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지음, 강명신 옮김 / 동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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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시대를 풍미하는 책은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다. 최근 『정의란 무엇인가』로 서점가를 휩쓸고 있는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은 제목으로 이 시대를 웅변한다. ‘공정사회’를 부르짖는 사회의 불공정성은 악취를 풍길 정도라는 걸 모두가 안다. 감사원의 지적을 받은 정부 각 부처의 결과를 공개한 최근 국감 자료는 우리 사회의 공정성을 방증한다. 이처럼 한 권의 책은 유행가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 현상의 일부로 시대를 측정할 수 있는 리트머스 역할을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앞서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를 읽어본다. 이 책의 부제는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이다. 짧은 논문에 나타난 저자의 생각은 부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롤스의 정의론 비판으로 27세에 하버드대 교수가 된 석학의 말하기 방식은 공감과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유전학적 강화와 자연발생적 선택에 대한 지극히 자극적인 도입부는 관심을 집중시킨다. 청각장애 부부가 5대째 청각장애인 가족에서 정자 공여자를 찾아 청각장애 아들을 고뱅을 얻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그른가?

부모가 아이를 고른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면 프리미엄 난자를 구하기 위한 광고나 장애아 검사 등에 대한 도덕적 논란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근육 강화, 기억 강화, 신장 강화, 성 감별 등에 대한 서로 다른 기준과 잣대가 아니라 ‘생명’ 자체에 대한 윤리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과연 가능한가? 종교, 인종, 문화적 차이에 따라 도덕적 기준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마이클 샌델도 첨단 과학인 생명공학에 대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에 대한 한계를 토로한다. 배아세포에 이용에 관한 서로 다른 기준과 견해는 이 논쟁의 출발이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생명으로 볼 것인가. 이 이야기는 에필로그에서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의 전제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생체공학적 운동선수와 자녀를 디자인하는 부모 그리고 우생학에 대한 자유주의와 공동체적 관점을 다룬 본문의 내용들은 철학적, 윤리적 논란에 대해 어렵지 않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논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논점에 대한 문제를 제시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저자의 이러한 말하기 방식은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이 단순히 기능적 관점이나 종교적 관점이 아닌 인간사회의 보편타당한 윤리적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음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아이비와이즈사가 최상류층을 상대로 대학 입학과 관련된 지원에 2년 동안 3만 2995달러가 드는 ‘플래티넘 패키지’를 출시했다. 창업자 캐서린 코헨은 “나는 대학 지원만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인생 설계를 도와주죠”라고 말한다. 한국의 맞춤형 고액과외, 입학사정관제 관리 프로그램 등과 다를 바 없다. 저자는 아이를 과도하게 공부시키는 일에 대한 예를 들어 우생학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아이들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부모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면 도덕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주장일 것이다.

윤리학의 관점에서 ‘생명’의 문제는 과학의 발달을 따라가는 형태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논란은 가열되지만 기술의 진보는 철학을 앞선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합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생명 윤리를 논하는 것은 그것 자체에 대한 위험부담을 넘어 우리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어쩌면 영원히 그 꿈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 인간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의 욕망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마이클 샌델은 이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을 제안 한 듯하다. 정답이 없다고 해서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이다. 다수결로 결정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윤리학자들의 논리가 정답일 수도 없다.

이 책은 이러한 수많은 논쟁과 서로 다른 관점에 대한 성찰과 당면한 생명공학에 대한 제문제를 꼼꼼하게 살피고 있다.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완벽하고 근사한 이론을 제시하고 훌륭한 대안을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생각의 방향과 일관성 없는 윤리적 기준들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가능성에 도전하면서도 도덕적 가치와 과학적 발전의 욕구 사이에서 갈등할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어 끝을 맺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수많은 담론들은 풍성한 말잔치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의 윤리적 기준과 도덕적 잣대가 ‘생명’이라고 해서 비껴갈 수는 없다. 정교하고 흔들리지 않는 법과 제도를 만들 수는 없겠지만 우리 사회의 기준과 원칙을 세워나가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건강한 대한민국의 출발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생명의 윤리’ 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삶의 윤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100930-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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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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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를 담당하는 수색중대에서 군생활을 마감할 무렵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가 삐삐를 구입해서 복귀했다. 주둔지 마지막 언덕을 돌아 GOP 라인 부근에 이르자 삐삐의 안테나가 사라졌다. 무용지물이 된 조그만 기계장치를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토요일에 전역 신고를 마치고 월요일부터 출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KTF 016 번호를 예약해서 받은 전화 번호를 010으로 바꾸면서 작년에 번호가 바뀌었다. 휴대폰이 생기기 전에는 사람들이 생활이 지금보다 불행했을까?

신속하고 편리한 생활은 생각할 시간과 여유 있는 삶을 앗아갔다. 우연에 기대지 않아도 좋을 만큼 뭐든 정확하고 빈틈이 없어졌다. 숨가쁘게 살 수 밖에 없는 촘촘한 네트워크로 세상은 연결되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휴대폰이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마트폰 시대를 맞아 이제는 문자와 메일, 소셜 네트워크로 모든 사람과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시대를 살아간다. 문득, 강원도에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풀씨를 코팅해서 만든 책받침을 우체통에 꽂아 놓았던 친구를 떠올린다. 스무 살 무렵이었다. 그때는 전화벨이 울려도 나를 찾는 전화가 많지 않았다. 공중전화 박스를 지날 때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고, 그 마음의 문을 닫고 스스로 상처 받던 시절이었다.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보편적 정서를 담아낸 소설들의 종착역은 사랑이다. 작가는 어떤 종류의 사랑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할 뿐이다. 사랑을 다양하게 변주했던 신경숙의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을 천천히 읽는 가을은 또 어떤가.

기억이란 제 스스로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속성까지 있다. 기억들이 불러일으킨 이미지가 우리 삶 속에 섞여 있는 것이지, 누군가의 기억이나 나의 기억을 실제 있었던 일로 기필코 믿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고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면 나는 그 사람의 희망이 뒤섞여 있는 발언으로 받아들인다. - 22쪽 

연애소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구체적 시공간을 걷어내고 보편성을 담아내려는 노력과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는 이 소설은 ‘시대’와 ‘사랑’ 두 가지를 모두 아프게 읽어내야 한다. 그러한 시대가 있었고 그러한 사랑이 있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없는 행간의 깊이와 떨리는 문장과 긴 호흡이 압권이다. 그러나 지나친 감수성과 인물들이 가진 작위적 성격은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공감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은 곳곳에 흘러넘친다. 오랬동안 신경숙의 소설을 읽어온 독자로서 피로감이 들기 시작한 걸까. 『엄마를 부탁해』의 감동과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서로 다른 감정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랑이 차고 넘쳐 부담스럽다.

신형철은 “왜 나는 지드와 헤세의 청춘소설에 감동받은 척했던 것일까. 그들의 책은 아름다웠지만 상처가 만져지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아픔을 느끼지도 못했었는데. 그러나 신경숙의 소설은 아파서, ‘세계는 떠나버렸다. 내가 널 짊어져야 한다’라는 첼란의 시구를 생각나게 했지. 자신의 삶을, 동료의 죽음을, 심지어 공동체의 운명을 짊어져야 했던 한 시대의 ‘크리스토프’들이 여기 있네.”라고 말했지만 나는 지드와 헤세의 청춘소설에 감동받았다. 그것은 작가의 힘이나 작품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나이와 감수성과 상황 때문이었다.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청춘의 한 구석의 먼지를 털어내야 하는 일은 기쁨이거나 고역이다. 신경숙의 소설은 너무 아파서, 한 시대의 ‘크리스토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듯해서 부담스럽다.

내가 그쪽으로 갈 수 있는 마음인지 그럴 수 있는 상황인지는 상대가 아닌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네 명의 청춘과 윤교수는 한 시대와 서로 다른 방식의 사랑과 아픔을 토해낸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도 모든 사람은 ‘크리스토프’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강을 건너는 사람과 강을 건너게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네. 여러분은 불어난 강물을 삿대로 짚고 강을 건네주는 크리스토프이기만 한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 전체이며 창조자들이기도 해. 때로는 크리스토프였다가 때로는 아이이기도 하며 서로가 서로를 강 이편에서 저편으로 실어나르는 존재들이네. 스스로를 귀하고 소중히 여기게. - P. 63쪽

오래된 기억 속의 조작된 추억들을 수채화로 채색하고 싶은 사람들이나 가장 비극적인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사람에게 권할 만한 소설이지만, 신경숙의 소설 중에서는 만지작거리다가 다른 소설들을 우선 추천하게 될 것 같은 작품이다.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말해질 수밖에 없는 청춘소설 한 권을 읽은 셈이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기억의 언저리를 기웃거렸을 뿐이다.

또다시 주어진 시간과 과거의 결과인 현재를 돌아본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려도 듣지 못하는 순간이 있고 간절하게 기다려도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때도 있는 법이다. 우리는 때때로 그 모든 순간을 인생이라고 부른다. 다 지나가는 인생.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 291쪽


100928-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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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들
김중혁 지음 / 창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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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젊은 날,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한강의 야경을 내다보다가 문득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이 너무 낯설어 뛰어 내리고 싶었던 적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세상은 핵폭발을 일으키듯 내가 감당할 수 없을만큼 혼란스럽고 거대한 압력으로 다가왔다. 그 후로 오랫동안 규칙과 질서는 사라졌고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와 내가 생각하는 원칙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음을 깨달았다. 집에 돌아올 무렵 술이 깨기 시작하면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소설을 뒤적이거나 비디오를 봤다. <퐁네프의 연인들>이나 <블루벨벳> 같은 영화였던 것 같기도 하고 <씨네마 천국>이나 <베를린 천사의 시>를 몇 번씩 다시 보기도 했던 것 같다. 조지 클루니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던 <황혼에서 새벽까지>는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델리카트슨>만큼 인상적인 영화로 내 기억의 저편에 저장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히 낮과 다른 밤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혐오감에서 비롯된 호기심이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뱀파이어나 좀비를 다룬 모든 영화나 소설들은 현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아니라 현실 너머에 존재할 지도 모르는 또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과 희망에 대한 경이로움이다. 요지부동인 현실에 대한 권태와 끝없이 반복되는 인간 역사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서성거리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다. 죽음에 대한 모든 살아있는 인간의 영원한 갈증! 바로 그것이 드라큐와와 뱀파이어와 좀비와 강시와 구미호와 귀신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김중혁의 장편소설 『좀비들』은 그야말로 좀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좀비 소설이다. 좀비란 살아있는 시체를 말한다. 서인도 제도 원주민의 미신과 부두교의 제사장들이 마약을 투여해 되살려낸 시체에서 유래한 단어라 한다. 실제 존재 여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과학으로 예술을 증명하려는 어리석음이나 예술과 과학을 경계짓는 따위의 논란은 이 소설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좀비를 통해 현실 아닌 현실을 창조해 낸다. 현실과 상상 세계를 이어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좀비들이다. 그들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니고 죽었지만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그 경계인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성찰해 보자고 말하는 것 같다.

사실 이 좀비 소설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여전히 살아있는 인간들이다. 좀비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조연이며 부수적 역할에 불과하다. 본격적인 판타지나 SF로 보기는 어려운 애매모호한 장르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소재의 새로움과 낯선 기법으로 한국 소설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겠지만 그 성격이 분명하지 않아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아야 할 작품이기도 하다. 이와 유사한 작품들이 더 나오거나 김중혁의 관심이 좀 더 확장될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 소설의 얼개는 과거 회상 형식의 액자식 구성이다. 안테나 감식반 일을 하면서 만난 좀비 이야기를 시작하는 주인공은 유일한 혈육이자 정신적인 지지대였던 형의 죽음으로 인해 삶의 의욕을 상실한 사람이었다. 도서관에서 만난 뚱보130과 수신감도가 0인 고리오마을에서 만난 홍혜정 그리고 그녀의 딸 홍이안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고리오 마을의 비밀이 밝혀지고 좀비들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소설은 얽힌 실타래가 조금씩 풀린다. 추리소설 기법으로 고립되고 낯선 세계에 좀비들을 등장시켜 현실 밖의 세계와 현실의 접목을 시도한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삶과 죽음의 공존이 아니라 특정 공간에 만나는 좀비는 낯설고 이물스럽다. 공포와 전율의 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민과 동경과도 거리가 멀다. 이 소설에서 좀비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존재다. 다만 좀비를 통해 비정한 인간 존재에 대한 반성이 있을 뿐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서 해석도 이해도 불가능한 충격이다. 작가는 죽음을 포함한 모든 삶의 ‘충격’을 이렇게 말한다.

충격이란 건 말이죠. 받아들이는 쪽에서 마음만 먹으면 아무 일도 아닌 게 될 수 있는 겁니다. 아주 작은 충격이 커다란 폭발을 동반할 수도 있지만 엄청난 충격이 깃털처럼 가벼워질 수도 있는 거죠. 우리는 새로운 물건을 발명한 게 아니라 충격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개발한 겁니다. - P. 12

인간이 죽음의 세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좀비가 되는 것도 살아있는 인간들의 욕망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작가는 좀비와 대면한다는 것을 ‘허공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깊은 구멍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죽음과 마주하는 일이다.’라고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좀비를 통해 죽음을 마주하는 인간은 이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살아있는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용당하는 좀비만 등장할 뿐이다.

사람들은 ‘정작 알아야 할 것들은 알아내지 못하고,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에 답해 보자. 단순한 호기심은 본능에 가깝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과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구별이나 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홍혜정의 과거나 고리오마을에 대해 주인공이나 뚱보130은 알 필요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소설적 진실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삶의 욕망을 넘어 선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숨김과 감춤의 미학이 아니라 드러내고 싶은 작가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진실’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 것일까. 소설은 진실한가, 아니 인간이 아닌 좀비들은 그 진실을 알고 있을까.

"진실이 아무런 가치도 없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진실은 그저 사실의 한 종류일 뿐이에요."


100924-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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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에 서쪽을 빛내다 창비시선 3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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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해 봄 불 타기 전 낙산사 뒷방에 얼마쯤 머물자고 청했을 때 스님 한 분, 밥값으로 종두일을 권했으나 그만 못하고 말았는데 이제 와 후회한다
- ‘어느해 낙산사 새벽종 치는 일을 권해 받았으나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함’ 중에서

*종두 : 절에서 종 치는 일을 하는 사람

말년에 시골에 가 텃밭이나 일구고 낚시나 하며 자연을 벗삼아 여유있게 살고 싶은 게 꿈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이없어 하는 농부나 어부의 심사를 헤아려 보자. 사는 일이 덧없고 한 점 구름처럼 사라져버리는 시간 앞에서 인간의 육신과 현실의 삶은 그저 덧없기만 하다. 허무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욕망에 대한 전혀 다른 관점에 대한 고민이다. 우리는 얼마나 더 원하는가.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등에서 보여주었던 장석남 시인의 관심은 『뺨에 서쪽을 빛내다』에서도 변함없이 계속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랑’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말은 반어이거나 역설이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미래가 불안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수록 사람들은 ‘사랑’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모태신앙처럼 남들보다 ‘사랑’을 더 많이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뺨의 도둑

나는 그녀의 분홍 뺨에 난 창을 열고 손을 넣어 자물쇠를 풀고 땅거미와 함께 들어가 가슴을 훔치고 심장을 훔치고 허벅지와 도톰한 아랫배를 훔치고 불두덩을 훔치고 간과 허파를 훔쳤다 허나 날이 새는데도 너무 많이 훔치는 바람에 그만 다 지고 나올 수가 없었다 이번엔 그녀가 나의 붉은 뺨을 열고 들어왔다 봄비처럼 그녀의 손이 쓰윽 들어왔다 나는 두 다리가 모두 풀려 연못물리 되어 그녀의 뺨이나 비추며 고요히 고요히 파문을 기다렸다


뺨‘의’의 서쪽을 빛내는 것도 아니고 뺨‘에’ 서쪽을 빛낸다는 제목을 한참 들여다보며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제목만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전작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해가 저무는 시간을 방향을 나타내는 서쪽을 뺨에 빛낸다는 말은 소멸에 대한 아쉬움, 이별 직전의 안타까움이 배어있다.

여전히 부끄럽고 두근거리는 그녀 혹은 그의 뺨을 생각해 보자. 발그스름하게 빛나던 그 고운빛을 떠올려 보자. 그것이 바로 뺨이 가장 빛나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시인은 그 사랑의 순간을 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

묵집에서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나는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오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묵집에서도 사랑을 보는 것이 시인의 눈이고 양념간장부터 찾는 것이 우리들의 눈이다. 서글프지는 않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느냐의 문제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사랑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위태로운지 그것만 생각하면 되지 않겠는가. 시인의 시를 통해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 조차 어느 사랑의 눈빛을 빌려오면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시 읽기의 즐거움은 아닐는지.

찬 바람이 불고 어둠이 내리면 사람들은 하나둘씩 따뜻하게 불켜진 집으로 돌아간다. 이제 가을은 오자마자 뒷모습을 보일 터이고 어둠은 깊어만 갈 것이다. 뺨에 서쪽을 빛내던 사람도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가고 모두가 혼자 남겨지는 시간을 감당해야 할 시간이 온다. 그것을 ‘석류 익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석류 익는 시간

당신은 내게 비단을 주니

그걸 눈에 두르고
더듬어서 내 맘속 둥그런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보네

항아리에 늘 허공이나 담아두는 당신의 뜻을 모르니
붉은 비단이나 두 눈에 곱게 두르고 들어가보면 알려나?

하늘이 온통 노을로 꽃핀
이 부러진 듯 시디신
석류 익는 시간

가슴 속에 ‘허공’을 담고 싶다는 것도 또 하나의 이기적인 욕망에 불과할지 모른다. 간절함 만큼 어리석은 감정이 또 있을까. 그것은 비움과 채움의 문제와 조금 다르지만 결국 붉은 비단이나 두 눈에 곱게 두르고 들어가보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시디신 석류 익는 시간’은 견뎌내야 하는 생의 어느 한 순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모든 순간일 수도 있다.

죄의식이나 부끄러움보다 사랑과 연민에 대해 마음의 갈피들을 짚어내는 시인의 목소리가 큰 울림을 갖는 것은 장석남의 특징이며 독자들에게 가장 적확하게 시를 보여줄 수 있는 그의 능력이다. 잘 할 수는 것을 계속 잘 하는 것도 하나의 미덕이다.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 다른 생각, 다른 대상들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의 변화가 다르게 표현될 수도 있겠다. 그때 독자들은 또 다른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뿐.

지나버린 ‘처서’에 나는 무엇을 꺼내 말렸을까?

처서

마른 빨래는 방안으로 던지고
덜 마른 빨래들을 처마 아래 건다

나뭇잎이 쩡쩡 소리내며 물든다

전기 검침원의 오토바이 소리 오솔길을 미끄러져 내려가고
나는 바지춤이 풀린 줄도 모르고 그를 배웅했다

담장 밖에 아무렇게나 몸 버린 구절초는 구절초
빈 몸의 옥수숫대 끝에서 새가 울어
건너 산이 건너온다

이해가 가지 않던 일들 몇 내놓기 좋다
덜 마른 빨래를 한번 더 손에 쥐어본다

장마에 젖은 옷이나 책을 음지에 말리기도 했다는 처서가 이쯤이어야지 싶다. 짱짱한 햇빛에 내다 말리지 못하고 그늘에서 천천히 말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들 마음 속에도.

빳빳하게 마른 빨래처럼 건조하고 상쾌하기만 한 인생이 어디 있을까. 매일매일 우울하고 습한 일들이 벌어지는 일상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 젖은 빨래를 처마 밑에 널 듯 힘들고 괴로운 일들은 조금씩 내어 말려야 한다. 시인은 천업인 ‘시’를 다 지운다는 말로 이 시집을 닫는다. 그것은 소멸이 아니라 자유이다. 있는 것을 없앤다는 뜻이 아니라 경계를 지우고 시의 말들을 자유롭게 풀어 놓고 싶다는 말이 아닐까. 그래서 비어있음 즉 ‘공복을 즐기’고 싶다고 한 것은 아닐까.

비움으로 차오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얼만 소중한 경험인지 깨닫는데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시를 다 지우다

새벽빛도
홑겹만 남고

시인으로서도 참으로 오랜만에
새벽뿐인 자리에 떨고 앉아
공복을 즐기다

언제 스민 건가?
먹물 스민 손톱을 보며
그믐달처럼 웃는다

공복 창자의 이랑마다
무슨 꽃씨를 뿌릴까
무슨 망아지를 풀어볼까

시의 나라의 국경을 부수고
시의 마을의 약도를 지우고
시를 지우고
시의 자리에 앉아
어라,
아침이 와서
함께 덜덜 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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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0-09-23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묵집에서 를 읽으면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하던 그 어느 시절의 사랑의 눈빛이 아른거리며 떠오르곤 하더군요.

sceptic 2010-09-28 23:21   좋아요 0 | URL
이제 호젓하신가요?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 인간 이봉창 이야기
배경식 지음 / 너머북스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결과’보다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역사가 서술될 때 비로소 영웅과 지사의 인간적인 면모와 삶의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독립운동사이고 인간의 역사이다. 그래서 나는 ‘영웅신화’가 아닌 삶을 고민하는 인간의 역사로서 독립운동사를 쓰고 싶었고, 이봉창은 그러한 나의 문제의식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 P. 14

많은 책을 읽다보면 눈에 띠는 작가와 만날 때가 있다. 오래 사귄 벗을 만날 때 만큼이나 진한 감동을 받을 수 있고 깊은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며 삶의 화두를 던져주기도 한다. 그것은 작가의 삶이 온 몸으로 자신의 생각을 실천한데서 오는 감동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잘 벼려진 칼날처럼 예리한 감수성이나 무심하게 던지는 촌철살인의 통찰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경지이다.

어떤 분야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한 열정을 다하다 보면 그러한 경지가 자연스럽게 얻어질 수도 있다. 그것은 순전히 ‘열정’과 부단한 ‘노력’ 덕분일 게다. 이것이 가장 신뢰할 만한 안목이 아닐까? 천재적인 영특함과 찰나의 판단력이 주는 날카로움에 경탄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전자의 지긋함에 더 높은 점수를 주는 편이다. 배경식의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는 공부와 연구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길어 올린 사유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찬사를 아끼지 않고 싶다.

무릇 역사는 영웅의 행적을 기록하거나 승자의 편에서 서술된 변명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반드시 뒤집어볼 수 있는 비판적 안목이 필요하다. 이 책은 기존의 독립운동사에 대한 불경스런 도전일 수도 있고 영웅담에 대한 개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외면하고 싶은 진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용기를 낼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기도 하다. 영웅은 진정 영웅으로 태어나 영웅답게 살다 죽었을까?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수십 개의 문장을 걷어내고 줄이고 줄여 단 세 줄의 시를 만들어 낸 시인의 노고를 상찬하기 위해 이 책의 맨 앞에 이 시를 싣지는 않았으리라. ‘너에게 묻는다’는 안도현의 시가 놓인 자리에 따라 그 의미는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인간 ‘이봉창’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며 저자가 독자들에게 먼저 시 한 편을 권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이봉창’의 모습이 우리가 믿고 싶은 영웅이 아닐지라도 함부로 발로 찰 수 없다는 전제에서 이 책은 출발한다. 그래서 조금은 무겁고 차분한 마음으로 읽어야할 책이기도 하다.

1932년 1월 8일 일본 경시청 앞에서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만 31세의 젊은 나이에 성공과 실패를 따지기 전에 무모함을 따지 전에 그 모든 것을 알고도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의 용기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자는 저자의 말은 역사적으로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일제 식민지 일본의 심장부를 노린 일대 사건은 독립운동사에서도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저자는 그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을 평가절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인다.

이 책의 목적은 앞서 인용한대로 결과가 아닌 과정의 역사를 보여주는 데 있다. 영웅의 신화가 아니라 고뇌하는 인간의 역사가 우리에게 지극히 커다란 감동과 깨달음을 주는 것은 아닌가. 평범한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로 살면서 느꼈을 일본인과의 차별,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조선인의 굴레, 천황의 행렬을 보기 위해 휴가를 낼 정도로 뼛속까지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인간 이봉창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날 뻔했다.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에 충실했던 그의 삶은 영웅으로 분장된 독립운동가의 모습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천황 폭살을 감행한 이봉창의 용기는 다시 논할 필요도 없다. 다만 거기까지 가야했고 가고 싶었고 갈 수 밖에 없었던 한 식민지 청년의 생이 눈물겹다. 저자는 수많은 자료와 참고문헌을 통해 마치 퍼즐을 맞추듯 독립운동가 이봉창과 인간 이봉창의 삶을 직조해낸다. 객관적인 자료와 문헌을 통해 만들어진 신화의 화려함을 걷어내고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순간, 이봉창은 오히려 화려하게 부활한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통해 살펴본 이봉창의 삶은 다르지 않다. 영웅이면서 식민지 청년이었던 이봉창을 통해 저자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한국적 근대의 모습이며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아니었을까 싶다.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일상은 비루하고 욕망은 순수하다. 어떤 사건과 행위가 그 모든 것을 가릴 수는 없다. 이봉창이 스스로 지었던 일본이름 ‘기노시타 쇼조’를 앞세워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다고 한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이봉창이기 전에 기노시타 쇼조였던 그의 변화과정을 읽어내고 깊은 고뇌와 신산스런 삶을 읽어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었을지. 그래서 작가의 ‘이 글은 독립운동가의 영웅담이 아니라 식민지 사회라는 ‘한국적 근대’를 경험했던 한 식민지 청년의 자기고백이자 삶의 기록’이라는 프롤로그의 선언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우리는 독립 운동가 이봉창이 아닌 수많은 ‘기노시타 쇼조’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100919-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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