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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시와 대화하다
김규중 지음 / 사계절 / 2010년 7월
평점 :
이 빠쁜 때 웬 설사 - 김용택
소낙비는 오지요
소는 뛰지요
바작에 풀은 허물어지지요
설사는 났지요
들판에 사람들은 많지요.
*바작 : ‘발채’의 방언. 지게에 얹어서 짐을 싣는 소쿠리 모양의 물건. 싸리나 대오리로 둥글넓적하게 조개 모양으로 엮어서 접었다 폈다 하게 되어 있다.
‘시가 어렵다’와 ‘시를 읽기 싫다’고 말하는 아이들은 시에 대한 첫 인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쉽고 재밌는 시, 짧지만 감동적인 시를 읽고 마음으로 느껴 본 아이라면 시를 멀리 할 이유가 없다. 국어 시간에 시는 해체된다. 뼈와 살리 분리되고 각종 장기는 피를 흘리며 파헤쳐진다. 기막힌 솜씨로 해부된 시체처럼 처참한 시를 누가 좋아할 것인가.
평생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쳐온 제주도 시인 김규중 선생님께서 『청소년, 시와 대화하다』는 이런 답답증을 조금 풀어주는 책이 아닌가 싶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쏟아내고 선생님들은 선생님대로 조금 더 쉽고 재미있게 시를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한다. 이 고민들이 모여 국어교육을 조금 더 풍요롭게 하지만 시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넘기 어려운 산처럼 보인다.
장편 2 - 김종삼
조선 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 상 밥집 문턱엔
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장편掌篇 : 극히 짧은 작품. 보통 소설에서 단편 소설보다 작은 분량의 작품을 말함.
*균일 상 : 가격이 균일한 식사.
김종삼의 1977년 작품이다. 시대배경을 생각하면 30여년이 흐른 뒤 쓴 시이다. 시인의 마음속에 흐뭇함과 미안함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발효’ 과정을 거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대의 가난과 소녀의 순수한 마음 그리고 눈이 먼 부부의 모습이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자화상에 가깝다. 시는 그렇게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사람들이 지닌 가장 근본적인 마음의 결을 흔들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시가 지닌 1차적 특징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배울 것은 그 마음을 언어로 담아내는 방법과 기술이 아니라 이미 그 자리에 놓여 있는 시의 숲을 거니는 것이다.
저자는 문과녀 ‘은유’와 이과남 ‘명석’을 내세워 대화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간다. 두 학생의 차이와 특징은 시를 읽는 아이들의 특징을 닮았다. 물론 영특하게 시를 잘 이해한다는 점만 빼면. 중간중간 ‘김샘’이 끼어들어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거나 어려운 부분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들면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다소 형식적이고 딱딱한 느낌이 들고 두 아이들의 대화가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조금 작위적인 느낌이 없지 않지만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아이들에게 시는 어렵고 딱딱한 수능 언어영역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말과 글이 지닌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게 시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어야 평생 시를 읽게 된다. 넉넉하고 따뜻한 감수성을 잃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서 시 교육이 아니라 우리의 삶, 인간과 세계에 대한 안목을 길러주는 시 읽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60여 편의 시를 3부로 나누어 수준별로 단계를 구분했다. 시의 난이도와 내용에 따라 구분했다. 수학이나 과학처럼 정확한 기준을 세우기가 어렵지만 시는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고 조금 어렵게 느끼는 시는 시를 읽는 연습과 훈련도 필요하다. 마음으로 읽은 시는 오래 기억되고 영혼에 새겨진 시는 잊혀지지 않는다.
느낌 - 이성복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에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한 편의 시가 주는 느낌이나 한 사람이 주는 느낌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언어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정서적 충격, 체험적 사고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시를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바가 무언인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높은 점수를 받고 싶은 수험생이든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은 소녀이든 시는 항상 우리 곁에서 명징한 언어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온몸으로 전해준다. 오감을 통해, 때로는 지적 충격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우쳐준다. 지독하게 주관적인 방법으로.
시대를 거슬러 공간을 뛰어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우리는 오래 기억한다. 한 시대를 유행처럼 풍미했던 작품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기억할 수 있는 시가 그립다. 아이들은 어떤 감수성과 기억력으로 지금 이 시대를 아니,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추억의 한때를 기억하게 될지 모르겠다. 지금 이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추운 겨울이 오고 또 봄이 오겠지만.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 밖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하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100721-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