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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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디든지 같지만 어디서에도 같지 않은 것은?”

비에 젖은 일요일 오후를 산책하다가 하루에 4시간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절대 몰입의 독서를 위한 2시간, 운동을 위한 1시간, 아무것도 안하고 하늘만 쳐다보는 1시간. 노동의 순환 사이클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요일 오후에 느끼는 아쉬움과 월요일에 대한 부담은 비슷하리라. 하지만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24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시간이 늘 부족한 사람이 있고 시간이 늘 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같은 시간에 여러 가지 일을 하고도 여유를 즐기는 사람이 있고 한 가지 일도 못하고 늘 허덕이는 사람도 있다. 단순히 개인의 능력 차원을 넘어 시간에 대한 주관적 개념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수수께끼 하나를 풀어보자.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에서 던진 질문이다. 어디든지 동일하지만 어디에서도 다른 것은 질문 자체가 모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 중 하나인 클레아르쿠스는 『수수께끼의 이론』이라는 책에서 질문 놀이인 그리포스(griphos: 수수께끼 게임)를 특히 많이 다루었다고 한다. 이런 질문을 통해 다양한 논리들을 거쳐 소크라테스의 대화로 발전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궤변법의 기술이 고의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며 경멸했다. 어쨌든 이 질문의 정답은 바로 “시간”이다.

겨우 몇 백 년 전만 해도 인간의 삶이 이렇게 바쁘고 번잡스럽지는 않았다. 전근대 사회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동안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변했는지 살펴보면 가히 혁명에 가깝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문명은 빛의 속도만큼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인간의 삶도 그만큼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시간의 개념이 달라진 것만은 사실이다. 분초 단위의 시간으로 잘게 쪼개진 일상에서 우리의 삶도 그만큼 바빠졌고 여유가 없어졌다. 놀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한 휴식을 취하는 삶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1938년 6월 레이던 대학에서 하위징아가 쓴 이 책은 인간의 역사와 문화에서 ‘놀이’의 개념을 깊이 있게 보여준다. 인간의 특징을 나타내는 많은 말들 중에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말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위징아는 ‘놀이는 문화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문명을 이루기 이전 상태 즉 동물적 본능에 가까운 것이 바로 ‘놀이’라는 말이다. 일과 놀이를 구분할 때 그 놀이가 아니라 놀이의 개념은 우리들 삶의 곳곳에 숨어있다는 뜻이다. 하위징아는 놀이의 일반적 특징을 옮긴이 이종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 놀이는 특정 시간과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자발적 행동 혹은 몰입 행위이다.
2.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규칙을 따르되 그 규칙의 적용은 아주 엄격하다.
3. 그 자체에 목적 있고 일상생활과는 다른 긴장, 즐거움, 의식(意識)을 수반한다.
4. 질서를 창조하고 그 다음에는 스스로 하나의 질서가 된다.
5. 경쟁적 요소, 즉 남보다 뛰어나려는 충동이 강하다.
6. 신성한 의례에서 출발하여 축제를 거치는 동안 자연스럽게 집단의 안녕과 복지에 봉사한다.

즉 놀이는 자유로운 행위이며 자유 그 자체이다. 이러한 특징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경쟁적 요소이다. 어린이들의 단순한 놀이에 해당하는 파이디아(paidia)와 경기에 해당하는 아곤(agon)이 결합된 의미가 바로 ‘호모 루덴스’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즐거운 경기에 몰입하는 자유로운 행위를 즐겼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하위징아는 12장에 걸쳐 놀이의 본질과 개념과 특징은 물론이고 법률, 전쟁, 시, 철학, 예술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신화 창조나 서양 문명과의 관계를 살핀 후 현대 문명에서 발견되는 놀이의 요소로 책을 마무리한다.

이제 고전이 되어버린 다소 딱딱한 문장의 책을 천천히 읽은 것은 김종휘의 『대한민국 10대, 노는 것을 허하노라』는 책을 보다가 한경애의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가 생각났고 하위징아의 원전을 꼼꼼히 읽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2차 저작물들이나 이 책에서 비롯된 다양한 이론과 시각들이 풍성하고 이어졌다. 지금도 인간의 본능에 가장 역행하는 교육과정을 밟고 있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에 관한 책을 보다가 이 책이 떠 오른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제대로 놀아 본 적이 없는 아니 제대로 놀 줄 모르는 많은 어른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위징아는 이 책에서 노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본질적 특성을 이해하고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인류문명의 역사와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독자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듯하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왜 사는가. 그리고 인간의 모든 행위 속에 내재한 놀이 본능을 어떻게 충족시키며 즐기고 있는가. 아무리 바쁘고 일 속에 파묻혀 사는 듯해도 모든 인간은 늘 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놀이를 만들 줄 알고 경쟁하며 그 안에서 질서를 창조하고 행위 자체에 몰입하기도 하며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놀이가 아닌가. 그렇게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로 놀이로 바꿀 수 있는 창조적 상상력과 능동적인 행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자, 이제 월요일이다. 또 일주일을 어떻게 놀아볼지 즐거운 고민을 해봐야겠다.

진정한 놀이는 프로파간다를 모른다. 놀이 자체가 그 목적이며 놀이 정신은 행복한 영감의 원천이 된다.


100829-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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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 시인선 375
류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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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지옥은 내가 이 별에 왔는데
약속한 사람이 끝내 오지 않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감각적이고 인상적인 ‘시인의 말’로 시작하는 『상처적 체질』은 가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제격이겠다. 연시(戀詩)가 보여주는 마음의 결을 따라 산책을 나가고 싶은 저녁에 어울린다.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걸까. 시인은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생의 고통과 신산스런 삶의 틈새를 보여준다.

날선 감수성을 지닌 시인의 언어는 칼날처럼 예리하게 심장을 겨냥한다. 생각의 편린들을 형상화하고 있지만 때로는 상처를 쓰다듬어 주는 부드러운 손길. 결국 가장 큰 행복과 충만한 사랑이 지독한 슬픔과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獨酌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지르고 운다


홀로 술을 마셔 본 사람은 안다.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아득함 그리고 절대 고독 속에서 대면하는 나. 시인 류근은 오랜 침묵을 깨고 첫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마치 ‘독작’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사랑의 상처와 그리움으로 가득한 시들이 보여주고 싶었던 세계는 찌질한 감상주의도 아니고 우울한 슬픔도 아니다. 그의 시들은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며 ‘그리움’을 부르고 비껴가고 싶은 생의 감각들을 일깨운다.

사랑과 이별이라는 진부한 이야기는 수없이 반복되어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살아 숨 쉬듯, 번개처럼 찾아온 사랑도 언젠가 끝이 나고 또 다시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 사랑은 단순히 이성에 대한 사랑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얼마나 쉽고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시인은 누구보다도 예민한 촉수를 가지고 있다.

그리운 우체국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은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매달아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한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또 다시 취한 시간들이 다가온다. 어둠이 내린 저녁, 희미한 옛사랑이 그리울 테고 그리움 한 조각 부치고 싶은 것이다.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때문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거나 상처를 받는 체질이거나.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시집을 읽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상처받는 체질이라면 따뜻한 위로와 공감의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처적 체질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지상에 발을 떼지 않는 직립 보행하는 인간의 꿈은 새가 아닐까. 자유로움 때문에 그리고 생의 무게를 벗어나고 싶은 열망은 저녁 새 떼들에게 고스란히 옮겨진다. 나의 일생이 자유로웠노라고, 아니 자유롭고 싶었노라고.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시인은 말한다. 가거라,



지혜로운 새는 세상에 와서
제 몸보다 무거운 집을 짓지 않는다
바람보다 먼 울음을 울지 않는다

지상의 무게를 향해 내려앉는
저녁 새 떼들 따라 숲이 저물 때
아주 저물지 못하는 마음 한 자리 병이 깊어서

겁도 없이 몸도 없이
잠깐 스친 발자국 위에 바람 지난다
가거라,


절망의 문턱에서 일어나 살아보자고 몸부림치는 모든, 지친 그대에게.
다, 지나간다. 소소한 바람소리처럼 그렇게 잠깐 살다 가는 우리 모두에게 행복과 희망이 깃들기를. 시인이 작사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김광석의 노래로 듣는 것은 모르겠지만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반성

하늘이 함부로 죽지 않는 것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별들이
제 품 안에 꽃피고 있기 때문이다.
보아라, 하늘조차 제가 낳은 것들을 위해
늙은 목숨 끊지 못하고 고달픈 생애를 이어간다
하늘에게 배우자
하늘이라고 왜 아프고 서러운 일 없겠느냐
어찌 절망의 문턱이 없겠느냐
그래도 끝까지 살아보자고
살아보자고 몸을 일으키는
저 굳센 하늘 아래 별이 살고 사람이 산다


100823-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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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트 - 인간의 행동 속에 숨겨진 법칙
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김명남 옮김 / 동아시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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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직도, 어린왕자가 지구에 살고 있다면 사람들은 그와 어떤 관계를 맺고 싶어 할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트위터로 소식을 전하거나 실시간으로 어린왕자의 위치를 파악하고 싶어 할 것이다.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린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사생활은 어디까지 보호받을 수 있을까? 네트워크 세상에서 우리는 씨줄과 날줄 사이의 어디쯤에 끼워진 퍼즐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조각 하나가 빠져 나가도 금세 빈 자리는 또 다른 노드가 메울 것이다. 노드의 연결 고리가 되는 허브가 있지만 수많은 허브도 결국 네트워을 연결하는 또 하나의 고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니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 뿐 만 아니라 사회적 연결망의 위치를 거시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면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알 수 있지 않을까? 현대 사회에서 정체성은 관계망 속의 접속 지점을 나타내는 지표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의 망을 아름답고 재미있게 풀어 낸 『링크』의 저자 바라바시가 이번엔 『버스트』로 우리 곁을 찾았다. 책을 읽는 즐거움, 지적 유희의 행복함을 전해주는 이 책은 새로운 형식의 텍스트를 제공한다. 역사 소설과 과학적 지식의 탐구라는 두 축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색다른 책읽기를 요구한다. 독자들은 이 복잡한 텍스트를 통해 마치 기차 레일을 연상할 수 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 한 채 평행하게 뻗어가는 이야기들이 결국에는 하나의 소실점에 모이게 되는 책이다. 하지만 소실점은 눈의 착각일 뿐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이 텍스트도 ‘인간’이라는 알 수 없는 텍스트에 대한 메타 텍스트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읽으려고 할수록 읽히지 않는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는 언제나 즐겁다. 바라바시는 물리학의 법칙과 복잡계 네트워크 과학을 통해 이번에는 인간의 행동을 읽어내려고 시도한다. 열흘 후에 날씨를 예측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인간의 행동 패턴을 예측하는 일은 가능할까. 바라바시는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방식과 조금 다르게 과학적 지식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전달한다. 중세 십자군 원정에 관한 역사적 고증과 상상력을 통해 인간 행동의 예측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현대 물리학의 사례를 통해 검증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두 개의 이야기를 교차해 놓고 있어 한 개의 이야기가 끝나면 또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독자들은 두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느낌이면서 서로 연결된 두 개의 텍스트를 나란히 읽고 있는 느낌을 갖는다.

저자가 이 책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동에 숨어 있는 ‘폭발성의 패턴’이다. 그 폭발성의 이면에는 ‘우선순위 결정’의 비밀이 숨어 있다. 어떤 일이 매일매일 벌어지는 우선순위에서 밀리다 보면 일정한 패턴을 읽어내기 어렵지만 그 행위들은 결국 멱함수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저자는 알기 쉽고 상식적인 사례들과 그 이론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함께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이 책이 갖는 장점은 단순한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거나 최근의 연구 성과를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바라바시는 이 책에서 과학자이면서 심리학자이고 소설가이다. 다양한 관점은 하나의 사물과 사건을 입체적으로 보는 눈을 제공한다. 저자가 여러 번 인용한 ‘칼 포퍼’는 절대로 인간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말을 부정하기 위해 이 책을 썼는지도 모른다. 아직 불완전하지만 인간 행동의 패턴을 읽어내는 일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으며 어쩌면 날씨를 확률로 표시하듯이 확률적 예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들을 설명한다. 앞으로 남겨진 과제는 인간행동의 ‘bursts’가 아니라 그 원인과 예측 가능성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다. 학자의 입장에서 이론을 확립하고 실험을 통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당연한 관심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통해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이미 벌어진 행동의 결과를 미래의 인간 행동 예측 시스템과 대비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책이 읽을 만한 것은 바로 이처럼 독특한 방식의 글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라바시의 통찰력과 흥미로운 과학적 사례들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즐거움이다.

과학자들은 인간 행동이 사실상 무작위적이라는 가정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게 되었고, 이 가정은 인간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 분야에서 근본적인 패러다임으로 기능해왔다. 그러니까 인간의 행동은 사실상 예측 불가능하고, 일회적이고, 결정불가능하고, 예견 불가능하고, 불규칙하다는 것이다 이 가정에는 문제가 딱 하나 있다. 틀렸다는 점이다. - 바라바시, <버스트> 131쪽

용감을 넘어 대담하게 느껴지는 마지막 문장, ‘틀렸다’는 표현을 함부러 쓸 수 없지만 과학자인 바라바시는 인간 행동의 예측 불가능성을 부정한다. 몇 마디로 압축하고 요약할 수 있는 책이 될 수도 있는 이 두툼한 책을 꼼꼼하게 천천히 읽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의 가설과 그것을 증명해가는 과학 이론 서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그것에 이르는 과정과 과거의 시간들이 보여주는 사실들은 독자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또한 무의식적인 행동 방식과 패턴을 돌아보게 한다.

또한 ‘모른다’ 혹은 ‘불가능하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사실이 과학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는 것,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에 대한 관심과 관찰과 분석이 새로운 관점과 이론을 탄생시킨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복잡계 네트워크 과학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유 방식과 관습적인 사고의 틀을 깨뜨리는 방법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 과학은 지금까지 그래왔고, 과학자들은 늘 ‘불가능’에 도전해 왔다. 다만 그것이 모두 과학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요구되는 과학적 사유 방식은 아닐까 싶다. ‘버스트’는 인간 행동 속에 숨겨진 법칙의 핵심이 아니라, 인간 사고의 핵심이 될 수도 있다. 그 잠재적 폭발성을 기르기 위해서 끊임없이 읽고 생각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이 책은 과학과 역사가 결합되어, 인간에 대한 가장 진보적인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100817-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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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기엔 좀 애매한 사계절 만화가 열전 1
최규석 글.그림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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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 타인이 느끼는 고통은 오로지 ‘유추’에 의해서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내 손톱 밑에 가시 하나가 다른 사람의 암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하다는 말이다.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김명민의 고통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 온전히 내가 그 고통을 느껴 볼 수 있거나 공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의 극단적 표현이다. 물론 나의 고통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지극히 자연스런 감정의 표현이지만.

살다보면 눈물 나는 일들이 많다. 기뻐도 슬퍼도 흘리는 눈물은 가장 인간적이고 애틋한 정서 표현이다. 사람에 따라 눈물이 많은 사람이 있고 눈물이 없는 사람이 있다. 눈물의 양이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방법에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상황이 있고 울고 싶지 않은데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닌 울기에는 좀 애매한 상황도 있다.

최규석의 『울기엔 좀 애매한』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이다. 만화가 지망생을 중심으로 입시미술을 준비하는 학원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드라마틱한 설정이나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으면서도 잔잔한 일상 속의 아픔을 담고 있다. 세상을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누는 것이 정확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이 만화에는 찌질한 인생들이 여럿 등장한다. 특히 주인공 ‘원빈’은 꽃미남 배우 원빈과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인물이다. ‘불가촉 루저’라는 풍자적이고 코믹한 수식어가 어울리는 원빈은 가난해서 만화를 그리고 싶은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고등학생이다. 합격하고도 등록금이 없는 상황으로 끝나버리는 이야기가 오히려 현실적이다. 이야기 안에서 꿈을 이루고 해피엔딩으로 끝난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내 어른이 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로 시작하는 작가의 말은 만화가 최규석을 짐작케 한다. ‘내가 가진 삽 한 자루로 할 수 있는 만큼을’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자세만으로도 이 만화책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교훈적이고 뻔한 결말을 이야기하는 만화는 아니다. 이 책은 우선 재미있다. 만화의 가장 큰 미덕은 여전히 재미가 아닐까 싶다. 그 재미가 어떤 종류의 것인가는 다른 이야기지만 이 만화는 10대들의 언어와 일상이 현실감 있게 표현되어 너무 자연스럽게 책장이 넘어간다. 이 책은 키득거리며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고 수채화로 채색된 그림을 감상할 수 있으며 이제 점점 더 심각해지는 88만원 예비 세대를 잘 묘사하고 있다.

국가 인권위원회에서 펴낸 『십시일반』, 『사이시옷』이나 『내가 살던 용산』을 통해 만화가 더 이상 흥미 위주의 오락물로 치부할 수 없는 영역까지 그 폭을 넓혀 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울기엔 좀 애매한』 색다른 모습으로 우리들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최규석을 처음 만난 것은 『100°C』를 통해서였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다룬 만화를 통해 보여줬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도 사람도 100°C가 넘으면 끓어 넘치게 된다. 이 만화의 주인공 원빈은 아직 99°C 쯤 끓고 있는 것 같다. 재수생 류은수는 원빈의 미래이다. 사회적 상황과 개인의 경제적 환경 때문에 꿈을 접어야 하고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시대를 묘사하는 만화를 보아야 하는 현실은 우울하다. 작가는 이 만화를 통해 가볍게 현실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그 현실은 결코 가볍게 웃고 넘길 수 없다.

마치 1920년대 단편을 통해 시대의 가난을 보여주었던 단편 작가들처럼 최규석은 21세기 청소년판 빈곤 세대를 다루고 있는 듯하다. 불가촉 루저 원빈은 문진영의 소설 『담배 한 개비의 시간』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편의점 알바로 20대를 버텨낼 지도 모른다. 10대든 20대든 전망 없는 미래보다 무서운 것은 ‘자본’의 힘이다. 대학에 입학해도 살인적인 등록금과 생계비 때문에 졸업과 동시에 신용불량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용기를 내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않 가거나 못 가거나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주인공 원빈은 가난해서 입학조차 하지 못할 상황이다. 만화는 거기가 끝나버리지만 잔혹한 현실은 계속된다.

제목처럼 좀 애매한 이야기라는 것은 혼자만의 극단적 고통이나 슬픔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보편적인 아픔이라는 뜻일 게다. 목 놓아 울어버린다고 해서 상황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툭 털어버릴 수도 없는 복잡한 심정을 작가는 울기에는 좀 애매하다는 말로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감정 표현이나 사실적인 배경 묘사는 만화를 보는 재미를 배가 시킨다. 내용과 형식의 적절한 조화가 많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전해 줄 것 같다. 개그본능에 충실한 가난한 청춘들의 이야기만 꿈조차 가난하지 않다는 것을, 그래도 세상을 변화시키고 ‘희망’ 잃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전해주는 최규석의 만화를 계속 만나고 싶다. 그의 주인공들도 웃거나 우는 것이 아니라 이제, 화를 낼 줄도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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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0대, 노는 것을 허하노라 - 십대들의 창조적인 인생 밑천 만들기 프로젝트
김종휘 지음 / 양철북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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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가장 큰 이벤트는 수학여행과 체육대회이다. 두 가지 행사가 없다면 아마도 아이들은 창살 없는 감옥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학교는 그만큼 고달프다. 끝없는 경쟁과 입시를 향해 달리는 경주마의 질주가 연상된다. 생긴 것도 성격도 취미도 제각각인 아이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꿈을 꾼다는 게 가능한가? 대체로 아이들이 원하는 전공과 대학은 아마 스무 개가 넘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꿈꾸고 설계하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배운 적이 없다는 말이다. 진로 지도와 직업 체험, 성격과 흥미를 확인하고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 가는 대한민국의 청소년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인문계가 아니라 전문계 고등학교나 학교 밖의 청소년들의 선택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과연 그들에게 행복은 뭘까?

꿈꾸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너 행복하니?』를 통해 특별한(?) 아이들의 길찾기를 보여주었던 김종휘가 이번에는 『대한민국 10대, 노는 것을 허하노라』로 청소년들에게 말을 건넨다. 하자센터를 통해 학교 밖 청소년들과 호흡하며 소통했던 경험을 살려 사회적 기업에 관심을 쏟고 있는 저자는 ‘노리단’을 만들어 즐겁게 놀고 있다. 놀이가 삶이 되고 삶이 놀이가 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저자의 이야기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과 경험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귀 기울여 들을 만하다.

우리는 흔히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현실은 다르다’는 애매한 말로 현실과 타협한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나만 튀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자신의 진짜 꿈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따라 다니기도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현실에서는 빈번하게 벌어지고 내 아이만은 안전하고 보장된 성공의 길로 보내고 싶은 부모들의 욕망이 결합되면 난공불락의 상황이 되고 만다.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찾고 보다 빠른 길과 남들보다 많은 돈을 버는 방법에만 관심을 갖게 되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그래서 우리는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는 걸까?

아닌 걸 알면서도 가고 있다면 한번쯤 주변을 돌아보고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먼저 정체성을 찾으라고 말한다.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나는 왜 태어 났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고민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판단 능력이 부족하고 사회경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어른들이 결정해 놓은 것들을 강요하는 것은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보다 나쁠 수도 있다. 모든 일에 냉소적이고 열정과 배짱이 부족하며 부모나 교사와 쉽게 타협하는 쿨한 세대를 넘어 저자가 웜 세대라고 지칭한 십대와 이십대의 모습을 살펴보자.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대부분이 정규직을 얻지 못하는 현실. 설령 정규직이 되었다고 해도 고용 불안과 주택문제, 자녀 양육과 교육 문제 때문에 여유와 행복이라는 말은 머나먼 이야기가 되기 싶다.

지나치게 현실을 부정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십대와 이십대의 모습은 생각보다 심각하고 대안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될 만큼 우울하다. 저자는 놀면서 일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가고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세대 간의 소통을 이뤄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하는 현실은 지금은 힘들지만 보장된 미래와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다. 행복은 즐거운 순간이 모여 이뤄지는 것이다. 그것들이 모여 한 생을 이루고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 우리는 웃음과 행복에 인색하다. 참고 견디는 일을 먼저 가르치며 지금을 희생하고 미래를 꿈꾸게 하는 일에 익숙하다. 일주일을 울기 위해 유충기간이 17년인 매미도 있다. 매미가 부러운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무조건 하고 싶은 대로, 욕망하는 대로, 멋대로 살라는 말이 아니다.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하고 자신만의 꿈도 없이 남들과 경쟁하고 시키는 대로 살며 무조건 참고 견뎌야 하는 인생에 대해 고민해 보자는 말이다. 언제까지 스펙하고 맥잡하며 살 것인가.

무서운 것은 스펙하고 맥잡하고 살다가 청춘을 허비하는 것이다. 십대 때는 내신, 수능, 논술, 면접, 과외의 입시 5종 세트를 갖추느라, 이십대 때는 취업 5종 세트를 갖추느라 시간이 없다. 그 뒤로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취업을 해도 마찬가지다. 맥잡 7종 세트로 몸과 시간을 소진한다. 이렇게 청춘을 보내면 인생에 무엇이 남을까. 나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 100쪽

‘너 놀아봤어?’로 시작하는 김종휘의 이야기는 ‘나 삽질한다’로 끝난다.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현실에 절망한 젊은이를 위한 위로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너무나 진지하게 배어 있다. 누가 자신의 삶을 우습게 보겠는가. 하지만 진짜 놀 줄 모르면 즐거움을 모르고 즐거움을 모르면 행복할 줄 모르며 일할 줄도 모른다는 말이다. 저자는 타인과의 무한 경쟁과 자신을 극복하고 견뎌내는 일만으로는 불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묻는 것 같다. 혹시 그렇게 해서 경쟁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너 행복하니?’

『너 행복하니?』의 준표와 ‘내가 세상이 나를 바꾸는지, 내가 세상을 바꾸는지’ 했던 내기가 생각난다. 청바지 광고를 카피했지만, 이렇게 도전적이고 자신만만한 나만의 색깔과 열정으로 무언가를 즐기고 재밌게 놀아 보자고 제안하는 어른들이 점점 더 많아져야 하는 게 아닌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오늘도 이렇게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답답할 만큼 착하고 순한 모범생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적으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방법과 조금 다르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과 태도를 보여준다. 우리들은 그를 통해 또 다른 길을 보여줄 수 있고 또 다른 삶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10대에게 노는 것을 허락하자. 그것이 진짜 행복한 인생의 시작이라고 말해보자. 혹시 나만 노는 게 아닌가 눈치 보지 말고, 진짜 잘 노는 게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자.


100813-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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