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 인간 이봉창 이야기
배경식 지음 / 너머북스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결과’보다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역사가 서술될 때 비로소 영웅과 지사의 인간적인 면모와 삶의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독립운동사이고 인간의 역사이다. 그래서 나는 ‘영웅신화’가 아닌 삶을 고민하는 인간의 역사로서 독립운동사를 쓰고 싶었고, 이봉창은 그러한 나의 문제의식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 P. 14

많은 책을 읽다보면 눈에 띠는 작가와 만날 때가 있다. 오래 사귄 벗을 만날 때 만큼이나 진한 감동을 받을 수 있고 깊은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며 삶의 화두를 던져주기도 한다. 그것은 작가의 삶이 온 몸으로 자신의 생각을 실천한데서 오는 감동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잘 벼려진 칼날처럼 예리한 감수성이나 무심하게 던지는 촌철살인의 통찰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경지이다.

어떤 분야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한 열정을 다하다 보면 그러한 경지가 자연스럽게 얻어질 수도 있다. 그것은 순전히 ‘열정’과 부단한 ‘노력’ 덕분일 게다. 이것이 가장 신뢰할 만한 안목이 아닐까? 천재적인 영특함과 찰나의 판단력이 주는 날카로움에 경탄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전자의 지긋함에 더 높은 점수를 주는 편이다. 배경식의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는 공부와 연구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길어 올린 사유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찬사를 아끼지 않고 싶다.

무릇 역사는 영웅의 행적을 기록하거나 승자의 편에서 서술된 변명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반드시 뒤집어볼 수 있는 비판적 안목이 필요하다. 이 책은 기존의 독립운동사에 대한 불경스런 도전일 수도 있고 영웅담에 대한 개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외면하고 싶은 진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용기를 낼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기도 하다. 영웅은 진정 영웅으로 태어나 영웅답게 살다 죽었을까?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수십 개의 문장을 걷어내고 줄이고 줄여 단 세 줄의 시를 만들어 낸 시인의 노고를 상찬하기 위해 이 책의 맨 앞에 이 시를 싣지는 않았으리라. ‘너에게 묻는다’는 안도현의 시가 놓인 자리에 따라 그 의미는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인간 ‘이봉창’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며 저자가 독자들에게 먼저 시 한 편을 권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이봉창’의 모습이 우리가 믿고 싶은 영웅이 아닐지라도 함부로 발로 찰 수 없다는 전제에서 이 책은 출발한다. 그래서 조금은 무겁고 차분한 마음으로 읽어야할 책이기도 하다.

1932년 1월 8일 일본 경시청 앞에서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만 31세의 젊은 나이에 성공과 실패를 따지기 전에 무모함을 따지 전에 그 모든 것을 알고도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의 용기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자는 저자의 말은 역사적으로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일제 식민지 일본의 심장부를 노린 일대 사건은 독립운동사에서도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저자는 그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을 평가절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인다.

이 책의 목적은 앞서 인용한대로 결과가 아닌 과정의 역사를 보여주는 데 있다. 영웅의 신화가 아니라 고뇌하는 인간의 역사가 우리에게 지극히 커다란 감동과 깨달음을 주는 것은 아닌가. 평범한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로 살면서 느꼈을 일본인과의 차별,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조선인의 굴레, 천황의 행렬을 보기 위해 휴가를 낼 정도로 뼛속까지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인간 이봉창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날 뻔했다.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에 충실했던 그의 삶은 영웅으로 분장된 독립운동가의 모습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천황 폭살을 감행한 이봉창의 용기는 다시 논할 필요도 없다. 다만 거기까지 가야했고 가고 싶었고 갈 수 밖에 없었던 한 식민지 청년의 생이 눈물겹다. 저자는 수많은 자료와 참고문헌을 통해 마치 퍼즐을 맞추듯 독립운동가 이봉창과 인간 이봉창의 삶을 직조해낸다. 객관적인 자료와 문헌을 통해 만들어진 신화의 화려함을 걷어내고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순간, 이봉창은 오히려 화려하게 부활한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통해 살펴본 이봉창의 삶은 다르지 않다. 영웅이면서 식민지 청년이었던 이봉창을 통해 저자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한국적 근대의 모습이며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아니었을까 싶다.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일상은 비루하고 욕망은 순수하다. 어떤 사건과 행위가 그 모든 것을 가릴 수는 없다. 이봉창이 스스로 지었던 일본이름 ‘기노시타 쇼조’를 앞세워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다고 한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이봉창이기 전에 기노시타 쇼조였던 그의 변화과정을 읽어내고 깊은 고뇌와 신산스런 삶을 읽어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었을지. 그래서 작가의 ‘이 글은 독립운동가의 영웅담이 아니라 식민지 사회라는 ‘한국적 근대’를 경험했던 한 식민지 청년의 자기고백이자 삶의 기록’이라는 프롤로그의 선언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우리는 독립 운동가 이봉창이 아닌 수많은 ‘기노시타 쇼조’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100919-0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