성이며 모르고 있는 분야에 대한 성찰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들에 대한 지적 통찰을 위해 준비된 책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정치, 경제, 문화, 지구, 과학과 기술 분야 등 5개 분야에 각각 2명의 전문가가 ‘불확실성’을 주제로 쓴 글을 모은 책이다. 서문에 밝히고 있듯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소개한 내용을 조금 더 확대 발전시키면 한 권의 책으로도 손색이 없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각론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들이 하나의 주제로 모여 흐르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따로 또 같이’ 읽기 좋은 책이다. 순서나 계통이 필요한 읽기가 아니라 입체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를 생각하며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면서 읽어야 하는 책이기도 하다. 관련 분야에 대한 충실하고 깊이 있는 관심과 공부는 물론 독자들의 몫이다. 어찌 보면 수박 겉핥기식으로 해당 분야에 대해 제반 소개로 그칠 수 있는 단점도 안고 있다. 이런 종류의 책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제한된 분량 안에서 충분한 고민과 정밀한 글쓰기를 통해 이러한 단점을 극복해 내고 있다.

정치란 '불확실'을 '확실'로 바꿔 대중들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도록 '가시거리'를 확보해 주는 기술인 것이다. 좋은 정치란 대중이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하도록 새벽에 쓰레기를 몰래 치우는 청소차와 같은 것이다. - P. 29

  대한민국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가지고 있는 혐오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국민위에 군림하고 권력집단이 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고 이권에 개입하는 협잡꾼에 불과한 정치인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정책 방향과 정권이 바뀌고 나면 또 다시 뒤집어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시궁창의 쥐새끼만도 못한 이념 논쟁과 지역감정 부추기기로 일관하며 정책은 없고 선거의 몰이배만 있는 정치판을 보며 우리는 어떤 미래를 꿈꾸고 어떤 세상을 예상할 수 있겠는가.

  한국 사회에서 아마도 가장 불안한 분야가 정치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책은 정치에서 출발한다. 박성민은 “사회가 개인의 감정이나 판단 혹은 도덕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움직여야 미래를 안정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공감이 가는 말이다. 우리의 정치 현실은 양지로 나온 조폭과 유사하다.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공천 여부가 결정되고 지역색이 뚜렷하며 소신도 정책도 없이 오로지 당선가능성만을 점친다. 선출직 정치인의 경우 당연한 현실이겠지만 상식도 없고 자신의 말고 행동이 끊임없이 모순되는 정치인들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정치를 외면하고 현실을 부정한다.

  『야성적 충동』, 『블랙스완』, 『넛지』 등 최근 경제학의 ‘불확실성’에 주목한 많은 책들을 토대로 한 박종현과 최정규의 글은 정확하고 날카롭다. 우리에게 정치보다 훨씬 피부에 와 닿는 경제현실은 ‘불확실성’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고 실감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분야이다. 리스크와 불확실성에 대한 저자의 용어정리를 살펴보면 왜 사람들의 경제행위가 논리가 아닌 감정과 직감에 의해 결정되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의외로 구멍이 많은 존재이다. 수많은 지식과 논리로 무장하고 있는 것 같지만 세상을 변화시키고 움직이는 힘은 여전히 감정과 직관에 의한 판단일지도 모른다.

리스크(주사위 도박)란 무엇이 일어날지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그 확률 분포를 알고 있는 경우를 지칭하는 용어임에 반해, 불확실성(주식 투자)이란 일어날 개연성은 있으나, 그 확률 분포를 알지 못하는 경우를 지칭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 P 92

실물 자산이나 금융 자산에 투자를 하거나 직장을 바꾸거나 결혼을 고려하는 등의 불확실한 상황에서 논리가 아닌 '감정'과 '직감이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 P 93


  문화뿐만 아니라 전지구적인 불확실성은 환경, 과학, 기술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래서 광우병, 유전자 조작 식품(GMO) 등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지만 우리의 불안은 오히려 증폭될 뿐이다. 석유의 고갈, 지구 온난화 등 과학과 환경 분야의 불확실성은 오히려 고조하고 있다.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지속적으로 나아졌다고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손 놓고 앉아 당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강양구의 말대로 사랑과 우애 그리고 연대를 직접 실천하는 길만이 인간의 길이다.

  세상은 불안하고 불확실한 곳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그 불확실성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살펴보는 일은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불확실한 세상을 확실한 세상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불안을 덜어주고 함께 손잡고 걸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확실한 방법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조금 더 가까이, 그리고 냉정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삼과 세상을 바라보자. 함께 걷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조금은 위안이 되고 덜 불안할 것이다.

불확실한 세상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가장 큰 선물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잠시 잊고 살았던 사랑, 우애, 연대 등의 가치를 떠올리고 직접 실천할 수 있는 기회이다 - P.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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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문학과지성 시인선 37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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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일찍 쓰련다. 찬란했다고.

차가운 물의 명백함을, 물이 들어 지워지지 않는 그 격렬한 시간들을 차마 어떻게 마주한 것인지. 균형이었는지. 전부였는지. 그러므로 조금 미리 쓰련다. 당신도 찬란했다면 당신 덕분에 찬란했다고.


  한 편의 시와 다르게 한 권의 시집을 읽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와 무게로 다가온다. 한 편의 시는 낱낱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지만 한 권의 시집은 전체 의미를 드러내는 유기체와 같이 시인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 긴 호흡으로 풍부한 소리를 내는 교향악과 같다. 한 편의 시가 기교를 뽐내는 독주와 같다면 한 권의 시집은 다양한 인물 군상을 드러내는 대하소설과 같다. 그래서 한 시인의 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집을 읽고 또 그 다음 시집을 읽으며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즐거움을 맛보아야 한다.

  창비에서 나온 『바람의 사생활』과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찬란』은 시세계의 차이와 변화보다 시간의 흐름과 출판사의 이미지가 달라졌을 뿐인 것 같다. 예전에 참여와 순수 문학을 대표하던 출판사의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특성이 모호해진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이병률의 새 시집 『찬란』은 시집 뒷면의 시인의 시작노트처럼 우리들 삶의 ‘찬란’에 대해 적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너무 이르다고 해서 찬란하며 너무 늦었다고 해서 찬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찬란은 생의 매순간마다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에 대한 헌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찬란’은 언제였을까? 매순간 찬란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어느 한 순간, 지나고 나면 그 때가 찬란했음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눈에 뭔가 들어가 있다. 괜히 필요하지도 않은 눈물을 흘렸고 그것도 모자라 인공 눈물까지 샀다. 병원은 커다란 안경을 통해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유리 조각이 박혀 있다고 했다.

- ‘내가 본 것’ 중에서

  시는 지독히 주관적인 영역의 문학이다. 그래서 시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눈에 박힌 유리조각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나 타인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고 생각하지만 손톱만한 자신의 실수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다. 스스로 삼가고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동일한 사건과 사물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기억은 더욱더 그러하다. 내가 본 것은 내 안에서 다른 일과 사물과 사건이 된다. 그래서 내가 본 것은 언제나 불안하기만 하다. 나와 타인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내 눈과 기억과 판단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눈은 ‘내가’라는 수식어가 주는 의미를 다시 확인하게 한다. 주관적 판단과 사물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표현하더라도 그것이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주관이 아니라 객관적 정서와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안

혹시 이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안에 있다
안에 있지 않느냐는 전화 문자에
나는 들킨 사람처럼 몸이 춥다

나는 안에 살고 있다
한시도 바깥인 적 없는 나는
이곳에 있기 위하여
온몸으로 지금까지 온 것인데

문자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혹시 여기 계신 분이 당신 맞습니까

나는 여기 있으며 안에 있다
안쪽이며 여기인 세계에 붙들려 있다

나는 지금 여기 있는 숱한 풍경들을 스치느라
저 바깥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여기 있느냐 묻는다

삶이 여기에 있으라 했다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그렇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나는 안에 있는 사람이다. 끝없이 밖을 지향하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안이 편하고 좋다. 밖에서 안을 지향하는 사람도 있고 밖에 있는 것을 만족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안’이 있고 ‘밖’이 있다. 우리가 어디서 삶의 의미를 찾고 ‘당신’을 찾을 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안의 세계가 진정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찬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생이 찬란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당신의 모든 생이 찬란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고 한 것은 아닐까? 오월의 녹음은 눈이 부시다. 창 밖의 나무들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도 찬란하고 눈부신 햇살은 더더욱 찬란하다. .내 생의 찬란함, 아니 우리 모두의 찬란함을 위하여 이병률의 시집 한 권과 작은 마음의 여유를 준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은 밤이다.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 중략 ……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 ‘찬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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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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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문제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담아낼 수 있느냐에 따라 소설은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의 범위를 넘어선다. 때로는 『소피의 세계』처럼 철학이 소설의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하고 서사 구조를 빌어 다양한 형식의 학문 영역이 융합되기도 한다. 그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이 펼쳐진다는 것은 소설의 재미가 갖는 매력 때문이다. 어찌됐든 소설은 여전히 사람과 삶에 대한 가장 깊은 고민과 통찰을 제공한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와 역사가 보여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변주하며 현실과 미래를 조망하기도 하고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따라서 모든 소설은 인간의 삶이며 역사이고 미래이다.

  미래 사회를 다룬 고전으로 올더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1984』 등을 들 수 있다. 쥘 베른의『지구속 여행』은 SF 소설의 고전으로 손꼽을 만하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시하는 데 소설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다. 얼마든지 상상하고 창조하고 파괴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가의 창조력 상상력은 『해저 2만리』처럼 미래를 예견하고 과학의 발달을 선도하며 인간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이 멀지 않아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이성적 존재인 인간의 지식과 과학기술은 끝없는 문명의 진보를 초래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변함이 없다.

  네덜란드의 작가 버나드 베켓의 소설 『2058 제네시스』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을 쏟아낸다. <공각기동대>가 보여주는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의 미래사회 때문에 두려움은 물론 혼란스런 의문들을 가진 적이 있다. 충격적이기까지 했던 기억이 수많은 영화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질문에는 답이 없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기계의 차이가 단순히 뼈와 살과 피로 구분할 수 있는가. 과학적 경계를 넘어 존재론적 의문들에 대해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 소설은 독특한 형식과 깊이 있는 내용으로 이런 문제들에 대한 독자들의 깊은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미래 사회에 실현했다는 발상이 재미있는 소설이다. <허생전>의 ‘빈섬’이나 <홍길동전>의 ‘율도국’과 유사한 유토피아가 건설된 미래 사회는 행복할까? 세상과 단절된 후 신분과 계급에 맞게 완벽한 시스템 속에 갇힌 사람들의 삶은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 작가는 가상의 유토피아를 만드는 일에는 서툴다. 서양의 고전철학에서 그 이상을 가져와 플라톤의 이데아를 실현하는 듯하지만 시스템을 감독하고 통제하고 지배하는 자들의 세계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음모와 함정을 숨기고 있다.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은 완전할 수 없고 어둠과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다. 완벽한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그곳은 어쩌면 영원히 인간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복잡하고 완벽해 보이는 시스템에도 균열이 일어나며 그 작은 틈은 나비효과를 가져온다.

역사는 우리에게 음모이론의 무용성을 보여줍니다. 복잡한 것은 실수를 낳게 되고, 그런 실수 속에 편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 P. 49

  이 소설은 철저하게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험관과 아낙시맨더의 대화는 단순한 외화에 불과하다. 학술원에 들어가려는 아낙시맨더의 준비와 사유의 틀은 결국 전체 시스템의 균열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소설은 끝난다. 극적인 반전과 서스펜스를 즐기기 위한 소설이 아니다. 결론을 말한다고 해서 재미가 반감되는 것도 아니다. 이 소설은 시스템에 도전하는 아담과 인공지능 로봇 아트가 주인공이다. 둘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야말로 이 소설의 팽팽한 긴장의 끈이다. 인간과 로봇의 차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아담의 입을 통해 작가는 인간이 이룩한 이성과 합리적 제도 그리고 조직과 시스템을 움직이는 거대한 권력과 음모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연 무엇을 위해 어디까지 개인을 희생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전체주의에 대한 반성에 앞서 개인의 삶과 행복의 의미를 묻고 있는 듯하다. 철학적,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한 성찰과 논쟁으로 이 소설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하게 행복이란 무엇인지,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부호로 읽어도 좋다. 물론 정답은 없다.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른 생각을 가지고 생의 목적과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공통분모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역시 시간이 흐르면,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이 이성을 조금씩 몰아내, 결국 이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죠. 아담은 자기 머리를 믿지만, 결국 마음을 따릅니다. - P. 113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따라가는 존재가 인간이 아닐까? 작가는 이성보다 감성을, 논리보다 직관을 인간의 본능적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모두가 공감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창밖에 연녹색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작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며 인간에게는 인간의 길이 있는 법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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