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이 된 교수, 전원일기를 쓰다
강수돌 지음 / 지성사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마솥에 불을 땐 것처럼, 바람 한 점 없이,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더운 여름날이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뜨거운 대지를 식혀주듯 시원한 비가 내린다. 자연은 늘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말할 수 없는 뜨거운 욕망과 견딜 수 없는 고통도 시간과 자연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렇게 다 지나간다.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삶에서 조금만 비껴 서 보자. 그것을 객관적 거리라고 해도 좋고 성찰의 시간이라고 해도 좋다.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아닌가. 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저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졸릴 때 잠을 자고 놀고 싶을 때 놀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 아닌가.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도시의 생활을 견뎌내는 현대인의 삶은 고달프다. 농촌에서 도시로,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나는 오늘도 흙냄새 한 번 맡아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문명화의 길은 편리와 효율을 선물한 대신 환경을 파괴하고 인위적인 행복을 만들어야 하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가장 본질적인 삶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으면 우리는 방향을 잃고 어둠속을 헤맬지도 모른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진정한 내 안의 욕망과 희망을 가져보지도 못한 채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가는 것만큼 큰 비극도 없다. 이렇게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날 저녁에는 잠시 주변을 돌아보자.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떠오르는 사람이 몇 명쯤 있을 것이다. 장일순, 이오덕, 권정생, 윤구병, 전우익, 황대권, 법정, 헬렌과 스콧 니어링 등 맥락없이 떠오르는 이름들이 많다. 강수돌을 처음 만난 것은 『나부터 교육혁명』이라는 책이었다. ‘이웃집 엄마’를 조심해야 내 아이를 바로 키울 수 있다는 인상 깊은 충고가 담긴 책이었다. 경쟁과 타율이 아닌 사랑과 자율로 아이를 길러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현실과의 거리감 때문에 많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에 『지구를 구하는 경제책』, 『일중독 벗어나기』,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등의 책을 잇달아 내 놓은 대학교수 강수돌의 이야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장이 된 교수, 전원일기를 쓰다』는 지금까지 강수돌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의 책을 시작하는 입문서로 생각해도 좋고, 그의 책들을 읽어 온 사람이라면 그의 생각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해도 좋다.

노동과 교육과 경제와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것을 잘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강수돌의 이야기는 단순한 책상물림의 사탕발림과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온몸으로 실천하며 자신의 삶을 담아 낸 책이 가장 소중하고도 무섭다. 이 책은 그래서 위대한 사상을 담아냈거나 불변의 진리를 알려주지는 않지만 우리들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준다. 2005년 5월부터 2010년 6월까지 조치원 신안1리 마을 이장으로 활동하며 밥이 똥이고 똥이 밥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확인하며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자. 인근 대학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며 아이 셋을 기르고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필자는 거룩한 성자가 아닌 평범하고 소박하게 삶을 경영하는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깨우치고 얻은 삶의 지혜와 행복은 이 책 구석구석에 잘 녹아있다.

귀틀집을 짓는 과정, 부춛돌식 뒷간을 사용하는 방법, 마을을 지키고 축제를 만들어가는 이장의 모습 등 멀지 않은 곳에서 우리도 만들어갈 수 있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동체를 잃어버린 현대사회에서 무던히 참 행복이 무엇인가를 되묻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비슷한 꿈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경쟁하고 치열하게 생존의 위협을 느껴야만 하는 것이 우리들의 숙명은 아니라고 말하는 저자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안정이 보장된 사람의 생각과 거리가 먼 저자는 수많은 기러기 아버지들의 삶과 비교된다. 서당골에 귀틀집을 짓고 정착하는 과정, 땅을 통해 자연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 자연에서 배우는 겸손함, 마을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지혜가 아주 먼 나라의 이야기로 들리는 것은 우리가 대부분 도시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길을 차단한 채 우뚝 솟은 콘크리트 덩어리들 속에서 열섬 효과로 괴로워하는 우리들의 여름을 생각해 보자. 지금 당장 농촌으로 달려가자는 말이 아니라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곳에서 우리들의 하루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면 우리의 인생이 바뀐다. 죽은 이론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실천이 중요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문제에 대해서 저자는 어김없이 뼈아픈 충고를 잊지 않고 농사에 비유한다.

유기능 교육은 마치 유기 농법에서 “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처럼 농부의 사랑과 관심이 중요하게 여겨지듯이, 자녀에 대한 부모의 조건 없는 사랑이 충분한지를 핵심으로 삼는다. 조건 없는 사랑, 바로 이것이야말로 모든 유기농 교육에 있어 최고의 밑거름이요, 웃거름이다. 부모의 조건 없는 사랑을 통해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속에서 이 세상 만물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자신의 내면적 욕구나 느낌에 솔직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삶에 대한 자율성과 책임성을 동시에 배우게 된다. 반면에 화학농 교육은 다른 사람 눈치 보기, 끊임없는 상대적 비교와 시샘, 타율적 또는 수동적 인간, 강자와의 동일시, 한편에서의 열등감과 다른 편에서의 우월감 조장, 거짓말하기와 변명하기, 이기주의와 무책임한 태도 등을 체계적으로 만들어 낸다. 바로 이런 과정 속에서 “마음이 있는 자는 길을 찾지만, 마음이 없는 자는 핑계만 찾는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 강수돌, <이장이 된 교수, 전원일기를 쓰다>, 193쪽

목적과 방향도 없이 부초처럼 떠밀리며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나 자신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보자. 저자는 특별한 삶의 방법을 제시하거나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을 강조한다. 생각한대로 실천하고 하늘과 땅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은 현재의 삶을 전복하지 않더라도 우리들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한다. 내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면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00805-0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크! 체크리스트 - 완벽한 사람은 마지막 2분이 다르다
아툴 가완디 지음, 박산호 옮김, 김재진 감수 / 21세기북스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인간의 꿈과 무의식의 영역조차 조작하고 싶은 욕망을 담은 영화 <인셉션>의 크리스토퍼 놀란은 <메멘토>라는 걸작을 만든 감독이다. <인셉션>은 말하자면 이 감독이 지닌 주된 관심사에 대한 오래된 고민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현실 너머를 꿈꾸는 인간의 욕망은 어쩌면 영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매트릭스>나 <아바타>도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메멘토>의 주인공은 10분 이상을 기억하지 못하는 단기기억 상실증 환자이다. 온몸에 메모를 하기 시작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처절하다. 인간의 기억은 어차피 사실이 아니라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기억장치가 상실된 인간은 존재 의미를 잃게 된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이성을 기억이라는 능력으로 조망하고 있는 놀란 감독의 능력에 놀랐던 기억이 선명하다.

삶의 특정 부분에 대한 아름다운 혹은 불쾌한 해석을 추억이라고 말한다면, 일상의 한 부분에 대한 재생 능력을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1차적 인간관계 등 감성 영역에 대한 추억은 없는 기록을 만들어내도 그리 나쁘지 않다. 어차피 스스로 해석한 기억이기 때문에. 하지만 이성적 영역을 주로 활용하는 업무 추진 과정에서는 정밀한 단순 기억력이 꼭 필요할 때가 많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업무 패턴이기 때문에 오히려 간과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이 때 사람들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반복된 실수는 실력이나 능력으로 평가받게 된다. 따라서 어떤 일에 대한 능력의 첫 번째 요건은 정확함과 신속함이다.

주변에 완벽한 사람이라고 평가 받는 이들은 대체로 나름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빽빽한 스케줄러,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탁상 달력의 메모, 컴퓨터의 일정관리 프로그램 등 수많은 일들을 빈틈없이 처리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인간의 능력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확인하게 된다. 더구나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의사인 아툴 가완디가 쓴 『체크리스트』는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그 이면에는 물론 인간의 ‘기억’에 대한 한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는 사소한 건망증을 비롯해서 순간적인 임기응변, 위기 대처능력 등 다양한 장면에서 벌어진다. 저자의 직업은 외과의사이다. 수많은 수술을 반복하고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실수’는 곧 ‘생명’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외과 수술은 여러명의 전문가들의 협력 과정이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거나 팀 플레이를 망치는 경우가 발생한다. 저자는 비행기의 조종사와 부조종사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다른 전문직 분야의 사례들을 다양하게 제시하기보다 자신의 전문분야인 의료분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상세하게 분석하고 제시함으로써 유사한 상황을 ‘일반화’할 수 있도록 제시한다. 독자들은 의료 분야에서 반복되는 일을 자신의 분야로 유추할 수 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조금씩 비슷한 실수를 하게 마련이며 누구나 유사한 패턴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어이없는 실수를 반복하는 곳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을 저자는 ‘체크리스트’라고 말한다. 종이 한 장이 도대체 어떤 효과가 있겠느냐고, 내가 전문가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겸손함과 신중함 그리고 인간의 기억과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인간이 불완전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저자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전문가들이 실수하는 이유를 실증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그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 우리들이 일상에서 늘 반복하는 일이라면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물론 체크리스트가 만병통치약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뼈아픈 교훈을 주기도 하고 멍청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는 체크리스트지만 잘 활용한다면 여러 사람이 협력해야 하는 일이나 복잡하고 정교함이 요구되는 현장에서 매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단순한 일, 복잡한 일 그리고 복합적인 일을 케익 만드는 일, 우주선을 발사하는 일 그리고 아이를 기르는 일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는 복잡하지만 반복되는 패턴을 익혀두면 편리한 일과 수많은 조합으로 매번 복합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일과 자주 접하게 된다. 단순 반복하는 업무를 하는 사람이라도 복잡하고 복합적인 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동일한 일을 많은 사람이 해야하는 경우나 복합적인 일을 제대로 처리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체크 리스트와 자신의 체크리스트를 비교해 보자. 체크리스트가 없다면 한번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경험을 통해 축적되고, 사람들이 보유한 지식을 이용할 수 있으면서,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결점을 보충할 수 있는 그런 전략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은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인간적인 결점을 보충해 주는 것이 바로 체크리스트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다. 구체적인 방법과 내용에 대해서는 각자의 몫이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반드시 필요한 요소와 불필요한 항목을 조정하면서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활용해보면 그 놀라운 결과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면 참여의식과 책임감, 기꺼이 말하고자 하는 마음이 활성화된다는 것이다(활성화현상) - 아툴 가완디, <체크리스트>, 145쪽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수많은 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더구나 집단지성의 힘을 빌려야 한다. 간단한 체크리스트 하나가 실수를 줄이고 보다 완벽한 일처리를 위한 도구로 활용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일은 체크리스트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체크리스트는 숙련된 전문가들의 기술력을 뒷받침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속하고 간단한 도구다. 그리고 빠르고 사용 가능하며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져 수십만 명의 생명을 구하는 역할을 한다. - 아툴 가완디, <체크리스트>, 173쪽


100802-0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누구인가. 이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인권이며, 성별, 인종, 국적은 물론 나이, 장애, 성적 취향 등에 대한 차별을 부당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인권을 존중하는 삶의 시작이다. 성별과 인종, 국적과 나이에 따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형성된다. 후천적인 문화적 토양에 기초하여 사회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는 타인을 보는 틀을 만들어왔다. 가족과 학교 사회와 국가의 영향을 받으며 익숙한 방식대로 타인의 관점을 습득한다. 반성적 사고와 성찰적 태도 없이 맹목적으로 혹은 다수의 편에 서는데 익숙하다. 아마 대부분의 ‘나’는 그렇게 세상과 타인을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가. “너는 언제나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탕하도록 행위하라”는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은 가장 보편적인 상식에 해당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에 쉽게 동의하지만 실천하지는 않는다. 실제 생활에서 내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우리들의 모습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인지 깨닫게 된다.

인권은 기존의 관습과 문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지금 현재도 각 지역마다 독특한 풍습과 전통에 따라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가 제한된다. 문화적 다양성 측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보편타당한 원리의 준칙에 따르면 당연히 개선되어야 할 악습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인권 수준과 한국인들의 인권의식은 어느 정도일까?

아마 보는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높은 점수를 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 ‘국가인권위원회’를 눈에 있는 가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념적 잣대로 판단하는 한 인권은 아직도 우리에게 먼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인권의식을 심어주고 차별적 시선을 걷어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과 결과들은 보이지 않게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믿는다.

김두식의 『불편해도 괜찮아』는 2010년 대한민국 인권의 현주소를 진단하는 책으로 읽었다. 한국인들의 인권의식을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현실의 문제를 꼼꼼히 짚어내는 책은 아니지만 저자가 힘주어 말하는 내용들은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에게 아직도 많이 부족한 생각이나 제도라는 뜻이다. 『십시일반』, 『사이시옷』은 만화라는 친근한 방법으로 차별과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불편해도 괜찮아』는 이렇게 작은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좋은 책이다. 김두식은 전작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보여주었던 우리나라 사법시스템의 문제점을 ‘인권’이라는 보편적 영역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이 책에서는 청소년,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 노동자의 인권과 차별을 이야기 한다. 또한 종교와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 문제, 인종차별의 심각성을 역설한 다음 마지막으로 차별의 종착역인 제노싸이드(집단살해, 인종학살)로 정리한다. 전체 9장으로 구성되어 각각 독립적인 주제로 쓰였지만 ‘인권’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향해 집중 수렴하는 구조이다. 지금까지 나온 책들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인권’을 영화로 풀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이야기라는 부제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저자는 영화에 대한 안목이 깊고 넓다. 지인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지만 각각의 주제에 알맞은 영화를 통해 딱딱하고 불편한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다.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이 바로 이 부분이다. 영상세대에게 드라마나 영화 이야기를 꺼내는 것보다 알기 쉽고 감동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저자는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차이는 인정하지만 차별은 안 된다. 사람들은 이기적 욕심과 편향된 시각으로 사람과 사물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그것이 절대 진리인 것처럼 믿고 행동하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 상대를 이해하고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지식이고 실천이다. 아무리 머리로 이해하고 지식으로 안다고 해도 가슴에 닿지 않고 행동에 옮겨지지 않는다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저자는 목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 아니라 상식에 기대어 이야기한다. 사람마다 상식이 다른 것이 문제지만 그 상식을 깨뜨리고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상식을 만드는 일이 우리가 할 일이다. 지식인은 물론이고 평범한 우리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잘못은 행동하지 않고 침묵하는 일이다. 알면서도 외면하고 이기적 욕심을 위해 모른척하고 말해야할 때 침묵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 사소하지만 우주만큼 큰 차이가 있는 삶의 방법과 태도이다. 그래야 세상은 아주 조금 달라진다.

인간들의 DNA는 99.5%가 동일하고 오직 0.05%만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 0.05%에서 우리 모두의 다양성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지요. 그 사소한 다름에 기초해 민족, 종족, 인종, 종교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말살하려던 역사상의 시도들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 김두식, <불편해도 괜찮아>, 356쪽


100727-0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도 사고 팔 수 있는 세상

이 명제에 대해 말도 안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녀를 만나기 백 미터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릴 수는 있지만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곳에서 아이스커피 한 잔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30도가 오르내리는 여름날 뙤약볕에 공원을 거닐며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기는 쉽지 않다. 영화를 보든 밥을 먹는 가까운 곳에 바람을 쐬러가든 돈이 없으면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자. 집안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집 밖을 나서는 순간 모든 행동에 비용이 든다. 지독하고 철저한 자본의 정교한 논리가 숨어 있다.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처럼 정교하게 짜여 있다는 생각은 누구나 한번 쯤 해 보았을 것이다. 영화 <이끼>의 마을이장 천용덕이 구축해 놓은 시스템이든 가상의 <매트릭스> 세상이든 우리가 개입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한 사람의 꿈속에서나 겨우 자유로운 상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셉션>을 보고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도대체 어디까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시스템을 바꿀 수도 꿈을 꿀 수도 없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이 절망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다면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보라. 너무나 익숙해서 공기와 물처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없어서는 숨조차 쉴 수 없다고 말하는 자본주의의 시스템! 그것은 과연 우리를 행복의 나라로 인도하고 있는가. 반성적 자기 성찰과 현실에 대한 올곧은 비판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밝은 불빛을 향해 온몸을 던지는 부나방이나 집어등을 향해 돌진하는 오징어의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 벌써 한쪽 날개가 불에 타고 있거나 낚시에 걸린 오징어가 된 것은 아닐까.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불행해지고 점점 더 소수의 사람만이 행복해지는 시스템은 오래가지 못한다. 현실에 대한 무수한 당근과 채찍질이 반복되더라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강신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욕망의 집어등’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치명적인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자본의 노예가 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인생을 건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그는 우리 욕망의 대부분이 자신의 욕망이라기보다 타자의 욕망이라고 냉정하게 진단했던 것입니다. - 강신주, <상처받지 않을 권리>, 머리말

라캉의 오래된 분석처럼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욕망이 진정한 내적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라는 데 있다. 『꽃들에게 희망을』의 애벌레처럼 남들과 비교하고
남들보다 먼저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야 하고 남들보다 비싼 물건을 소비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 태어난 자본주의 인생!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소비사회의 물신주의는 인간 소외 현상을 낳았고 인간이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된 기형적인 세상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외면한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한, 아니 우리들을 위한 뼈아픈 충고이자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듯하다. 자본주의적 삶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저자는 이상과 짐멜, 보들레르와 벤야민, 투르니에와 부르디외, 유하와 보드리야르를 링 위에 올린다. 당대의 문제적 작가와 자본주의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철학자들을 통해 우리가 살아 온 자본주의의 역사 즉 인간 욕망의 역사를 되새김질한다.

불확실한 미래와 점점 더 치열해지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을 위한 몸부림. 당신은 지금 현재의 삶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미래를 담보로 끊임없이 현실의 희생을 요구하는 구조 속에 놓여있다. 현대사회는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의 극단를 온몸으로 드러낸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부르디외가 염려하는 바와 같이 문화자본, 학력자본, 사회관계 자본이 부모의 경제적 능력으로 다음세대로 세습되고 확대 재생산된다는 데 있다. 고착화된 계급 사회는 계층 이동을 불가능하게 하며 결국 머지 않아 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해 왔고, 그에 대한 대안을 고민해 왔기 때문에 미래가 단순히 장밋빛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생각해 보면 보다 긍정적이고 밝은 미래가 펼쳐진 것 같은 착시효과 속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을까. 점점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도대체 자본주의적 삶이 어떤 것이고 내 삶은 어떤 목적과 욕망을 가지고 있길래 이다지도 복잡한 것일까.

저자는 이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바로 ‘자본주의의 폭력’에 대해 상처받지 않을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다는 말은 아닐까 생각했다. 끝없는 욕망과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반성이 왜 필요한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필독서로 권장되어야 하며 그 심각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던 사람들이라면 진지하게 실제 생활 속에서 실천 가능한 태도와 방법을 모색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특별한 대안을 제시하거나 새로운 통찰력을 제시해 주는 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19세기 이후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주목받았던 벤야민과 부르디외 보드리야르의 냉정한 통찰력과 이상, 보들레르, 투르니에, 유하와 같은 감각적인 문학가에게 나타난 자본주의적 삶의 징후들을 꼼꼼하게 살펴 본 독자들이라면 이 책은 잘 정리된 또 하나의 해설서에 불과하다. 다만 색다른 방식으로 그것들을 비교하고 해석하고 쉽게 전달하고자 하는 저자의 탁월한 노력과 진지한 고민은 어떤 독자에게든 진정성을 담보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그래서 더욱 설득력 있게 전달되는지도 모르겠다.

상처를 상처로서 제대로 느낄 수 있을 때, 상처를 치유하려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 또한 새롭게 싹틀 수 있을 겁니다.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더이상 상처가 깊어지기 전에,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들이 치료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떠안기 전에, 치유의 노력이 곧 시작될 수 있기를 말입니다. - 강신주, <상처받지 않을 권리>, 432쪽


100723-0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소년, 시와 대화하다
김규중 지음 / 사계절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빠쁜 때 웬 설사 - 김용택

소낙비는 오지요
소는 뛰지요
바작에 풀은 허물어지지요
설사는 났지요
들판에 사람들은 많지요.


*바작 : ‘발채’의 방언. 지게에 얹어서 짐을 싣는 소쿠리 모양의 물건. 싸리나 대오리로 둥글넓적하게 조개 모양으로 엮어서 접었다 폈다 하게 되어 있다.

‘시가 어렵다’와 ‘시를 읽기 싫다’고 말하는 아이들은 시에 대한 첫 인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쉽고 재밌는 시, 짧지만 감동적인 시를 읽고 마음으로 느껴 본 아이라면 시를 멀리 할 이유가 없다. 국어 시간에 시는 해체된다. 뼈와 살리 분리되고 각종 장기는 피를 흘리며 파헤쳐진다. 기막힌 솜씨로 해부된 시체처럼 처참한 시를 누가 좋아할 것인가.

평생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쳐온 제주도 시인 김규중 선생님께서 『청소년, 시와 대화하다』는 이런 답답증을 조금 풀어주는 책이 아닌가 싶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쏟아내고 선생님들은 선생님대로 조금 더 쉽고 재미있게 시를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한다. 이 고민들이 모여 국어교육을 조금 더 풍요롭게 하지만 시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넘기 어려운 산처럼 보인다.

장편 2 - 김종삼

조선 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 상 밥집 문턱엔
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장편掌篇 : 극히 짧은 작품. 보통 소설에서 단편 소설보다 작은 분량의 작품을 말함.
*균일 상 : 가격이 균일한 식사.

김종삼의 1977년 작품이다. 시대배경을 생각하면 30여년이 흐른 뒤 쓴 시이다. 시인의 마음속에 흐뭇함과 미안함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발효’ 과정을 거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대의 가난과 소녀의 순수한 마음 그리고 눈이 먼 부부의 모습이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자화상에 가깝다. 시는 그렇게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사람들이 지닌 가장 근본적인 마음의 결을 흔들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시가 지닌 1차적 특징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배울 것은 그 마음을 언어로 담아내는 방법과 기술이 아니라 이미 그 자리에 놓여 있는 시의 숲을 거니는 것이다.

저자는 문과녀 ‘은유’와 이과남 ‘명석’을 내세워 대화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간다. 두 학생의 차이와 특징은 시를 읽는 아이들의 특징을 닮았다. 물론 영특하게 시를 잘 이해한다는 점만 빼면. 중간중간 ‘김샘’이 끼어들어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거나 어려운 부분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들면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다소 형식적이고 딱딱한 느낌이 들고 두 아이들의 대화가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조금 작위적인 느낌이 없지 않지만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아이들에게 시는 어렵고 딱딱한 수능 언어영역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말과 글이 지닌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게 시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어야 평생 시를 읽게 된다. 넉넉하고 따뜻한 감수성을 잃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서 시 교육이 아니라 우리의 삶, 인간과 세계에 대한 안목을 길러주는 시 읽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60여 편의 시를 3부로 나누어 수준별로 단계를 구분했다. 시의 난이도와 내용에 따라 구분했다. 수학이나 과학처럼 정확한 기준을 세우기가 어렵지만 시는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고 조금 어렵게 느끼는 시는 시를 읽는 연습과 훈련도 필요하다. 마음으로 읽은 시는 오래 기억되고 영혼에 새겨진 시는 잊혀지지 않는다.

느낌 - 이성복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에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한 편의 시가 주는 느낌이나 한 사람이 주는 느낌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언어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정서적 충격, 체험적 사고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시를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바가 무언인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높은 점수를 받고 싶은 수험생이든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은 소녀이든 시는 항상 우리 곁에서 명징한 언어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온몸으로 전해준다. 오감을 통해, 때로는 지적 충격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우쳐준다. 지독하게 주관적인 방법으로.

시대를 거슬러 공간을 뛰어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우리는 오래 기억한다. 한 시대를 유행처럼 풍미했던 작품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기억할 수 있는 시가 그립다. 아이들은 어떤 감수성과 기억력으로 지금 이 시대를 아니,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추억의 한때를 기억하게 될지 모르겠다. 지금 이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추운 겨울이 오고 또 봄이 오겠지만.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 밖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하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100721-0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